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랑은 술에 대취해 자기 젖가슴을 지분거리는 *개루왕을 달래고 있었다. 왕의 침전 옆방에 기거하며 꽃물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비랑은 마음이 착잡했다.
* 개루왕 – 蓋婁王. 백제 제4대 임금. 재위는 서기 128∼166년이다.
“아직 그것이 끝나지 않았느냐? 빨리 너를 안아보고 싶구나. 너의 뽀얀 속살이 자꾸 눈앞에 아른거려 못 살겠다. 이틀 후면 가능하렸다?”
여러 명의 비빈(妃嬪)을 거느리고도 성욕이 차지 않은 왕은 자색이 곱다고 소문난 여인이 있으면 기혼, 미혼 가리지 않고 기어이 그 여인을 취해야 직성이 풀렸다.
“대왕님, 지아비는 나라에 큰 죄를 저질러 이미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인데 소첩이 무슨 낙이 있겠사옵니까. 부디 이 천한 계집을 버리지 마소서.”
“알았다. 기다리마.”
비랑은 위기를 모면하기 위하여 왕에게 마음과 다른 말을 하면서 마음속으로 눈물을 흘렸다. 얼굴을 하얀 헝겊으로 칭칭 동여맨 도미가 울고 있는 환영(幻影)이 수시로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당장 궁궐을 뛰쳐나가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자신의 처지가 답답하기만 했다.
“비랑이 백제 최고의 미인이라는 소문이 갈수록 더 널리 퍼져 나가는 사품에 나는 불안하기 짝이 없어요.”
비랑은 불행이 닥치기 전 도미가 한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때만 해도 비랑은 남편의 이야기를 귀담아듣지 않았다. 그냥 듣기 좋으라고 해보는 소리거니 하고 지나가는 말로 흘려버렸었다.
“그이는 이런 불행을 예견했었구나.”
궁궐에 들어온 이후 비랑은 한숨도 눈을 붙이지 못한 상태이지만, 머릿속에는 온통 도미의 생각뿐이었다.
왕이 동침을 하자고 명령조로 말할 때부터 달거리를 핑계로 간신히 위기를 모면했다. 길어야 사나흘 정도 걸리는 달거리 기간을 마냥 기다려 달라고 핑계를 댈 수도 없었다. 왕이 잠이 들었는지 침전은 조용하고 임금을 가까이 모시는 지밀전 시녀들만 장승처럼 문밖에 서서 졸고 있었다.
비랑이 소피를 핑계로 침전을 빠져나오자, 시녀 한 명이 따라붙었다. 측간에 들어 앉아 억지로 일을 보는 척하고 나서 뜰로 나오니 달이 교교하게 전각들을 비추고 있었다.
“도미, 지금 어디에 계세요? 살아 있는 거예요? 아니면….”
비랑은 달을 보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몽실한 젖가슴에 왕의 더러운 손때가 묻어있는 느낌이 들었다. 예전 같으면 사랑하는 지아비의 손길에 마냥 행복해 있을 시간이었다. 달이 구름 속으로 숨자, 소쩍새 울음소리가 더욱 처량하게 들렸다. 비랑은 깊은 생각에 빠졌다. 도미는 목수지만 오로지 자신만을 의지하고 사는 사람으로 심성은 나무랄 데가 없었다.
여태껏 도미가 최고인 줄로만 알고 살아온 비랑은 임금의 부름을 받고 궁궐에 들어오는 순간 그전의 생활을 뒤돌아보았다. 비랑이 도미와 부부가 된 뒤로도 수많은 유혹이 있었다.
얼마 전에는 도미가 목수 일로 집을 며칠 비운 사이에 높은 벼슬아치 아들 되는 사람이 금은보화를 가지고 찾아왔다. 그는 비랑을 정실부인으로 삼을 테니 도미와 이혼하고 자신에게 시집을 오라고 했다. 그때 비랑은 단호하게 거절하면서 도리어 그 남자에게 창피를 주어 쫓아냈다.
