지난 토요일 둘째 아이 유치원 참여수업이 있었다. 아이가 2주 전에 퇴근한 나에게 가정 통신문을 보여주며 애교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 우리 유치원에 초대해요~"
토요일 오전에 대학로에서 다른 일정이 있어서 서둘러 마무리하고 아이 손을 잡고 유치원을 향했다. 불과 4개월 전에 입학생 설명회에 같이 갔을 때는 엄마랑 떨어져 있다며 강당 한쪽 놀이공간에서 서럽게 울던 아이였는데 오늘은 방긋방긋 웃었다.
교실에 도착하니, 앞쪽에 마련해 놓은 의자에 아이들이 쪼르륵 앉고 학부모들은 두 발자국쯤 뒤에 있는 의자에 앉아서 바라보는 형태였다. 평소 아이들이 앉는 작은 의자에 엉덩이를 구겨 넣고 앉았다. 담임선생님의 본인 소개와 함께 참여수업이 시작되었다. 아이들은 신기할 만큼 초롱초롱한 눈으로 선생님을 쳐다봤고 집중했다. 선생님의 말 한마디, 몸짓 하나에 반응했다. 맞아. 나도 저때는 저랬었지.
선생님은 지난 4개월간 아이들이 했던 활동들을 사진과 함께 설명해 주었다. 아이들이 꽃을 심고 개미를 관찰하고 소풍을 가고 등등. 그중 유난히 내 눈길을 끄는 PPT 페이지가 있었다. 아이들이 물감을 섞어서 만든 새로운 색에 이름을 붙여주었다며 보여준 페이지였다. 'ㅁㅁ반만의 색깔을 소개합니다'라는 글자와 함께 물병에 새로운 색깔의 물감이 담겨있는 사진이 있었다. 선생님이 질문했다.
"우리 아이들은 각각의 색깔에 무슨 이름을 붙여 주었을까요?"
나는 이 사진을 보고 '짙은 하늘색, 어두운 하늘색, 어두운 초록색'을 떠올렸다.
선생님이 마우스를 클릭하자 아이들이 지어준 색깔 이름들이 모니터에 나타났다.
여름 날씨 구름색, 비 올 때 구름색, 천둥색
"우와......"
내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신선했다. 구름을 짜서 병에 담으면 정말 이런 색일 것 같았다. 하늘에 치는 천둥을 그릴 수 있다면 진짜 이런 색일 것 같았다. 색깔 이름이 마음에 쏙 들어서 핸드폰을 꺼내 그 PPT 한 장만 서둘러 찍었다.
다음 페이지 사진은 '연보라색, 보라색 그리고 짙은 남색' 같이 보였는데, 이번에도 아이들이 붙여준 이름은 남달랐다.
덜 익은 포도색, 포도색, 번개색
내 머릿속 색깔 이름들은 그저 종이 안에 갇혀있는 물감 같았는데 아이들이 지어준 이름을 들으니 마치 그 색깔의 물감들이 종이 밖으로 나와서 뛰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신선함에 가슴이 설렜다.
선생님의 설명이 끝나자 아이들 차례였다. 아이들이 선물을 준비했다며 노래와 함께 율동을 시작하였다.
사랑해요 이 한 마디 참 좋은 말
우리 식구 자고 나면 주고받는 말
사랑해요 이 한 마디 참 좋은 말
엄마 아빠 일터 갈 때 주고받는 말
이 말이 좋아서 온종일 신이 나지요
이 말이 좋아서 온종일 일맛 나지요
이 말이 좋아서 온종일 가슴이 콩닥콩닥 뛴데요
......(중략)......
요새 '사랑해요 이 한 마디~ 참 좋은 말~' 이 구절을 맨날 흥얼거리던 이유를 이제야 알았다. '사랑해요'라는 가사에는 자그마한 두 손을 모아 하트를 만들고 '자고 나면'이라는 가사에는 두 손을 겹쳐 귀 옆에 갖다 대는 동작을 했다. 연신 예쁜 미소를 날리면서 귀엽게 어설픈 율동을 하는 모습이라니. 노래가 점점 끝나가는 게 싫었다.
노래가 다 끝나자 아이들은 '엄마 아빠 사랑해요'라고 외치면서 손가락으로 하트를 뿅뿅 쏘았다. 내 입은 헤벌쭉 웃었는데 이상하게 코끝은 찡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