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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저냥 ㅏ랑 Mar 12. 2024

지하철역 화장실에 대한 두 가지 실화

일하기 싫어서+자꾸 썰 풀어달라고들 해서 딴짓하는 겸 풀어봄

근데 생각보다 쓰는데 오래 걸리네 아우아우


(사진은 본문 내용과 일절 상관이 없습니다)



1. 2월 27일 화요일


나는 작년부터 출판사 쪽프레스와 함께 만화 비평 모임을 쭉 이어오고 있으며, 지난 2월엔 그 일환으로 화요일마다 <쓰게의 뒷모습>이란 제목의 스터디를 진행했다.


5번째 모임을 마친 이 날, 나는 집으로 가기 위해 서강대역으로 내려갔다. 오후 11시 10분 즈음이었다. 승강장으로 내려가려던 찰나 갑자기 소변이 마려워졌고, 급히 역 화장실로 방향을 돌렸다. 급하다고는 해도 속도가 그리 빠르진 않았는데, 왜냐하면 약 한 달 전 불의의 사고로 인해 왼발의 인대가 약간 찢어져 한참 지팡이를 짚고 다녔기 때문이었다. 이 나이에 지팡이라니 참 짜증 나고 서글프지만, 중요한 건 이게 아니다.


하여튼 남자화장실에 들어온 나는 변기칸 안으로 들어갔다. (서서 소변을 보면 바지에 소변이 정말 많이 튄다 그리고 나는 그게 정말 싫다) 그런데 변기에 앉자마자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소리의 출처는 오른쪽 변기칸이었다. 스륵스륵스륵... 쿵... 쿵... 스륵스륵... 옷을 문대는 소리, 몸이 벽에 부딪히는 소리.


처음 소리가 들렸을 때는 그리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실소가 터져 나오는 걸 참아야 했다. 왜냐하면 내 경험상 화장실에서 이런 소리가 들릴 땐 보통 둘 중 하나기 때문이다. 변기칸 안에서 섹스를 하고 있거나, 아니면 취객이 몸을 못 가누고 있거나. 그리고 이 묘하게 요란한 소리는 아무래도 전자의 경우인 것 같았다. 볼일을 마친 나는 속으로 '에휴 여기 화장실 더러운데 뭐하러 여기서 시발...'이라 중얼거리며 변기칸을 나와 세면대로 향했다.


손을 다 닦고 나니 자연스레 호기심 내지는 관음증이 동했다. 지팡이를 탁. 탁. 짚으며 나는 소리의 출처로 다시 향했다. 반 정도는 내 심증을 굳힐 증거를 찾기 위해서였고, 반 정도는 변기칸 안에 있을 누군가(들)을 긴장시키고 싶어서였다. 시간이 시간인지라 이 넓은 화장실에 나와 누군가(들) 밖에 없으니 더욱 당당하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었다. 그 변기칸의 문 틈 사이로 파란 잠바가 희미하게 비쳤다. 뭔가 이상했다. 변기칸을 처음 봤을 땐 뭐가 이상한지 모르고, 그냥 이상하다는 느낌만을 받았다. 하지만 보면 볼수록, 그리고 들리면 들릴수록 이상한 무언가를 서서히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다.


공공화장실 문 아래의 뚫려있는 곳을 보니 발은 고작 한 쌍이었다. 섹스에 열중한 커플은 아닌 것이다. 기묘하게도 이 발은 쉬지 않고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었는데, 마치 탭댄스 연습이라도 하는 것마냥 어지럽게 발을 움직이고 있어서 취객도 아닌 것 같았다. 무엇보다 이상한 건, 비좁은 변기칸에서 그렇게 몸을 움직이고 있는데도 숨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대체 이 파란 잠바의 주인은 어떤 사람이며 저 안에서 대체 무얼 하고 있는 걸까. 스륵스륵스륵... 쿵... 쿵... 스륵스륵... 평범하게 추론하자면, 이상한 자위 취향을 가진 남자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 내 앞에서 펼쳐지는 해괴한 광경은 그런 추론을 아예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었다.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는 광경에 나는 눈을 뗄 수 없었다.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지'라는 생각 말고는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리고 한 30초 정도가 흘렀을까, 갑자기 소리가 멈췄다. 스륵스륵스륵... 스륵. 발도 멈춰섰다. 그 광경에 몰두하고 있던 나는 갑작스런 변화에 절로 긴장했다. 이젠 다른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뭐지? 뭐지? 뭐지?' 이제와 돌아보면 그때라도 서둘러 화장실을 나서야 했지만, 호기심이라는 건 이성을 마비시키는 법이지 않던가? 당황한 나는 오히려 더더욱 그 변기칸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곧 눈치챘다. 사이에 파란 잠바 말고 무언가가 더 있다는 걸. 그리고 바로 깨달았다. 그건 눈이었다. 파란 잠바의 주인이 나를 보고 있었다. 우린 눈이 마주쳤다.