그러나 왕의 유혹은 차원이 달랐다. 어린 시절부터 동경했던 대궐은 비랑의 마음을 혼란하게 했다. 왕은 물질에 약한 여인의 사치심을 간파하고 비랑을 대궐로 데려왔을 것이 분명했다. 지순한 사랑을 택할 것인지 아니면 부귀영화를 선택할지를 놓고 비랑은 잠시 흔들렸다.
처음 보는 음식이며 왕비나 비빈만 입을 수 있는 비단과 능라로 만든 옷, 시녀를 거느릴 수 있는 권력 등. 비랑이 왕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면 후궁이 되어 온갖 사치를 누릴 수 있게 된다. 왕에게 두 눈을 뽑혀 울부짖는 도미의 환영이 보였다. 귀신같은 형상을 한 도미는 허공을 향해 손을 저으며 통곡하고 있었다.
“도미….”
퍼뜩 정신이든 비랑이 소리를 지르며 그 환영을 잡으려 하였으나 이내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소쩍새 울음소리가 점점 슬프게 들리는 듯하더니 이내 비랑의 가슴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도미는 이틀 동안 겨우 한 사람 탈 수 있는 쪽배에 실려 *욱리하를 타고 서해를 향해 흘러갔다. 강제로 두 눈을 빼앗긴 원통함에 아무리 울고불고 소리쳐도 곁에 들어 줄 사람이 없었다. 오랜 가뭄으로 강물이 바닥을 보일 정도였다.
쪽배는 바람의 의지에 따라 강 하류로 흘러갔다 다시 거슬러 오르기도 하면서 천천히 서해로 흘러갔다. 이틀 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혼수상태에 있다 겨우 깨어난 도미는 목이 탔다. 칠월의 새벽 밤하늘에는 뽀얗게 은하수가 뿌려져 있고 별들이 애처롭게 도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욱리하 - 郁里河. 지금의 한강을 백제 시대 부르던 이름.
“물, 무울, 물 좀 줘, 물 좀 달라고….”
도미는 울부짖으며 물을 찾았지만, 들리는 것은 철썩거리는 파도 소리뿐이었다.
어쩌다 갈매기가 날아와 뱃머리에 앉았다가 도미의 험상궂은 모습을 보고 놀라 달아나기도 했다. 도미는 머리가 빠개지는 듯한 고통을 참으며 지난 며칠간 자신에게 닥친 운명의 장난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동시에 악마 같은 왕과 비랑의 얼굴이 교차하면서 떠올랐다.
“도미, 오늘은 당신 뒷모습이 이상하게 무거워 보여요.”
비랑은 대궐 공사장으로 향하는 지아비에게 걱정스러운 어투로 말했다.
“아무 일도 없으니 걱정하지 말아요.”
도미는 바쁘다며 얼른 대문을 나섰다.
그렇지 않아도 비랑은 요즘 꿈자리가 뒤숭숭했다. 오래전에 돌아가신 친정아버지가 나타나기도 하고 죽은 친구들이 언뜻언뜻 보이기도 했다. 간밤에도 도미는 초저녁에 잠시 비랑을 안아주고는 피곤하다며 잠을 청했다.
예전에는 운우의 정을 나눈 뒤에는 새벽녘까지 도란도란 이야기를 해주던 자상한 지아비였다. 그 전날 밤에도 도미는 등을 돌리고 잠을 청해 비랑의 마음이 편치 않았다. 비랑은 마음이 좀 상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도미의 눈에는 비랑이 대궐 여인들에 비해도 전혀 손색이 없었다. 자주는 아니지만 대궐에서 마주치는 여인들을 볼 때마다 도미는 괜히 얼굴을 붉혔다. 고개를 숙이고 대궐 여인들이 다 지나가도록 곁눈질로 바라볼 뿐이다.
