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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나nina Jul 25. 2020

배탈 나서 잠 못들 때 만난 베네딕트 컴버배치 고흐

예술 문외한이지만 아플 때 보는 작품은 더 와 닿는 기분이에요.

지난 금요일 밤 제가 구독하는 작가님 중 한 분의 '영국 여행 취소'에 관한 글을 읽었습니다. 저도 영국 여행은 못 가지만 베네딕트 컴버배치('셜록'으로 유명한 영국인 배우)가 나오는 영화라도 보고 싶어 졌어요. 아들을 재우고 의 출연작 중 아직 보지 못한 작품을 하나 골랐습니다.


하루의 일과도 끝나고 폭우도 그친 탓에 긴장 풀려서 그런지(상습침수구간이 있는 부산의 한 동네에 살거든요) 오후부터 계속 고개를 내밀던 배의 불편함이 확실히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명치 쪽은 광범위하게 갑갑하고 오른쪽 등허리 전체는 뻐근해서 누워있지도 앉아있지도 못하게 불편하기 시작했어요.


중복이라고 직장상사가 사주셔서 얻어먹은 점심. 새 직장 사람들 틈에서 조금은 불편하게 먹은 삼계탕 한 그릇이 제 몸 어딘가에서 걸려있나 싶었습니다. 전 건강체질인데 아주 가끔 '불편한 감정'과 함께 밥을 먹으면 체하는 경우가 있어요. 어제가 그런 날인가 보다 싶었습니다. 하룻밤 괴롭고 나면 다음날 아침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괜찮아질 테니 하룻밤을 잘 보내보자 생각했어요.


자정부터 시작된 배와 등짝의 불편함 때문에 이 자세 저 자세 바꿔가며 누워도 보고 앉아도 봤습니다. 순환이 좀 되면 나을까 싶어 어깨, 팔, 다리, 발까지 온몸을 손 닿는 대로 주무르기도 하고 두드려 보기도 했어요. 매실차도 한잔하고 냄새만으로도 뭔가 뻥 뚫어주는 것 같은 새카만 정로환도 3알 삼켰습니다.


3시간이 그렇게 흘러도 낮에 먹은 삼계탕은 명치에 정확히 걸려있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새벽 3시부터는 배가 불편하여 구부정하긴 하지만 몸을 일으켜 방 안을 왔다 갔다 하며 걸어봤어요(무슨 호러영화 한 장면 같네요). 눕거나 앉아있는 것보단 훨 나은 기분이 들었답니다. 걷다가 안방 베란다 몰딩에 기대섰다가 그렇게 또 한 시간을 보냈어요.


베란다에 둔 (아들이 문화센터에서 만들어온) 투박한 시계의 초침이 '째깍'하면 다음 '째깍' 전에 베란다 배수관에서 빗물이 '또독'하고 떨어졌어요. '째깍, 또독, 째깍, 또독......'.


실속 없이 시끄럽기만 한 날개 없는 선풍기는 푸른빛을 내며 끓임 없이 '웅웅'거리고 있고 모기퇴치 매트는 빨간 불빛을 내고 있었어요. 일부러 세팅한 것도 아닌데 각자 적당한 거리에서 뭔가 연주하는 것 같아 보이기까지 했답니다.


내 배아픔보다 그런 게 눈에 들어오고 귀에 들리기 시작하는 걸 보니 이제 삼계탕이 명치보다는 아래로 좀 내려가 주셨구나 싶었습니다. 그래도 아직 앉거나 눕기에는 거북해서 아까 만나려다 만 베네딕트 컴버배치를 베란다 나무 몰딩에 기대 서서 휴대폰으로 소환했어요.


BBC 다큐 영화

<편지에 담긴 고흐의 삶 Van Gogh:Painted With Words>


저는 문화예술철학에는 문외한이지만 동경하는 마음이 크고 제 수준에서라도 경험하고 느끼고 싶어 합니다. 특히 제가 어딘가 불편할 때 책이든 영상이든 그림이든 접하면 저의 불편함을 잠시라도 잊게 해 주고 의식의 전환도 경험하게 됩니다.


