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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나nina Jun 19. 2020

늘 지나던 길에서 네잎클로버를 찾은 것 처럼

중고서점에서 찾은 손글씨 메모

며칠 만에 해가 난 날.

젖은 빨래를 아무렇게나 널어놔도 잘 마를 그런 날. 여섯 살 아들은 그걸 미리 알리가 없었을 텐데, 밤 사이 오래간만에 축축한 지도를 그려주셨다. 안 그래도 이불 빨래를 하려던 참이었지만-

지도도 생겼고, 해도 좋고 이불 빨래를 했다

(아들 녀석이 지도 그린 건 비밀로 해달랬는데. 미안).


빨래를 널며 밖을 보니 해도 좋고 뒷산에 나뭇잎들도 신이 났다.


 '나도 나가볼까?'


외출 계획이 없었지만 집에 24시간 같이 있는 남편 아점도 해결이 됐고.

오랜만에 내가 좋아하는 청바지와 남방을 꺼내 입었다. 신발장을 열고 편한 운동화도 꺼내신었다. 가볍게 챙긴다고 챙긴 천가방을 들고 현관으로 걸어가다 다시 방으로 와 책도  한 권을 들고 나왔다.


걷어올린 소매 아래로 기분 좋은 바람이 계속 스친다. 얼마 전에 짧아져 어중간해진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려 내 얼굴을 적당히 간지럽힌다. 잠시 내가 소녀라도 된 거 같단 생각하며 혼자 큭큭거리며 걷는다. 심지어 노래도 흥얼흥얼.


'시, 나오길 잘했어'


버스정류장에 도착해 가방 속을 책을 꺼냈다. 넘기다 보니 한 페이지에 손글씨 메모가 붙어있다.

'.... 뭐지?'

중고서점에서 산 책에 메모지가 붙어있다. '봄 이후엔 뜨거울 차례니까'라고.

이 책은 중고서점(알라딘)에서 산 책이다.

 

저 메모는 누가 적어 붙인 걸까?

메모를 읽어보니... 책 속 글귀를 그대로 옮긴 것이 아니다. 책 속 문장과 관련하여 자신의 메시지를 적은  것 같다. 혼자 보려고 붙인 건... 아닌 것 같다. 메모지 앞면을 가득 채운 한 글자 한 글자가 정성스럽다. 뭔가 할 말이 남아 뒷머리라도 긁적거리는 듯한 알 수 없는 얼굴이 상상이 된다. 살짝 뒤로 넘겨 보니 역시, 딱 한 줄 적혀있다. '이 얘기를 누군가에게 하고 싶었던 걸까?'


'다른 페이지에도 메모가 있나?'


'또 있네!'


두 개의 메모.

적당한 크기의 깨끗하고 하얀 포스트잇, 그 하얀 포스트잇에 어울리는 사각거림과 번짐을 가진 연필. 그리고 그 포스트잇 위에 연필로 적어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은 마음. 그 마음이 고르고 고른 포스트잇 위에 몇 줄로 어떤 크기로 적히면 적당할지 고민을 해 '정말 하고 싶은 말 딱 한 줄'은 뒷면으로 살짝 보내 '까꿍'하게 만들어 놓은 메모. 어쩌면 저 '한 줄 까꿍'을 제법 괜찮게 완성하려 여러 장 구겼을 것 같기도 한 메모.


그런데 그 메모를 품은 책을 내가 중고서점에서 샀다. 이 메모를 적은 이가 누군지 전혀 모르는 내가. 메모의 주인도 그 사실을 알런지. 중고서점에 책을 팔면 서점에서도 책상태를 확인하고 정비가 필요하면 정비를 하여 파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 와중에 살아남은 메모?


아니면 내가 지금 햇살도 좋고 바람도 좋고 때 아니게 소녀 기분이 막 나서 마음대로 상상한 것 일지도 모르겠다. 사실은 아무런 메모도 붙어 있지 않은 책이었는데 누군가 서점 안에서 책을 읽다가, 가방에 마침 있는 포스트잇과 연필로 그냥 생각나는대로 써서 붙여놓은 것일 수도 있다.


누군가의 마음이 담긴 메모든, 그냥 우연히 붙어 있게 된 메모든 상관은 없다. 오늘 같이 햇살도 좋고, 바람도 좋고, 일 년에 한 번 정도 있을까 말까 한 소녀 기분도 드는 그런 날. 이런 메모를 우연히 보게 되어 좋다. 보물찾기 보물 숨겨놓듯 책 속에 숨겨둔 '봄 이후엔 뜨거울 차례이니 가는 봄을 아쉬워 마라', '꽃은 영원하지 않아 아름답다' 같은 메모를늘 지나던 길을 아무생각없이 지나다 네잎클로버를 찾은 것 처럼, 내 마음을 말랑말랑하게 해주는 작은 선물이라도 받은 것 같다. 


삶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순간들이 많고, 생각지도 못한 일들은 왜 그리 잘 일어 나는지. 그런 순간들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내 마음에 달렸다. 예상치 못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 두렵기도 하지만, 내 마음대로 안되는것이 999만가지인 삶에서, 가끔은 이런 작은 선물을 만날지도 모른다는 상상력을 아주 조금은 남겨 놓으며 살아가는 건 어떨까. 소원을 들어주는 알라딘의 램프나 도깨비 방망이 같은 걸 바라는 건 아니니까.


있는 곳에서 잠시 멈춰 한숨 돌리기도 하고 주위를 둘러볼 수 있는 작은 여유 정도만. 우연이 주는 선물을 언젠가 다시 마주한다면, 언제라도 잠시 발걸음을 늦추고 즐길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중고서점에서 산 책 속에 정성스런 메모를 찾고 즐거워했듯, 아직 내가 알지 못하는 네잎클로버는 어딘가에 또 있을지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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