눈에 비친 대궐의 여인들이 아내 비랑보다 별로 예쁘지 않다는데 도미는 가슴이 뿌듯했다. 도미는 대궐에서 목수로 일을 하게 되면서부터 밤늦게 집에 돌아오면 대궐의 여인들보다 더 예쁜 비랑을 안아주는 일이 빈번해졌다.
“비랑. 지금 어디 있는 게요?”
도미는 지난날의 행복했던 순간들을 떠올리며 소리를 질러보았지만, 역시 바람과 파도 소리만 들려왔다.
항아만큼이나 예쁘다고 백제 전역에 소문이 자자했던 비랑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곁에 비랑이 있다고 해도 눈이 없어 볼 수 없는 처지가 디고 말았다.
‘지금쯤 비랑이 왕의 가슴에 파묻혀 열락의 밤을 보내고 있을까? 아아, 사랑하는 아내를 놓고 왕과 내기한 내가 바보로다. 내가 천하의 못난이로다. 내 스스로 불러온 불행을 두고 누구를 탓하랴?’
도미는 벌거벗은 비랑이 왕과 한 몸뚱이가 되어 비단 금침에서 뒹구는 환상에 시달렸다.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도미의 뇌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이놈들아. 이거 놔라. 놓으란 말이야.”
마귀 같은 왕의 부하들이 도미의 사지를 틀에 묶고 강제로 두 눈알을 뽑으려고 달려들었다.
도미가 아무리 발버둥 쳐보았자 왕의 부하들은 음흉한 웃음소리를 낼 뿐이었다. 한 명이 도미의 왼쪽 눈을 집게로 파내고 한 명이 가위로 핏줄을 끊었다. 도미는 부르르 떨며 발버둥 쳤다. 이윽고 오른쪽 눈알마저 뽑히자, 도미의 얼굴에 피가 폭포수처럼 흘렀다. 왕의 부하들이 눈알이 빠진 구멍에 헝겊으로 틀어막고 얼굴을 붕대로 둘둘 말았다.
“도미야, 그나마 목숨 붙어있는 게 대왕의 자비인 줄 알아.”
나찰 같은 병사들이 깔깔거렸다.
“네 마누라가 이 백제에서 최고의 미인이라지?”
공사장에서 일하다 말고 대전에 불려 온 도미는 어쩔 줄 몰라 했다. 말로만 듣던 대궐의 최고 높은 궁전인 임금이 정사를 보는 곳이었다.
“도미, 고개를 들라. 너는 나의 백성이고, 나는 너의 왕이니라. 백성과 왕 사이에 무에 어려울 게 있느냐. 어려워하지 말고 고개를 들라.”
대신들로부터 목수장이 도미의 아내가 백제 최고의 미인이라는 소리를 들은 개루왕은 질투와 호기심이 발동했다. 백제 최고의 미인을 데리고 사는 자가 어떻게 생긴 사내인지 왕은 직접 보고 싶었다.
“대왕이시여, 제 아내는 그리 잘난 여인이 아니옵니다.”
대전 마룻바닥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는 도미의 모습을 보자 왕은 흡족한 미소를 띠었다.
“너에게 무슨 죄를 물으려고 하는 게 아니야. 이리 가까이 오라. 백제에서 제일가는 미색을 아내로 둔 너의 얼굴을 자세히 보고 싶구나.”
마지못해 도미가 왕 옆으로 다가가 의자에 앉자, 왕은 시녀를 시켜 따뜻한 술을 한잔 내렸다.
“연일 계속되는 대궐 증축 공사에 노고가 많구나. 너의 수고로움을 잠시나마 위로코자 하니 주저 말고 마시거라.”
“대왕님, 고맙습니다. 이 은혜는 죽어도 잊지 못하겠나이다.”
생전 처음 맛보는 미주(美酒)였다. 한잔을 마시자, 몸이 허공에 붕 뜬 듯했다. 연거푸 석 잔을 마시자, 정신이 몽롱했다. 술이 뱃속에 들어가면서 마치 꿈을 꾸는 것 같기도 했다.
