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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길 Nov 13. 2024

하고 싶은 말이 없어서

일기장을 찾습니다

일기 쓰기를 어려운 숙제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일상을 눌러 쓰는 건 시키지 않아도 늘 하는 일이었으니까. 일곱 살 때부터 공책에 일기를 썼다. 어떤 날은 분에 못이겨 쓰고, 어떤 날은 펑펑 울면서 쓰고, 어떤 날은 뭉클한 마음으로, 또 어떤 날은 설레는 마음으로 썼다. 일렁이는 마음을 토할 곳이 필요할 때 나는 종종 펜을 쥐었다. 성인이 되고, 배우로 데뷔를 한 이후에도 일기는 계속 썼다. 주제와 공간을 넓히다 보니 얼레벌레 브런치 작가가 되었고 한권의 책이 나왔다. 당시 가장 부끄럽고 아픈 부분을 소재로 책을 썼는데, 내면의 한 부분을 세상에 낸다는 것이 두려우면서도 또 하나의 성장점이 되었다. 이를 계기로 독자들을 만나고, 나와 비슷한 아픔들도 볼 수 있었으니까.


글을 쓰는 시간 동안 내 마음을 들여다보고, 정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솔직하게 쏟아내고 다듬은 글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이라고 믿기도 했다. 그래서 글을 읽고 쓰는 것은 매력적인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내가 나를 들여다 보는 일, 그런 나를 내보이는 일, 남을 들여다 보는 일, 그렇게 서로를 이해하는 일. 글은 이러한 것들을 가능하게 하니까.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글쓰기가 어려워졌다. 소재가 없으면 없는대로, 쓰기가 귀찮으면 귀찮은대로 쓰던 글이었는데 키보드 앞에서 손이 굳었다. 스스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성을 내고, 슬퍼하고, 뭉클하고, 설렜던, 가두기엔 답답해 기어코 써야 했던 마음들이 어느 날부터인가 보이지 않았다.


마음이 사그라들었구나.


어느 순간 나는 쓰기를 멈췄다. 입금이 되는 때를 제외하고는 최소한의 글만 썼다. 요즘은 왜 글을 쓰지 않냐는 질문을 들을 때면,


글쎄.

하고 싶은 말이 없어.


브런치와 블로그는 방치되고, 일기는 일지가 되어갔다. ‘아침에 눈을 떴다. 점심으로 무얼 먹었고, 오후엔 무얼 하니 시간이 금방 갔다…….’

되돌아본 일기(혹은 일지)에서 나의 감정은 좀처럼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감정을 섬세하게 다뤄야 할 직업을 가진 사람이 본인의 감정도 제대로 모른다니. 불치병 판정을 받은 기분이었다. 일기장 앞에서 한참을 망설이다 겨우 쓴 말이 ‘무난한 하루’였다. 무난한 하루, 무난한 감정, 무난한 관계. 무난처럼 재미없고 무책임한 평가라니. 이러다가 정말 얼어붙는 건 아닐까.


하고 싶은 말은 관심에서 나오는 듯 하다. 과거, 하고 싶은 말이 많았던 건 세상과 나 자신에 관심이 있기에 가능했다. 애정이 있었기에 분노했고, 애정이 있었기에 실망했고, 애정이 있었기에 희망을 가졌고, 애정이 있었기에 연대했다. 다시 하고 싶은 말을 찾을 수 있을까.


마음을 되찾고 싶다. 일지가 아닌 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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