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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나nina Sep 21. 2020

지금 그대로 풀샷도 괜찮아

마음주머니 속에 갑북갑북 들어 있는 나만의 열매 들여다보기

   am 8:00

   "엄마 마스크 여기~ 신발도 꺼내놨어요."

   "엄마 챙겨줘서 고마워."

   "내 마음주머니가 커서 그렇죠."

   "그래~준이 큰 마음주머니엔 멋진 마음이 많지."

 

보통의 아침, 여섯 살 아들과 저의 대화입니다. 어린이집 가기 싫다며 눈물바람 할 때도 있지만, 대부분의 날은 다정하게 하루를 시작해요. 아들은 자기 마음주머니가 크다며 뿌듯해합니다.


   "엄마가 많이 사랑해~ 저녁에 만나."


아이가 등원하면 저는 어린이집 길 건너 일터로 출근합니다.


눈에 잘띄는 밝은색 조끼를 입고 동네 환경정비를 하시는 어르신들. 동네마다 계시죠?


요즘 제가 하는 일이 그렇게 멋진 분들 함께 하는 일이랍니다. 동(洞)이름이 등에 커다랗게 힌 샛노란 조끼를 입고 동네를 깨끗하게 정비해요. 


최근 연이은 태풍 후 할 일이 더 많아졌어요. 인도에 산산조각나 널브러진 통유리문들, 도로 위에 깔린 유리조각들, 강풍에 꺾인 굵은 나뭇가지들. 열심히 쓸어 담고 깨끗하게 정리합니다.(아직 정리 중이에요!)


하루는 주택과 빌라가 밀집한 지역에서 잠시 쉬던 중이었어요. 주택가 돌담사이에 작은 꽃들이 피어 있는 거예요. 제 눈에는  작은 녀석들이 그렇게 잘 띄네요. 

출처 Markus Spiske on unsplash

     여기 작은 꽃이 폈네. 

     오다가다 쌓인 흙먼지에 이렇게 뿌리도 내리고, 

     씩씩하게 꽃도 피우고.

     싹 틔우고 꽃 피운다고 애썼어.

     너도 이쁜 꽃이네.

 

''이라 하면 떠오르는 가 있는데요. 부활노래로도 만들어진 이해인 수녀님의 '친구야 너는 아니'에요.

친구야 너는 아니? / 꽃이 필 때 / 꽃이 질 때 / 사실은 / 참 아픈 거래 // 나무가 꽃을 피우고 / 열매를 달아줄 때도 / 사실은 참 아픈 거래 …(중략)…/ 우리 눈에 / 다 보이진 않지만 / 우리 귀에 / 다 들리진 않지만 / 이 세상엔 아픈 것들이 참 많다고 // 아름답기 위해서는 눈물이 필요하다고 /…(중략)… // 친구야 / 봄비처럼 고요하게 / 아파도 웃으면서 / 너에게 가고 싶은 내 마음 / 너는 아니? / 향기 속에 숨긴 나의 눈물이 / 한 송이 꽃이 되는 것 / 너는 아니?    

  - 이해인 시 <친구야 너는 아니> 부분


이름모를 작은 꽃들도 나름대로 애쓰며 꽃 피웠겠다 생각하며 벗어 둔 목장갑을 꼈습니다.  꽃, 어쩐지  닮았다 하며 발걸음을 옮기다 한번 더 돌아봤어요.


지금은 현재의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작은 꽃이라도 피울 수 있으면 행복이라 생각하려합니다. 작더라도 주어진 역할에 감사하며 매일을 살고자 해요.

하루 중 가장 행복한 때는 아들 손잡고 걸어서 어린이집 가는 시간입니다. 길에 핀 꽃을 보면 사진도 찍고요.


비 내리는 날엔 토토로처럼 나뭇잎에 맺힌 빗물이 우산위로 후두두 떨어지는 걸 얼마나 좋아하는지 몰라요.


우산을 처음 써 본 토토로. 나뭇잎에 맺힌 빗방울이 우산위로 후두두 떨어지자 온몸으로 즐거워 한다.

지금 일터는 아이 어린이집과 가깝다는 점 하나 만으로도 감사해요. 어르신들을 대하는 것이 좋기도 하고요.


참여하시는 분들 대부분 청소 일은 처음이십니다. '환경정비' 직무에 지원하셔서 오셨고, 일에 상응하는 급여도 받으시죠. 그래도 더운 날씨에 보슬비 정도는 맞아가며. 몇 시간씩 상의가 흠뻑 도록 청소하는 일. 항상 기껍지 만은 않으실 텐데 불편한 내색 없이 성실히 임하십니다(오전 11시, 1만 보는 거뜬히 찍지요).


