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초, 습한 공기가 나를 바닥으로 짓누르는 느낌이었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월요일 아침 병원에 출근했다. 오전 9시쯤 사내 메신저로 메시지가 하나 떴다.
"교수님 안녕하세요. 고객행복팀 고객의 소리함 담당자 OOO입니다. 제가 그동안 다른 이메일로 칭찬 카드 내용을 전해드리고 있었습니다.......(중략)...... 22년부터 23년 5월까지 교수님 앞으로 접수된 칭찬 카드 내용을 보내드리오니 참고 부탁드립니다."
나는 네이버 메일을 주로 쓰는데 고객행복팀에는 내가 예전에 쓰던 다른 메일 주소가 등록되어 있었던 것 같았다. 얼떨결에 그동안 쌓인 칭찬 카드 여러 개를 한 번에 받게 되었다.
한 편 한 편 읽을 때마다 환자들 얼굴이 떠올랐다. 힘겨운 항암치료 과정 중에도 나를 떠올리며 종이 카드에 한 자 한 자 썼을 모습들이 떠올라 마음이 찡했다. 이제 마지막 파일을 읽을 차례였다. 파일을 여는 순간, 몸이 정지된 느낌이었다. 미처 예상하지 못한 환자였다.
마지막으로 열어본 칭찬카드는 올해 1월에 임종한 폐암 환자가 작성한 것이었다. 그녀는 올해 내가 처음으로 썼던 글의 주인공이었다. 그녀의 해맑았던 모습, 상태가 나빠지면서 숨이 턱에 차올라하던 모습, 그녀와 옥상정원에서 했던 마지막 산책 그리고 그때 보여준 환한 웃음 등 그녀가 쉽게 잊히지 않아 올해 초에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아 [웃어줘서 고마워요.]라는 글을 썼었다.
칭찬카드의 작성일시는 작년 7월 7일. 그녀가 세상을 떠나기 반년 전, 오늘로부터 1년 전이었다.
......(중략)...... 말로만 듣고 TV에서나 보던 골든 타임 - 교수님께서 저를 지켜주셨습니다. 진심으로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항상 건강하십시오.
그때가 떠올랐다.
작년 여름 그녀는 입원 중에 갑자기 호흡곤란이 심해졌다. 폐암 때문에 평소에도 약간 숨이 차는 상태였지만 그날 오후는 유난히 증상이 빠르게 악화되었다. 급히 흉부 CT를 찍었다. 심장을 둘러싸고 있는 두 개의 막 사이에 물(심낭삼출액)이 갑자기 늘어나 심장을 누르고 있었다.그대로 두었다가는곧 혈압이 떨어지고 심장이 멎을 수도 있는 상태였다.
점점 숨이 차오르는 그녀에게 '심장 주변에 물이 많이 차서 이대로 있다가는 심장이 더 눌려 숨을 쉬기가 더 어려워질 수도 있으니 물을 빼는 시술을 해야 하고 상태가 위험하니 중환자실이 준비되는 대로 이실하겠다'고 다급히 설명했다.
순환기내과에 연락한 결과 다행히그날 저녁에 응급시술을 해주기로 하였다.오후 6시쯤 시술이 시작되었다. 시술실 밖 유리창에서 시술 상황을 지켜봤다. 혈소판도 낮아서 자칫하면 시술 중에 과다출혈이 발생할 수 있을 수 있었다. 부정맥이 갑자기 발생할 수도 있었다.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다행히 무사히 시술이 끝났고 그녀는 시술 전보다 숨을 덜 가빠했다. 그녀에게 다가가 손을 잡았다.
"무섭고 아프셨을 텐데 정말 잘하셨어요. 시술 잘 되었어요."
그녀는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다음날 오후 그녀는 상태가 좋아져서 다시 일반 병실로 돌아왔다.숨이 가쁘기는 했지만 어제보다 훨씬 나아 보였다. 어제 상황이 기억나냐고 물었더니, 병실에서 응급상황이라고 다급해하던 내 목소리까지만 기억이나고 그 이후에는 기억이 잘 안 난다고 했다. 눈을 떴는데 중환자실이었고 다시 잠이 들었다고 했다. 그녀는 상태가 더 호전되어 그다음 주에 퇴원을 했다.
카드 내용과 시기를 보니 그 일이 있은 후에 환자가 쓴 것이었다. 그녀가 떠난 후 마음에 계속 남아글을 썼다. 반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이제야 그녀에 대한 마음이 좀 고요해진 상태였는데 카드 한 장이 다시 마음을 휘저어 놓았다.마치 그녀가 며칠 전에 보낸 것만 같았다. 지켜줘서 고맙다던 그녀였지만 결국나는 그녀를 죽음으로부터 지켜주지 못했다.
그녀가 떠난 뒤 그녀에게 말하고 싶었다. 환한 웃음으로 기억할 수 있도록 웃어줘서 고마웠다고.그녀에게 하고 싶은 말이 한 가지 더 생겼다. 힘든 투병생활에도 오히려 나에게 고맙다고 말해줘서 정말 고마웠다고. 하지만 나는 그녀에게 카드를 보낼 수가 없다.
카드를 읽고 그날 오후 2시쯤병원 옥상정원(하늘공원)을 걸었다. 올해 1월에 그녀랑 마지막 산책을 왔을 때는 눈이 소복이 쌓여 있었는데 지금은 햇살이 뜨겁다. 그때는 가운을 입고도 덜덜 떨렸는데 지금은 땀이 맺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