사람은 진짜 공포를 느끼면 소리도 지르지 못한다. 숨 쉬는 법도 잊은 채 그냥 굳어버린다. 오랫동안 잊고 있던 사실을, 그 순간 나는 다시금 절절히 깨달아버렸다. 파란 잠바의 주인은 여전히 아무런 숨소리 없이 나를 문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적막만이 흘렀다. 아까와는 다르게 머릿속엔 쓰나미가 일고 있었다. 이대로 밖에 나갈까? 그러다 쫓아오면 어떡하지? 이 눈싸움을 언제까지 해야하지? 기껏해야 10초 정도의 시간이었겠지만, 1시간보다 길게 느껴지는 공포의 순간이었다. 그때,


스륵스륵스륵... 쿵... 쿵... 스륵스륵... 다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문 아래쪽의 발도 다시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가위가 풀린 것처럼, 나는 그제야 겨우 숨을 쉴 수 있었다. 파란 잠바의 주인은 무슨 생각을 한 걸까. 알 수야 없지만, 그가 나를 신경 쓸 필요 없는 존재로 판단한 것만은 분명했다. 잠깐 숨을 고른 나는 뒤도 안 돌아보고 서둘러 화장실을 나섰다. 변기칸에서 들려오는 소리와, 내 지팡이가 내는 소리가 적막 속에서 메아리로 뒤엉킨 채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 소리에는 견디기 힘든 공포가 있었다.


며칠이 지난 지금도 이해가 안 된다. 대체 파란 잠바의 주인은 어떤 사람이었으며, 그 안에서 무얼 하고 있던 걸까. 이런 말을 하고 싶진 않지만, 사람이긴 했을까. 내게는 지금껏 살면서 경험한 2번째 공포 체험이었다. 하지만 지하철역 화장실과의 악연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2. 2월 28일 수요일


전날의 충격이 가시지도 않은 다음 날의 일이다. 일정을 마친 뒤 지하철을 타고 귀가하던 도중, 역시나 갑자기 소변이 마려워졌다. 어제 겪은 일도 있으니 가능하면 사람들이 오다니는 화장실을 가야겠다 싶었고, 그리하여 디지털미디어시티역 6호선 쪽의 화장실로 우회했다. 오후 10시 반 즈음이었다. 이 화장실은 평범한 지하철역 화장실과는 좀 달라서, 대형 거울이 붙어있는 커다란 세면대 대신 조그마한 세면대 몇 대가 다닥다닥 붙어있고 그 반대편에 소변기가 배치된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화장실에 들어가니 뒤돌아선 한 남자가 보였다. 그는 세면대 앞에 서있었는데, 검은 후디를 입고 어정쩡하게 움찔거리듯 움직이고 있었다. 이 이미지는 물론 어느 정도 일상적인 것이지만, 지금까지 선명하게 기억할 만큼 내게 각인되어 있다. 그건 이다음에 일어날 일 때문이기도 하고, 그 이전에 그가 세면대에다 손을 씻는 대신 소변을 누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떤 몰상식하고 추접스럽고 소름 끼치는 남자들은 소변기도 아니고 저런 세면대에 소변을 누기도 한다. 혹은 -이 표현을 쓰는 걸 용서해 주시길 바란다- 지 자지를 세면대에다 씻기도 한다. 나도 이따위 정보는 알고 싶지 않았다...


하여튼 그 뒤돌아선 남자를 나는 그런 몰상식하고 추접스럽고 소름 끼치는 족속으로 여겨, 속으로 '에휴 씨발 존나 더러운 새끼'라 생각하며 변기칸으로 향했다. 그리고 소변을 다 보고 나왔다. 이때 잠시 내 머릿속이 완전한 백지상태가 됐는데, 왜냐하면 그 남자가 하반신을 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바지도 팬티도 내려서, 아랫배와 자지와 불알이 전부 노출된 상태였다는 거다. 그리고 나는 그것들을 말 그대로 직면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나는 평정을 가장한 채 세면대로 향했다. 머릿속이 백지가 됐어도 손은 꼭 씻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손을 씻고 있으니 이제는 머릿속에 오만가지 생각이 다 스쳐 지나갔다. 처음에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이 상황을 어떻게든 '합리적인' 것으로 납득하려 노력했다. '대체 저 새끼 뭐지? 왜 하반신을 까고 있지? 종종 엉덩이까지 까고 서서 소변을 보는 남자들도 있던데, 쟤도 그런 건가? 그런 거겠지?' 하지만 곧 정신을 차렸다. '저 새끼 야노꾼이다.'