“짐이 오늘 너와 내기하려고 한다.”
“내기라니요? 저는 가진 것이 없는 무지렁이 목수입니다.”
도미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화려한 금관에 황금색 비단으로 만든 곤룡포를 입은 임금은 보통 인물 같아 보이지 않았다. 눈이 부리부리하고 얼굴이 대춧빛처럼 불그스레하며 구레나룻이 무성하여 한눈에 보아도 호탕한 기질이 보였다.
“짐이 달포 전에 아차산 계곡으로 사냥을 나간 적이 있었어. 그런데 사냥터 근처에서 놀러나 온 여인 두 명을 보았는데 내가 은근히 수작을 걸어 보았지. 술 한 잔 살 테니 가까운 주막에 가서 함께 자리하자고 말이야. 그랬더니 그 두 여인은 군소리 없이 따라 오더군. 술을 몇 순배 돌리고 금은보화를 보여주자마자 알아서 옷을 벗더군. 여인들은 금은보화를 보면 눈이 뒤집혀. 백제 최고 미녀와 사는 자네는 어찌 생각하는가? 자네 처도 그런 상황이 되면 말이야?”
“네? 무, 무슨 말씀인지?”
왕은 넌지시 도미의 의중을 살폈다. 난처한 질문에 도미는 답변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자, 왕은 큰 소리로 외쳤다.
“자네 처도 그 여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거야.”
“아니올시다. 소인의 처는 하늘이 무너져도 절대로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정말이지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그래? 네 처가 그렇게 대단한 절개를 지니고 있다는 말이렷다? 좋아. 그럼, 나하고 내기를 하지. 내기를 말이야?”
“내기라니요, 대왕님? 무슨 내기를….”
“자네 처가 얼마나 도도하고 절개가 굳은지 짐이 신하를 보내어 실험을 해보지. 만약 자네 처가 신하의 유혹에 빠지게 되면 자네 처는 짐의 후궁이 되는 거고, 자네 처가 정말로 절개가 강한 여자로 판명되면 자네에게 황금 천 냥을 상으로 내리겠네. 어떤가? 재미있는 내기 아닌가?”
도미는 자신이 있었다. 자신이 집에 없는 틈을 타 백제에서 내로라하는 고관대작들의 아들이나 부상(富商)들이 아내를 유혹하기 위하여 별 흉계를 꾸몄어도 그들의 마수에 넘어간 적이 없는 아내였다. 그러나 도미는 불안했다. 상대가 나라님이기 때문이었다. 나라님은 돈과 권력과 백성들의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있고,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신분이었다.
“네, 좋습니다. 내기하겠습니다.”
“그래? 좋다! 너는 지금부터 내기가 끝날 때까지 이곳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내기가 끝나면 너는 자유롭게 해주지.”
왕은 도미를 감금하고, 내신좌평 해부루(解阜婁)를 왕으로 단장시켜 밤중에 도미의 집으로 파견하기로 했다.
“폐하, 분부하소서.”
왕은 백제 조정의 벼슬아치 중 해부루가 자신과 얼굴이 비슷하고 풍류를 좀 안다고 판단하였다.
“그대는 이 길로 도미라는 목수의 집으로 가서 그의 아내를 유혹하여라. 반드시 하룻밤 동침하고 그 여인의 속곳을 가져오너라.”
왕은 도미와 내기를 하게 된 내막을 설명해 주었다.
“소신이 반드시 도미 아내의 속곳을 가져오겠나이다.”
“그대만 믿겠소. 그대는 어색(漁色)에 뛰어난 풍류객이라 알고 있소. 도미 처와 동침은 하되 절대로 그 계집을 건드리면 아니 되오. 그 계집의 몸에 손대지 말고 속곳만 빼내 오란 말이오.”
왕족의 한 사람인 해부루는 입이 무겁고 행동에 조심성이 있어 만약 일이 그르친다 해도 백성들에게 소문나지 않을 거라 왕은 판단했다.
