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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석주 Oct 10. 2019

말에 대하여.

초단편소설

선배 말은 죽 같아요. 담백하고 자극적이지 않은 게 술술 넘어가 거든요.


지수가 말했다. 목 주변은 뻘겋게 달아올랐고 눈가에 힘이 전혀 없었다. 죽 같은 말이라. 얘는 참 말도 예쁘게 하네. 내가 이래서 지수를 좋아하나 보다. 지수는 항상 아껴 말한다. 똑 부러지는 성격에, 확고한 자기주장이 있는 친구였지만, 말을 참 아꼈다. 그에 반해 나는 말에 모진 구석이 있었다. 말의 분리수거를 잘하지 못해서 그랬다. 마음을 곪게 하는 말인데 직언이랍시고 배출하는 꼬락서니나, 꼰대 같은 말인데 조언이랍시고 배출하는 꼬락서니를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런 나에게, 죽 같은 말이라니. 미소를 머금고 아니야, 낯 간지럽다 인마. 이래 놓고는 속으로 얼마나 좋아했는지 나 원 참.


지수가 화장실을 다녀온다고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나는 옆에 있는 흡연실로 향했다. 사람들은 재떨이 앞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누구는 전화를 하면서, 누구는 같이 온 사람한테 핏대를 잔뜩 세우고 말을 했다. 저 말들은 아껴 말한 말일까. 지수의 말과는 다르겠지. 담배를 한 번 쪼옥 빨고 코를 한 번 쓱 먹고 내뱉는 걸쭉한 침을 보니 맞는 거 같다. 저 말은 아껴 말한 게 아니다. 나는 소리는 뱉지 않고 연기만 연신 뱉어댔다. 왠지 내 연기만 뿌옇지 않고 하얗게 보였다. 앞으로 입에서 내뱉는 모든 건 아껴 뱉으리라. 침이건, 연기건, 소리건, 무어든 간에.


2차는 방마다 커튼이 쳐져있는 조용한 술집으로 갔다. 아까 그 집은 너무 시끄러워서 대화에 집중을 못했다는 껍데기의 이유와 성한이와 좀 더 진중한 얘기를 나누고자 하는 알맹이의 이유가 있었다. 사적인 공간에 사적인 얘기가 가득해지자 성한이가 고개를 반쯤 틀고 말했다.

형, 저 고백할 거 있어요.

뭔데?

저 사실 아우팅 당했어요. 웃기죠?

어쩌다가?

글쎄요, 전 남친 인가. 잘 모르겠어요. 어제 애들이 물어보더라고. 게이냐고 말이야.

성한이가 울먹거렸다. 이내 울음이 터지고 성한이의 어깨가 들썩거렸다. 그 어깨를, 그 감정을 달래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아껴말하는 애가 함부로 배설된 말에 상처를 받다니. 그 말은 얼마나 탁한 말일까. 아마 아까 흡연실에서 들었던 말보다 더 고약하겠지. 나는 왜 이럴 때 아껴 말할까. 애인이라는 인간이 사랑하는 사람 고충에 아무 말도 못 하는 건 도대체 무슨 염치일까. 누군가는 내 정체에 대해 아껴 말해줬으면 하는 바람인가. 그 누군가의 말은 부디 분리수거가 똑바로 됐으면 하는 바람인가.

죽 같다는 성한이의 말은 어쩌면 내가 내 말을 잘 소화시킨다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쓸데없는 말은 잘도 내뱉으면서 필요한 말은 속으로 삼켜서 소화시킨다는 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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