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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골아이 Jan 27. 2021

시골아이 이야기 - 머리는 예술영화 가슴은 중국 영화

'인생'같은 영화는 다시 나올 수 있을까

  폭탄 맞은 관리비 명세서의 난방비 항목은 한파보다 차가웠다. 나는 월요일 저녁 거실에서 안주인님과 함께 클래식 FM을 배경음악으로 틀어놓고 대책을 논의하고 있었다. 라디오에서는 'brothers four''Try to remember'가 흘러나왔다.      


  Try to remember the kind of September

  When life was slow and oh, so mellow...     


  어떠한 맥락도 없었다. 마주 앉은 안주인님에게 "오 이거 내가 좋아하는 노래야. 여명이 부른 것보다는 이게 더 좋아. 서기 참 예뻤는데... 유리의 성 첫 장면에 이거 나오잖아. 홍콩영화 이젠 망했지."

     

  뇌를 거치지 않은 앞뒤 없는 단어들이 입에서 밖으로 쏟아졌다. 안주인님은 또 이상한 소리 한다는 눈빛을 조용하지만 묵직하게 나에게 보냈다.


홍콩 반환을 앞둔 1999년 12월 31일 홍콩. 신년을 축복하며 검은 하늘에 둥글게 퍼지는 불꽃놀이와 폭죽들. 하지만 이후 벌어지는 안타까운 자동차사고. 여명과 서기의 비극적인 마지막을 시작으로 시작되는 멜로 영화 '유리의 성'. '연예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 다음으로 꼽는 멜로 카테고리의 내 인생영화다.


  난방비를 걱정하다가 난데없이 영화 생각이라니. 추억을 소환하는 'Try to remember' 노래 멜로디가 무조건 반사로 앞선 생각을 지운 덕분에 난방비 걱정은 사라지고 마음이 따뜻해졌다.      





  학창 시절 장래희망을 적는 란은 늘 '영화감독'이었다. 집안에 관련 종사자도 없고 주변 환경이 그렇게 이끈 것도 아니었다. 평범한 가족사항에 평균보다 조금 못한 경제력을 가진 가정에서 나고 살았다. 그냥 영화감독이 되고 싶었 무조건적인 장래희망이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한 얼마간의 노력. 청계천 헌책방에서 영화 관련 책과 잡지들을 사 보고 모았고 비디오 대여점을 친구 집처럼 출입했다. 어느 날에는 하루에 십여 편의 비디오를 빌려 보았다. 나름 괜찮은 영화만 저렴한 가격에 동시 상영해 주던 화양리 동부극장에서 영화를 직관했다. 삐걱거리는 좌석은 세월이 느껴졌지만 스크린이 커서 63빌딩 아이맥스 영화관이 부럽지 않았다. 평범한 고등학생이 할 수 있는 미래를 위한 투자이면서 나름 고급의 문화생활이었던 셈이다.     


  학교에서는 영화평론가나 영화감독을 꿈꾸는 친구들과 자연스럽게 친해졌다. 우리들이 주로 봤던 봐야 했던 영화는 유럽 예술영화, 미국 독립영화, 제3세계 예술영화 같은 것들이었다. 그런 걸 좀 봐주고 학교에 가서 떠들어야 '아 영화 좀 보는 놈이구나' '저걸 어떻게 구했지?' 하며 서로 우월감과 열등감을 교차 표출할 수 있었다. 우리에게 할리우드, 홍콩 영화는 마이너리티 했다. '고무인간의 최후'를(훗날 이 감독은 반지의 제왕을 만든다) 어렵게 구해보고 학교에 간 날 교실문을 들어서는 어깨의 높이는 최고조로 올라갔다.        

       

  그 시절 학우 중에 지금 영화감독이 되거나 영화계에 종사하는 친구들은 없다. 다들 전혀 관련 없는 일을 밥벌이로 삼고 있다. 카메라와 글로 먹고살고 노는 내가 제일 본래의 꿈과 가까우니 나름 성공했다고 해야 하나.     




  문득 생각해 봤다. 그때 꿈을 좇아 봤던 영화들은 내 두뇌 메모리의 영화 카테고리에서 얼마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을까. 안타깝게도 딱 이거야 하고 떠오르는 영화가 없다. 기억의 기억을 더듬어야 하나씩 나온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 영화감독이 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봤던 영화들 중에 '유리의 성'같은 영화가 한 편 생각나지 않는다.