마스크와 후드 모자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그는 대략 20대 초중반 정도로 보였다. 손을 가만두지 못하는 걸로 보아 야외노출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초보 같았으며, 그리고 남자화장실에서 이러는 걸 보아 분명 게이였다. 그런 판단과 함께 계속 손을 씻고 있으니, 그가 내 쪽으로 살짝 몸을 틀었다. 이런 경우는 둘 중 하나다. 나한테 자기 물건을 더 잘 보여주고 싶거나, 혹은 자기가 지금 이 상황을 컨트롤한다는 쾌감을 더욱 잘 느끼고 싶거나. 황당하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하고, 웃기기도 하고 경악스럽기도 했다. 어제는 공포체험이었는데 오늘은 야노체험이라니 이 무슨... 하지만 그 야노꾼은 몰랐을 거다, 내가 바이라는 걸. 내가 당황한 건 야노꾼을 마주쳐서가 아니라 야노꾼과 '예기치 않게' 마주쳐서였다는 걸.


솔직히 말해, 만약 그가 내 취향에 맞는 외모의 야노꾼이었다면 상황은 달랐을 거다. 분명 당장이라도 그를 변기칸 안으로 끌고 들어갔겠지. 그리고 여기다 이 썰을 풀 생각도 하지 않았겠지. 하지만 아쉽게도 그런 일은 없었다. 슬쩍 그를 쳐다보았다. 역시나 내 취향은 아니었다. 손을 다 씻은 나는 화장실 밖이 아니라 세면대 반대편인 소변기 쪽으로 잠시 이동했다. 숨을 고르고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가능하면 변기칸엔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무슨 생각 정리? 돌아보면 스스로도 어처구니없지만, 거기서 이 야노에 어울려줄까 말까 하는 고민을 10초 정도 했다. 그것도 아직 지팡이 짚고 다니는 이 몸으로 말이다. 아무래도 다리를 다친 이후 평소보다 굶주린 게 그런 개헛짓거리를 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역시 옛말에 틀린 게 없다, 숟가락 들 힘만 있어도...


하지만 당신께서도 짐작하듯, 그냥 이대로 나가는 걸로 내 안에서 결론이 났다. 역시 취향 아닌 사람과 어울리고 싶진 않았던 것이다. 나는 천천히 화장실을 나섰다. 야노꾼은 여전히 하반신을 까고 있었고, 처음 봤을 때보다 좀 더 발기가 되어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크지 않았다. 이것도 감점 요소다) 눈을 마주치진 않았으나, 나를 향한 시선은 분명하게 느껴졌다. 이젠 당황스럽거나 황당하기보단, 부담스럽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해서 걸음을 살짝 서둘렀다. 못 어울려줘서 미안.... 그치만 하다못해 배털이라도 좀 왁싱하세요...


화장실 밖으로 나오니 긴장이 확 풀렸다. 그 화장실은 입구 앞에 의자가 배치되어 있는데, 이상한 경험을 하루 건너 바로 또 겪어서 그런지 몸에 힘이 빠져 절로 거기에 앉아버렸다. 하지만 머리만큼은 도파민 분비로 쌩쌩해서(뇌과학적으로 부정확한 발언), 친구들에게 썰을 풀 생각에 들뜨기도 했고 '지하철역 화장실이란 나랑 뭔가 기가 안 맞나'하는 헛생각도 했다. 어느새 긴장이 약간의 흥분으로 전도된 것이다. 그렇게 잠시 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으니 인기척이 들려왔다.


방금 내가 나온 그 남자화장실로 어떤 젊은 남자가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달리 말해, 그 젊은 남자는 야노꾼을 만나러 가고 있었다. 말릴 새도 없이 그는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당장 별다른 소란은 없는 것 같았다. 경박한 웃음이 터져나오는 걸 참으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도 야노꾼은 좋겠다, 먹잇감의 축복이 끊이질 않아서... 라고 생각하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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