딱, 딱-.
야경을 도는 궁궐의 수비 군사들이 전각 사이를 오가며 딱따기를 쳐댔다.
밤이슬에 비랑의 옷이 흥건하게 젖었다. 아녀자의 몸으로 새벽녘에 궁궐을 빠져나간다는 일은 절대 쉽지 않았다. 순라를 도는 병사들에게 발각되면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비랑이 내전으로 들어가려 하자 곁에서 장승처럼 서 있던 시녀가 뒤를 따랐다.
비랑이 갈 곳은 왕이 잠든 침전이었다. 밤 고양이처럼 살며시 지밀전으로 들어서자, 왕의 코 고는 소리가 내실에 가득했다. 비랑은 왕의 침실과 붙어있는 방에 누웠으나 잠이 오지 않았다. 비랑은 자신에게 일어났던 사건들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짐은 이 나라의 왕이다. 너의 남편과 내기하여 짐이 이겼으므로 너는 이제부터 짐의 후궁이 되어야 하느니라.”
비랑은 과수댁 여리(麗梨)와 골목에서 도미를 기다리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녀는 갑자기 들이닥친 왕의 행차에 비랑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는 혹시 도미가 일을 잘못하여 자신까지 잡으러 온 줄 알았다. 비랑은 가짜 왕의 이야기를 듣고는 일이 잘못 되어가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한 나라의 왕이 한밤 중에 여염에 행차할 때 호위무사 한 명만 대동하고 올 리가 만무했다. 가짜 왕이거나, 무슨 흉계가 있다고 비랑은 판단하였다.
“대왕님, 잠시만 기다려 주소서. 나라님께서 누추한 곳에 행차하셨는데, 어찌 이렇게 궁색한 차림으로 뵐 수 있겠나이까? 목욕하고 단장을 한 뒤 다시 찾아뵐 때까지 기다려 주소서.”
비랑의 말에 가짜 왕 해부루는 어쩔 수 없이 기다리기로 했다. 사랑방에 침방을 마련한 비랑은 흐릿한 촛불을 켜놓고 조촐한 주안상을 들였다. 칠보단장을 한 여인이 문을 열면서 들어섰다. 해부루는 이미 두 차례 전주가 있는 터라 자작으로 술 서너 잔을 마시다가 대취해 곯아떨어졌다.
여인은 비랑이 아닌 이웃집 과부인 이십 중반의 여리였다. 여리는 삼 년 전 남편이 갑자기 병사하는 바람에 독수공방하며 뜨거운 욕정을 참지 못해 은근히 동네 젊은 남자들을 꼬여 정을 통하며 외로움을 달래오고 있는 처지였다. 그녀는 비랑의 간곡한 청에 이끌려 비랑으로 위장하여 꽃단장하였다.
“대왕님, 도미의 아내 비랑입니다. 어찌 벌써 주무시는지요?”
여리는 해부루를 깨워 합환주를 마시게 하고 함께 잠자리에 들었다. 대취한 해부루는 비몽사몽간에 여리를 품에 안았다. 그는 그 와중에도 여리의 속곳을 벗겨 베개 밑에 숨겨 두었다.
“흠, 고년도 별거 아니로고. 내일은 대왕의 칭찬을 듣게 되었구먼.”
고관대작과 합방을 한 여리는 해부루가 피곤하니 그냥 자자고 하여도 막무가내였다. 그녀는 해부루의 옥경을 지분거리며 한동안 막혔던 욕정을 불태우며 뜨거운 밤을 보냈다.
“동침은 하되 절대로 건드려선 아니 되오.”
“염병! 임금이고 나발이고 모르겠다. 내일 죽어도 여한이 없으니 백제 최고 미녀를 품어보자. 고년 얼굴만 반반한 게 아니라, 허리를 살살 돌려대는 것을 보니 요분질도 끝내주는구먼.”