항상 표정도 밝으시고, 허허허헛 하고 많이 웃으셔요. 30분 일찍 출근하는 저보다 일찍 오시는 멤버도 몇 분 계시죠. 흰머리 희끗하신 분도, 백발이신 분도, 새카맣게 염색하고 오시는 분도 다 멋지시고요. 일을 할 땐 예외 없이 노란 조끼를 입지만, 출퇴근하실 땐 선글라스 끼고 멋지게 오십니다.


매일 함께 하고 있는 이 분들께 '지금 나에게 주어진 것에 감사하고 성실하게 삶을 대하는 태도'를 배우고 있어요.


이전 10여 년은 직업상담 관련 일을 했어요. 대학 졸업 즈음 하게 된 지자체 소관 비영리기관 인턴의 인연으로 인력개발기관에서 근무했죠.


함께 일하는 직원도, 내방객(고객)도 대부분 4~60대 셨어요. 이십 대 중반이었던 저는 숫자 나이가 적다는 것을 콤플렉스로 느끼게 되었습니다.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부으며 능력을 갖추려고 애썼다 싶어요. 같이 일하고 싶은 사람, 신뢰가 가는 사람이 되고 싶었거든요.(일하는 분들 다 그러시듯요)


만나지는 기회 앞에 (무식해서 용감한건지) 도전하는 편이었어요. '지역 공동체에 도움이 되는 기관'이 되고자 했던 신생기관이라 맨땅에 헤딩하듯이 부딪히며 일했어요.


여러 상사와 동료도 있었습니다. 나이, 경력, 학력 모든 면에서 큰 산 처럼 여겨지는 분들이 많으셨는데, 닮고 싶은 아우라를 가신 분도 계셨지만 그렇지 않은 분도 계셨습니다. 다만 함께 '신뢰를 나눈 경험'이 있다면 그것으로 그분들을 기억하기도 해요.


"니나 씨랑 같이 일을 하고 있으니까 안심이 돼요. 가 어떻게 될진 알 수 없지만, 큰 탈 없이 마무리될 것 같은 예감이 드네요. 이상하게 그냥 안심이 돼요."


어떤 상황에서 어떤 표정으로 나눈 이야기인지 사진처럼 기억이 납니다. (임금인상이나 승진보다) 그토록 원했던, 함께 일하는 사람들로부터 신뢰받는 느낌이었으니까요.


이 기억은 저에게 살아가는 데 '신뢰의 경험'으로 남았습니다.



아무리 '어린 사람' 이미지가 싫어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 부은들 하루아침에 연륜이라는 것이 쌓이지는 않는다는 것을 배울 수 있었어요. 국화가 봄이 좋아 봄에 꽃 피우고 싶어하더라도 가을이 되어야 필 수 있는 것처럼요.


매일 할 일을 해내고 주어진 기회 앞에 도전하고 깨지고 버티다 보면, 꽃도 피우고  열매도 맺을 만한 계절을 맞는다고 합니다.


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
그 시절이 다시 돌아오지 않은들 어떠리
우리는 슬퍼하지 않고
오히려 남아 있는 것에서 힘을 찾으리…….
- '초원의 빛' 중, 윌리엄 워즈워스


'살아 있다, 인정받는다, 신뢰를 나눈다' 느꼈던 시간들입니다. 그 시간에 비하면 지금의 제 삶이 어딘가 짠해 보이는 구석이 있긴 합니다. 하지만 노란 조끼를 입고 멋진 어르신들과 마을을 아름답게 돌보는 일을 하지금의 제 풀샷이 부끄럽지 않습니다. 


'지난 날들'이 '지금의 나'에게 '남겨준 열매'인 '신뢰의 경험'이 있고, 어떤 상황을 마주하더라도 쉬이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매일 아침 산책하듯 아이와 하루를 열 수 있어 행복하고, 현재 주어진 것에 만족하고 성실하게 삶을 대하시는 어른들과 함께 하는 것이 감사합니다.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음에 대한 힘든 마음은 분명 있습니다. '지금의 삶'에 남아 있는 가치가 없는 것 같은 생각이 밀물처럼 밀려와 목구멍까지 차오를 때도 있고요. 하지만 그때마다 '지금 나에게 남아 있는 것'을 섬세히 들여다보고 찾다 보면 '그래도 남아 있는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누구나 열심히 살아온 만큼, '지난 날들'이 '지금의 나'에게 '남겨준 열매'는 있다고 생각해요. 어떤 열매인지는 각자 다르겠지만요.


내 마음주머니 속에 '갑북갑북' 들어 있을 열매들을 꺼내보며 지금을 살아갈 힘을 내보면 어떨까 합니다.

 

넣을 것이 없어
걱정이던
호주머니는

겨울만 되면
주먹 두 개 갑북갑북

- 윤동주 시 <갑북갑북>

* '갑북갑북'은 '가득가득'이라는 함경도 지방 사투리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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