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대표 선수들의 주치의, 어깨박사 이상훈의 아시안게임 리얼스토리
드디어 아시안 게임이 시작되었다.
오늘은 대회 1일째 !!
첫 날은 이미 펜싱 경기장으로 팀닥터 지원 가는 것으로 결정나 있었기 때문에, 다른 종목을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새벽 임원 회의를 마치고, 여러 종목 지도자들에게 협조를 요청해서, 오전에 최대한 많은 환자를 진료실로 보내달라고 부탁하였다. 오후에 펜싱경기장에 팀닥터로 들억야 했기 때문에, 가능한 오전에 모든 환자들을 치료해두고 싶었기 때문이다.
점심시간이 지난 직후 바로 펜싱 경기장으로 떠났다.
한국은 펜싱 강국이다. 많은 사람들이 리우 올림픽에서 박상영 선수의 금메달과 '할 수 있다'의 스토리만을 기억하고 계시지만, 한국에서는 오히려 박상영 선수보다 세계 랭킹 높은 선수들이 대부분인 세계적인 강팀이다.
물론 전통적인 펜싱 강국이 아니다. 최근 10년 동안 엄청난 노력과 기술 개발을 통해서, 대한민국의 펜싱은 비약적인 발전을 하였고, 이제는 세계 정상을 언제든 노릴 수 있는 위치까지 발전한 상태이다.
펜싱은 조금만 경기에 대해서 이해하고 보기 시작하면 그 경기와 박진감 때문에 어느 종목보다 더 재밌는 종목이다. 워낙 빠르고 기술이 다양하기 때문에, 그 재미는 이루 말하기 힘들 정도이다.
펜싱에는 3 종목이 있는데, 아래 그림처럼 공격할 수 있는 부위에 따라서 플레뢰, 에페, 사브르 종목이 있다.
여기에 남여 개인전, 남녀 단체전이 있기 때문에 총 12 개의 금메달이 걸려있다.
간단하게 3종목을 설명해보면 공격 포인트를 얻을 수 있는 부위에 따라서 3종목이 나뉘게 된다.
몸통만 찌를 수 있는 종목이 플레뢰 (남현희 선수로 유명하다.) , 전신 공격이 다 가능한 에페 (박상영 선수!), 상체만 공격할 수 있는 사브르 (한국이 가장 잘하는 종목)로 나뉘다.
(물론 공격권이라는 복잡한 부분이 있지만, 이는 나중에 따로 공부하시면 되겠다)
첫 날은 여자 사브르와 남자 에페 개인전이 열리는 날이었다.
출전하는 선수들이 대부분이 부상에 시달렸지만, 그 중에서도 여자 사브르의 윤지수 선수는 무릎 반월상 연골판 파열로 시합을 이틀 남기고 주저 앉아서, 휠체어를 타고 의무실에 등장했었다.
아예 경기 출전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기적적으로 무릎 잠김이 풀리면서 원활한 움직임이 가능해졌고, 극적으로 경기장에 오를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정상 컨디션일 리 없다. 마음 속으로는 계속 불안한 마음 뿐이었기 때문에,
나는 다른 선수들 보다 우선 윤지수 선수의 경기를 따라다니며 코트 뒤에 서 있었다.
윤지수 선수가 정신적으로도 완전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당연히 예상되는 일이었다. 불과 이틀 전까지 무릎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던 상태였는데, 불안감 없이 완벽한 경기력을 보여줄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윤지수 선수는 8강까지 오르며 멋진 경기들을 선보였다.
비록 본인의 기대에는 못미쳤지만, 내심 윤지수 선수의 선전에 박수를 보냈다.
윤지수 선수는 나이도 어리고 차후 한국의 펜싱을 이끌어갈 인재인 만큼 앞으로도 큰 기대를 해도 좋을 선수이다.
김지연 선수는, 많은 펜싱 관계자들이 금메달을 딸 것으로 기대했던 선수이다.
당연히 이는 큰 부담감이었으리라. 그러나, 부담감조차도 이겨낼 수 있는 김지연 선수이지만,
경기라는 것이 항상 이길 수만은 없는 것이다.
비록 금메달을 놓쳤지만, 소중한 동메달을 대한민국에 안겨주었다.
한국 남자의 간판이자 아시아의 왕자라 불리우는 정진선 선수는, 펜싱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최고'라는 칭호를 부여하는 선수이다.
