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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석주 Oct 14. 2019

<얼굴들> 리뷰

세상은 언젠가 영화가 되겠지만 나는 영화가 될 수 없다.

 새삼스러운 말이지만, 우리는 삶의 진리를 파악할 수 없다. 아마 여기서 말하는 삶의 진리란,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이나 내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하는 질문과 맞닿아 있을 것이다. 결국 진리 값을 도출해내지 못한 채, 우리의 시선은 자연스레 예술로 향한다. 그것이 명확한 답을 내려주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그 진리의 편린이나 기미 같은 것을 기가 막히게 포착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얼굴들>의 엔딩 크레딧이 스크린에 등장할 때, 관객들은 사뭇 당황스러워 할 수도 있다. 자신이 지금 무엇을 본 것인지, 정녕 자신이 본 것이 자신이 알던 영화가 맞는지, 혼란스러워할 여지가 충분하기 때문이다. 정통 서사는 사라져 있고, 극적인 연출이나 사건 역시 제시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카메라는 묵묵하게 인물의 얼굴과 무인의 풍경을 비춰가며 파편적 이미지를 제시할 뿐이다. 이강현 감독의 필모그래피가 다큐멘터리에서 시작했다는 점과 전작 <보라> 역시 다큐멘터리라는 장르를 따라간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얼굴들>에서 인물과 풍경을 다루는 방식은 다큐멘터리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카메라가 아무런 의지 없이 단순한 정물로서 숏을 잡아내고 있다고 보기엔 유별난 구석이 하나 있다. 바로 인물이 제시되는 숏의 시작에 항상 얼굴을 포착해낸다는 점이다. 설령 인물이 카메라와의 구도 상 얼굴이 잡히기 힘든 각도에 있어도, 거울이라는 매개체를 이용해 얼굴을 잡아낸다. 심지어 공간을 롱샷으로 잡아낼 때에도 인물의 가운데에 배치해 그 얼굴을 잡아낸다(비록 그 얼굴이 선명하지는 않지만).


 이런 방식으로 성취하고자 한 점은 무엇일까. 극의 초반을 생각해보자. 행정실 직원인 기선과 사진을 찍어주는 사진기사와의 대화에서 사진기사는 “신기한 게 , 동네가 다르면 애들 골격까지 달라요.”라는 말을 남긴다. 이후 극의 중반부, 기선은 같은 행정실 직원과의 대화에서 “이 큰 건물에서 1년마다 애들 얼굴만 바뀌고.”라는 말을 남긴다. 얼굴들과 개인의 다양성, 그리고 카메라가 주목하는 개인. 그러나 어떤 한계, 즉 커다란 구조 속에 놓인 개인이 가지고 있는 분별적 한계는 명확하다. 개인의 고유성이라고 할 만한 골격은 동네에 따라 달라지고, 학교라는 구조 속에서 각각의 다양한 얼굴들은 끊임없이 교체된다. 서사적 개연성의 소멸과 각기 다른 중력에서 흐르는 듯 하는 시간은 어쩌면 각 인물들의 특이점으로 보일 수 있지만, 종국에 남는 것은 하나의 거대한 시스템이다. 배회하는 듯 보이지만 목적지는 정해져 있고, 주어진 직분에 최선을 다하는 듯 보이지만 의지가 선명하지 않다. 결국 ‘세상은 언젠가 영화가 될 것이다.’라는 경구처럼, 영화는 세상을 열심히 표상하고 있지만 그 안에서의 개인은 무기력할 뿐이다. 마치 필연의 산물처럼 말이다.


 다시 극으로 돌아와 보자. 이 영화에서 풍경의 소리가 완전히 소멸한 장면이 두 개가 존재하는데, 하나는 혜진의 뒤를 쫓는 장면과, 하나는 중앙박물관에 갔을 때의 장면이다. 소리가 소멸한 대신, 전자에는 꽤 몽환적이라 할 수 있는 음악을 틀고, 후자에는 내레이션을 튼다. 각각의 쇼트에서 주목할 점은 각 개인의 움직임이다. 혜진은 자신의 의지로(적어도 혜진 스스로 생각하기에) 회사를 뛰쳐나와 식당 개업을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고, 현수가 훔쳐본 일기장에서의 인물은 배우고 싶다던 색소폰을 연주한다. 이 모든 것은 단순한 관찰에 그치지 않고 영화적 상상(혹은 영화적 문법)에 맞게 다뤄지고 있다. 그들의 행위는 사뭇 자유롭고 낭만적인 것으로 보일 수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언제든 대체될 수 있고, 하나의 단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기선이 전혀 상관없는 진수에게 관심을 가진 것도,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이른 나이에 독립했지만 결국 아버지가 돌아가신 진수도, 잡지 취재를 위해 현수를 만났다가 진수를 만난 기선도, 이 모든 것은 정해져 있던 것이지 않을까. 극적 흐름이나 단일적인 시간 흐름이 아닌, 각각의 이미지를 비인과적인 쇼트로 비춰내고 있다한들 말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살아간다. 고유의 얼굴에 드리워진 운명의 발자취를 군말하지 않고 따라간다. 그것이 우리 내의 삶인 것처럼 말이다. 세계를 열심히 표상하고 있는 <얼굴들>에서 이른바 삶의 모양새를 살피고 있는 것이다. 비록 그것이 옳고 그름이라는 분별로서 작동하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세상은 <얼굴들>처럼 영화로서 드러날 수 있지만, ‘나’라고 하는 개인은 그렇지 않다. 그저 표상하는 세계나 실존하는 세계에서의 부속품에 불과한 듯 보인다. 그러나 <얼굴들>의 인물들이나 실존하는 우리들은 끝끝내 살아간다. 이 불가항력 속에서 내가 해야 할 일, 혹은 주어진 일이 무엇인지 물어가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 적당한 허무주의를 한껏 체화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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