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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석주 Oct 14. 2019

<메리크리스마스 미스터 모> 리뷰

죽음과 삶의 아이러니에 대하여

흑백 영화의 본질을 딱 잡아 정의 내릴 수는 없지만, 그것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특성에 대해서는 얘기가 가능할 것이다. 극의 암울한 분위기를 고조시키기 위해서, 영화의 우화적 탈바꿈을 위해서, 장르적 오마쥬를 위해서든 말이다. 하지만 영화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의 경우는 이들과는 사뭇 다른 층위로 흑백을 마주한다.


 영화의 전개를 추동하는 것은 하나의 상태, 즉 모금산의 위암 선고이다. 지인들에 대한 모금산의 무심함부터, 아들 모스데반과 그의 여자 친구 예원의 소환, 그리고 영화 촬영까지. 이 모든 것들은 모금산의 위암을 계기로 생성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시한부에 가까운 이 선고로 인해 모든 사건은 생명력을 얻은 것이다. 죽음의 정조가 사건의 태동을 알린 것이다. 그렇기에 극의 전반에 깔려있는 습하고 무거운 기운은 죽음(혹은 죽음에 가까운) 일 테다. 그것을 흑백으로 풀어냄으로써 영화의 분위기가 죽음의 정조에 맞닿아있는 것을 한층 강화한다.


 죽음의 정서가 영화를 지배하고 있다고 한들, 영화는 이에 머물지만은 않는다. <사제 폭탄을 삼킨 남자>가 그러하다. 영화 내에서 새롭게 생성된 이 텍스트는,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와 다른 방식으로 전개된다. <사제 폭탄을 삼킨 남자> 속 모금산은 강냉이를 먹던 중 사제 폭탄을 삼켜버렸고, 이를 터뜨리기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번번이 실패한다. 결국 사제폭탄을 터뜨리긴 하지만 그것은 불발이었고 그렇게 끝을 맺는다. 이 텍스트를 메타포로 이해한다면, 사제폭탄이 위암을 의미한다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렇다면 왜, 그것도 하필이면 사제폭탄이라는 은유를 통해 자신을 코미디스럽게 드러낸 것인가.


 영화가 지닌 죽음의 정조, 그리고 흑백이라는 분위기를 통한 강화는 동시에 어떠한 대비점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극의 초반에서 반복적으로 드러나는 모금산의 일상을 보자. 어쩐지 무료해 보이는 이 일상이, 단순한 반복에서 그치지 않고 숏의 반복적 변주를 통해 다시금 드러난다. 예컨대 자영이 금산의 행동을 따라 한다든지, 치킨집 사장이 금산의 자리에 앉아 초대장을 읽는다든지, 예원이 금산이 누워있던 이발소 의자에서 똑같이 누워있다든지 말이다. 즉, 이미지의 변환을 통해 일상을 끊임없이 제시한다. 이렇게 제시된 일상은 모금산의 부재를 통해 한층 더 돋보이는데, 자영에게 금산의 행방을 묻는다거나, 자영이 치킨집에 찾아가 금산을 찾는다거나, 닫힌 이발소를 통해 금산의 부재를 확인하는 학생을 통해서 말이다. 다시 말해, 인물들(혹은 실존하는 우리)에게 죽음이 선언되기 까지 반복적으로 제시되는 일상을 감독은 관객들에게 끊임없이 주문한다. 죽음을 단순히 삶의 끝이라고 종결짓기보다, 삶과 대비되는 어떠한 지점으로 연결함으로써 삶의 진실성을 드러내려는 것일 테다. 그 진실성은 삶에서 오는 허무성(죽음이 주는 공포)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삶 그 자체에서 오는 일종의 경건함이다. 그렇기에 죽음(혹은 죽음에 가까운)을 앞둔 자신을 코미디스럽게 드러냄으로써 삶의 비극적인 면모보다, 삶의 희극적인 면모를 드러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여기서 찰리 채플린의 격언이 떠오르는 것은 결코 착각이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모금산이 모스데반에게 출생의 비밀을 말하는 것은 단언컨대 의도적이다. 자신의 이름, 더 나아가 존재에 대한 부정은 삶의 의미가 퇴색될 여지가 충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스데반은 모금산의 영화를 완성시키고 상영에 성공한다. 즉, 자신에게 삶을 준 아버지로부터 삶의 의미를 박탈당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스스로 완성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연 것이다. 예원의 “내 행복은 너한테 달린 게 아니야”라는 주체적 선언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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