체한 상태에서 새벽에 안방 베란다 몰딩에 기대서서 본 이번 다큐도 정말 인상적이었습니다. 이 영화는 고흐의 주변인들이 주고받은 편지와 주변인들의 진술을 발췌한 내용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요.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내용이지만 베네딕트 컴버배치의 연기와 내레이션이 수많은 고흐 관련 콘텐츠 속에서도 유의미한 기록으로 남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눈빛과 목소리, 영국식 발음... 참으로 좋았습니다. 이런 말로밖에 표현할 수 없음이 아쉬울 정도로요).

영화를 통해 제가 새로이 알게 되거나, 상기하게 된 부분 몇 가지는 기록해 두고 싶네요.


고흐는 독학으로 그림을 배웠습니다. 찰스 디킨스, 에밀 졸라, 조지 엘리엇 등의 작품을 읽으며 가난한 소외계층의 삶에 주목하고 공감했습니다. 사회와 괴리된 예술이 아닌 예술적 관점으로 현실을 이해했어요. 실제로 광부, 매춘부, 방직공, 농부나 그의 이웃들을 그렸고요. 방직공이 천을 직조하는 과정에서 사용하는 밝은 색의 실에서 고흐 특유 색감의 영감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는 철저히 외로웠고(삶의 동반자 동생 테오는 있었지만) 그토록 화려하고 과감한 색감의 그림들은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슬픔과 철저한 고독의 표현이었습니다.

황금빛 밀밭과 레몬색 태양, 보라와 파랑의 산들과 들판, 그 속에서 최대한 단순화시켜 그린 농부의 모습은 '죽음'을 표현하려 했었다고. 하지만 더 이상 슬픈 죽음은 아니라고.

 '내가 미쳤다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해'라고 말하는 부분은 너무나 슬펐습니다.


렘브란트의 영향을 받고 자신의 초상화도 많이 남긴 고흐는 '한 사람이 다양한 자화상을 남길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했어요. 고독함에 힘들어하며 오직 그림을 그리는 순간만 살아있음을 느꼈던 고흐. 자신은 실패작이고 어쩔 수 없는 그 운명을 받아들이려고 한다며 눈물짓습니다. 그리고 서른일곱에 생을 마감했지요.

저도 서른일곱이라. 고흐의 서른일곱 삶을 들여다보며 저의 서른일곱도 한번 돌아봤습니다.


고흐에겐 자신의 삶을 유일하게 이해해준 동생 테오가 있었습니다. 저도 제 동생이 있어 이혼한다고 집나 왔을 때도 물적 심적 지지도 받고 지금도 매일 제 삶에 대한 지지를 받고 있어요. 고흐처럼 개인적인 성과나 엄청난 슬픔이나 고독은 없었지만 제 그릇만큼의 성과나 제가 감당할 만큼의 슬픔, 외로움, 어려움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배탈 나서 푸르스름한 새벽에 만난 베네딕트 컴버배치의 고흐 덕에 슬프기도 하지만 아름다운 제 서른일곱 자화상을 한번 마주했습니다. 앞으로의 자화상도 어떤 모습이든 제가 그려가기 나름이겠죠. 고흐의 말처럼 한 사람에게도 다양한 자화상이 남을 수 있을 테니까요.


완전한 아침이 밝았고 명치의 갑갑함과 등짝의 뻐근함이 많이 사라졌습니다. 밤사이 아무 일 없었던 것 같아 억울하지만 전 알지요. 지난밤 베네딕트 컴버배치 고흐를 만나며 마주해본 제 자화상이 나쁘지만은 않다는 걸요.


P.S. 이 글에는 제가 구독하는 작가님들께 영향을 받은 부분들이 군데군데 있습니다. 좋은 글들을 통해 저의 배움이  늘어나고 있어 항상 감사합니다. 저도 읽는 시간이 아깝지 않은 글을 쓰는데 가까워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장마철에 다들 무탈하시고, 건강도 유의하시길요. 항상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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