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니나nina Sep 11. 2020

나의 꽃은 언제 피었을까?

아무도 궁금해 하지 않아도 그래도 쓰기

책을 읽다 기억해 두고 싶은 표현이 나오면 펜을 듭니다. 한 문장 한 문장. 종이의 저항감을 기분 좋게 느끼며 옮겨 써요. 손글씨로 부풀어 오른 노트가 쌓여갑니다.


업무상 글이든 나의 이야기이든, 어떤 형태의 글이라도 잘 써지지 않을 때있어요. 대개 능력 이상의 결과물을 기대하는 마음, 타인과 비교 때문 것 같습니다.


그럴 땐 손글씨로 채운 노트를 꺼내 읽어요. 크기도 모양도 제각각으로 낡은 노트 위에 옹기종기 모아둔 글귀들. 스르륵 훑으면 답답하고 조급한 마음이 누그러집니다. 손글씨라서 온기도 느껴지고요. 온전히 스스로에게 집중할 힘이 생기는 기분도 듭니다.

 

요 며칠 글이 써지지 않는다며 엄살을 부리고 있어요. 출근길, 손글씨로 울룩불룩 배부른 그 노트를 챙깁니다.

"백지의 도전"
 - 미국의 수필가 J.B.프리스틀리


"애당초 글을 쓰지 않고 살 수 있으면 좋겠지만 꼭 써야 한다면 무조건 써라. 재미없고, 골치 아프고, 아무도 읽어주지 않아도 그냥 써라. 전혀 희망은 보이지 않고, 남들은 다 온다는 그 '영감'이라는 것이 오지 않아도 그래도 써라. 기분이 좋든 나쁘든 책상에 가서 그 얼음같이 냉혹한 백지의 도전을 받아들여라"

《문학의 숲을 거닐다》, 장영희, 샘터, 2005, p.305

오늘 들고 나온 노트 첫 페이지에 있는 글귀. 15년 전쯤 《문학의 숲을 거닐다》에서 옮겨놓았네요.


기한이 있는 업무상 글쓰기 앞에서 이 글귀가 항상 떠올랐었어요. 먹고살기 위한 글을 써야 할땐 달리 방도가 없지요. 백지의 도전을 받아들이고 무조건 써야합니다. 지금은 마감 없는 글쓰기를 하고 있어 그런지, 글이 써지지 않는다며 엄살을 부리고 있어요.


능력이 따라주지 않아 아쉽고 힘들지만 나만의 One&Only 결과물을 만들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글쓰기에도 곧잘 어려움을 느껴. 


학창 시절 베끼지 않고 꾸역꾸역 만들었던 발표 과제물들, 사회생활하는 동안 밤새며 휘갈긴 계획서와 보고서들, 손발이 오그라들지만 나만의 이야기로 채운 자소설들, 마음을 전하고자 쓴 편지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자기 복제든 다른 사람 글 인용이든. ctrl+c, ctrl+v가 전혀 없진 않았을 거예요. 그래도 나에게 주어진 백지는 가능한 한 나의 생각과 표현으로 채우려 애씁니다.

(글 쓰시는 분들 대부분 그러시겠지요)

 나만의 이야기를 찾아내고 싶어.
  바늘로 콕 찔러 들어 올릴 수 있을 만큼 구체적인
  나만의 무언가가 나에게도 있을 수 있잖아?


뭔가 대단한 결과물을 만드려고 One&Only를 지향하는 것은 아니에요. 아무리 노력해도 원하는 결과물을 만들지 못할 때가 대부분입니다. 단지 '나만의 고유한 무엇'을 찾는 과정 자체를 좋아하는 모양이에요. 평범한 사람이지만 나만의 스페셜한 무엇인가는 있으면 좋겠고, 그건 스스로 찾을 수밖에 없으니까요.


 지금 긴 겨울을 보내고 있더라도
  누구에게나 꽃 피던 계절도 있었겠지.

  지금 어떤 계절을 살고 있더라도
  다시 돌아 올 새로운 봄을 희망하며
  또 다른 꽃 못 피우리란 법도 없겠지.

 

공개된 공간에 개인적인 이야기를 쓰는 경험을 4개월째 하고 있어요. 쓰는 이에게는 의미 있는 이야기이지만 느끼는 것은 읽는 이의 몫입니다.


내 안에만 있던 생각을 글로 꺼내 놓는 일. 부끄럽고 어려운 만큼 효과도 있었습니다. 지난 시간에 대한 감정 정리 시간, 현재에 집중할 수 있는 힘, 앞으로 준비에 대한 동력원을 얻고 있어요.


지난 3개월 남짓 기간 동안 쓴  대부분은, 사람의 삶을 사계절에 비유한다면 겨울나기 같은 이야기였습니다.  누구의 삶에나 봄, 여름, 가을, 겨울은 다 온다고 생각해요. 겨울같은 시기가 있었전엔 봄, 여름, 가을도 있었을 겁니다. 지금이 길고 긴 겨울이라도 새로운 봄이 다시 올 것이라는 희망도 해봐요. 


앞으로의 글에는 '삶의 아름다웠던 계절들'도 담아보고 싶습니다. 의 꽃피던 봄, 푸르렀던 여름, 열매를 수확한 가을은 언제였을까. 오긴 왔었는지, 아직 안 왔는지. 시린 계절을 지날때는 따뜻했던 계절을 떠올려 보는 것이 도움이 되기도 하니까요.


잘 해보지 않던 생각이라 아직 떠오르는 것은 많이 없어요. 써보겠다고 해놓으면 어떻게든 쓰려고 노력할테고, 쓰다보면 '풍요로운 사계절 같은 삶'에 닮아 갈 것 같아 기대되기도 됩니다. 그래서 예고편 같기만 한 이번 글을 이렇게 또 길게 썼어요.


요 며칠 마주했던 '백지의 도전'. 백지를 마주하면 두렵지만 도망가기 힘든 설렘도 느낍니다. 다음 백지 앞에서도 또 허걱거리며 무슨 글이든 쓰겠지요. '아무도 궁금해 하지 않고, 아무도 읽어주지 않더라도 쓰자' 하면서요.


글이 써지지 않는다는 엄살을 부리는 동안 글감 아이디어를 주신 작가님 정말 감사드려요!

글을 쓰시는 마음을 전해주신 작가님, 안부를 물어주신 작가님들, 그리고 제 글을 접하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인사드립니다.


저에게도 돌고 도는 사계절이 있듯, 제 글과 연이 닿은 모든 분들이 지금 어떤 계절을 살고 계시든 평안하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바닥을 보이고 바닥을 디디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