항상 일정한 경기력을 선보이고 기복이 적기 때문에, 아시아 최강자임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아시안게임일 지도 모른다는 절박함, 주위의 지나친 기대감 등이 합쳐져서 너무 큰 압박에 시달리면서, 본인의 실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메달을 획득하였다.
그러면서 결국 결승전에는 박상영 선수 혼자만 올라가게 되었다.
박상영 선수와 직접 대화해 보면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답지 않게 정말 착하고 겸손한 선수이다.
그리고 잘생기기까지 했다. 정말 순수 청년이라고나 할까.
박상영 선수가 시합 전부터 계속 무릎 통증을 호소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이 부분을 집중적으로 치료하면서 피스트에 올려보냈다.
그런데, 경기 중반이 지나면서 박상영 선수가 갑자기 다리를 절룩이기 시작했다.
과거 수술했던 다리인데, 통증이 급격하게 올라오면서 근육 경련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아예 걸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바로 경기장 안으로 뛰어 들어가고 싶었으나, 현지 의료진에 의해 제지당했다.
펜싱에서는 팀닥터가 마음대로 경기장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이는 어쩔 수 없는 펜싱 경기의 룰인데, 원칙적으로는 그 나라의 팀닥터는 경기장 안으로 들어올 수 없다. 그러나 심판이나 현지 의료진의 요청이 있는 경우는 들어갈 수 있다.
미안한 이야기이지만, 처음에 등장한 현지 의료진 (인도네시아 공식 의료진)은 오히려 상태를 악화시키는 치료만을 할 뿐이었다. 얼음을 올려놓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보였다.
저런 방법으로는 절대 정상 움직임을 회복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초조한 마음으로 나를 불러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리면서도, 너무 답답해서 영어로 지시를 내리며 화를 냈다.
아무래도 이런 내 모습에 압력을 받았는지, 심판이 나에게 경기장 안으로 들어올 것을 허락해주었다.
천만 다행이었다! 바로 뛰어 올라가서 정확한 원인 부위를 찾아내는 것부터 시작하였다.
충분히 시간 내에 해결할 수 있다고 판단되었다.
다행히 주어진 시간내에 통증과 경련을 완전히 해소시킬 수 있었다.
박상영 선수는 피스트(경기장)으로 돌아가서 경기를 속행할 수 있었다.
다시 경기를 재개한 박상영 선수는 훌륭한 기량을 보여줬다.
그런데, 돌연 반대 편 무릎에 또 독같은 경련이 발생하면서 주저앉고 말았다.
"이번엔 어느 부위지? 무슨 문제가 발생한거지? "머리속으로 치료 플랜을 짜고 있는데...
현지 의료진은 나의 진입을 허용하지 않았다!!!
이게 무슨 경우란 말이야!!! 아무리 그래도 스포츠 닥터라면.. 내 이름을 모를리도 없고,
좀더 강하게 말하면.. 내가 쓴 논문과 내가 발표한 이론과 치료법들을 공부해서 스포츠 닥터가 되었을 터인데,
어떻게 나한테 이럴수가 있단 말인가!!!
그렇게 박상영 선수는 제대로 치료조차 받지 못한채 경기를 진행해야 했다.
당연히 통증이 가라앉지 않은 채로, 힘들게 경기를 운영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상태로 끝까지 경기를 해서 3점차로 지고 말았다.
물론 내가 치료했다고 해서 결과가 100% 바뀌었으리라고 확신할 수는 없다.
그러나, 두 번 째 경련 시 내가 경기장 안으로 들어갈 수만 있었다면..... 혹시 금메달을 딸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끝까지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시합이 끝나고 현지 의사를 찾아가서 강력하게 항의를 진행했다.
그 의사도 나에게 미안함을 전해주었다. 더군다나자신의 동료들을 통해서 내가 인도네시아에 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말하는데... 내 입장에서는 이 말이 더 화가 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미안하다는 사람에게 더이상 화낼 수도 없고.. 이미 모든 상황이 종결된 때였던 만큼.. 좋게 말하면서 헤어졌다.
그래도.. 너무 아쉬운 경기였다...
선수촌으로 복귀하니 11시였다.
나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선수들이 의무실 앞에 줄지어 앉아 있었다.
한 명 한 명 모두 치료해주니 자정이 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너무 분해서 쉽게 잠이 오지 않는다...
내일부터 다시 마음을 다잡고 선수들의 힘이 되어주어야 겠다고 다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