  웬일인가. 이 글을 쓰면서도 놀란다. 삽입곡을 들으면 자판기처럼 입에서 튀어나오는 제목이나 머릿속에서 극 중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영화가 없다.      


  하루에 영화를 여덟 편을 봤다고 자랑스럽게 친구들에게 이야기하는 으쓱함이나 우리나라에서 구할 수 없는 유럽 어느 나라의 예술영화를 본 후의 자만감은 있었을지 몰라도 그 영화들 마음의 동요를 끌어내 기억의 깊은 곳으로 함께 들어가지는 못했나 보다. 우월감과 자만감이 꿈을 이루어주지 못한 것은 당연지사 일터. 그때의 내 의지와 생각은 어떠하여 솔직하지 못했을까.


  영화감독이 되어보겠다는 어린날 나의 순수한 인생의 목표까지 부정하지는 못하겠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시절 나는 그럴듯함에 취해 멋있는, 있어 보이는, 나에겐 하이엔드의 목표를 설정해 그곳으로 달려가면 나 자신도 그렇게 될 것이라는 비현실적 욕망을 추구하며 내 한 구석 결핍을 달랬었던 것이다.      

         



  '백발마녀전'에서 임청하는 꽃같이 예뻤다. 그냥 꽃과 같았다. 꽃이 마녀가 됐는데도 예뻤다. 어느 연예잡지 뒷면에서 어렵사리 홍콩 주소를 알아내 그 꽃에게 한글로 팬레터를 썼는데 한글로 답장이 왔다. 세상을 다 가진 듯 기뻤고 그 이후로 나에게 최고의 여배우는 임청하다.


  최고의 남자 배우는 우열을 가릴 수 없다. 한 영화에서 늘 겹친다. '영웅본색', '첩혈쌍웅', '종횡사해'의 주윤발, 장국영, 주강. 하지만 '패왕별희' 청데이의 강렬한 기억과 현실의 비극적 죽음의 애달음이 더해지는 장국영에 마음이 조금 더 쓰인다. 장국영 승이다.     


  주성치 영화는 그냥 B급 패러디 영화일 뿐이었다. 그땐 일부러 그렇게 생각했다. 그 영화들을 내 인생영화 리스트에 올리는 것 자체가 영화의 성향처럼 나를 깎아내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생각나는 코미디 영화의 한 장면은 다 그의 영화다. ‘도성’의 자체 슬로모션과 ‘희극지왕’의 콧물 씬, ‘서유기 선리기연’의 말 많은 삼장법사를 생각하면 전철을 타고 가다 문득 어깨를 들썩인다.


  영화 '인생'은 어떤가. 비디오 가게 아저씨가 영화감독이 되고 싶으면 이 영화를 봐야 한다고 추천해 주셨던 중국 영화였다. 반납 날짜를 잊고 며칠을 내 방에 뒹굴던 테이프를 수능 공부하다가 새벽에 졸려서 틀었는데 그대로 숨도 못쉬고 밤새 봐버렸다. 여운이 너무 길었다. 주인공과 함께 흘러가는 중국 현대사도(대약진운동, 문화혁명의 어리석음들) 어이없었지만 도박빚 때문에 나락으로 떨어졌다가 시대의 흐름 속에서 어찌어찌 간신히 살아내는 픽션 같은 주인공들의 험하고 슬픈 인생에 눈물이 절로 나왔다. 그때는 잘 몰랐다. 주인공 푸궤이와 지아전이 겪은 인생은 지극히 현실적이었다는 것을.




  많이 보고 많이 생각나는 영화가 좋은 영화라면 나에게 1990년대 홍콩영화와 중국 영화는 좋은 영화다. 영화감독이 되고 싶어 쏟아부은 시간과 노력의 비율은 지금은 생각조차 안나는 예술영화들이 더 높겠지만 기억의 효율과 내 심미적 효용의 측면을 보자면 비교불가다.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지 않았더라면 중국이 예전처럼 문화적 다양성이 풍부하게 인정되는 사회였다면 어땠을까. '인생'같은 영화를 다시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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