“대왕, 만족하십니까?”
해부루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흡족해했다.
여명이 창문을 촉촉하게 적실 때까지 남녀의 격렬한 몸부림은 계속되었다. 그들은 세 번씩이나 만리장성을 쌓기도 했다. 첫닭이 울자 해부루는 그제야 곯아떨어졌다. 여리는 해부루가 잠이 들자 부스스한 얼굴로 방을 빠져나왔다.
“여리야. 간밤에 재미는 많이 보았어?”
“재미는 무슨 재미요? 나라님이 술에 떡이 되는 바람에 거기 주변만 더럽히고 여인네 가슴에 불만 지피다 말았구려.”
두 눈이 벌겋게 충혈된 여리는 킥킥거리며 비랑에게 무언가 건네주었다.
“이건 그 나라님의 속옷입니다. 혹시 나중에라도 무슨 증거가 될까, 해서 잠자는 틈을 이용해 몰래 벗겨왔지요.”
해가 중천에 오르고 나서야 해부루는 퀭한 눈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아직도 입에서 진한 술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귀여운 것. 너는 진정 나의 배필로 손색이 없도다. 나중에 신하들을 보낼 터이니 궁궐로 들어와 짐과 편하게 한평생 살아보자꾸나.”
해부루는 좋은 옷을 사 입으라며 은자 한 상자를 비랑에게 안겼다.
“간밤에 나와 운우의 정을 나눈 사실을 함구해야 한다.”
왕을 찾은 해부루는 임금에게 여리의 속곳을 내보였다.
“이것이 도미 마누라의 속곳이란 말이지?”
“대왕, 경하드립니다. 백제 최고 미녀를 후궁으로 두시게 되었습니다.”
해부루는 왕의 눈치를 보며 입에 침을 발랐다.
그는 비랑에게 은자를 안겼으니 통정한 사실을 발설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왕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해부루에게 상을 내렸다. 그는 즉시 도미를 불렀다.
“도미야. 이것이 네 계집의 속곳 아니냐? 짐이 뭐라고 했더냐? 계집은 금은보화에 약하다고 하지 않았더냐. 어제 너는 짐과 내기하였으니, 이제 너의 마누라는 짐의 것이다.”
도미는 눈앞이 아찔했다. 왕은 도미에게 베로 만든 속곳을 내보였다. 그 속곳은 도미가 처음 보는 물건이었다. 비랑은 겉옷은 여염의 여인들처럼 입고 다니지만, 속곳은 비단으로 해 입었다. 한참 동안 속곳을 이리저리 살펴보던 도미는 고개를 저으며 대왕에게 대답했다.
“대왕이시여, 이것은 제 아내의 속곳이 아닙니다.”
도미는 절대 아니라고 큰 소리로 변명해 보았지만, 해부루는 위엄을 보여 가면서 엄포를 놓았다.
“네놈이 감히 대왕과 내 눈을 속이려 들다니, 믿지 못하겠다면 지금 즉시 달려가 네놈의 마누라 그곳을 확인해 봐라. 간밤에 그곳에 불이 났었을 테니, 아직도 벌겋게 부어 있을 거다.”
해부루는 입에 게거품을 물었다.
“해좌평, 속곳만 빼내라고 하지 않았소? 방금 그게 무슨 소리요?”
순간 해부루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대왕. 그냥 해본 말입니다. 저놈 변명에 화가 나서 그런 말을 했사옵니다. 목숨을 걸고 맹세합니다. 같이 한 이불을 덮었지만 절대로 건드리지는 않았사옵니다. 소신을 믿어 주소서.”
순간 대전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도미는 해 질 녘까지 마누라를 대궐로 데리고 오라. 저녁을 넘기면 군사를 보내 강제로 데려오겠다.”
왕은 찜찜한 표정을 지으며 도미에게 명령을 내렸다. 도미는 집으로 돌아오면서 비랑이 베로 된 속옷을 가지고 있었는지에 의구심이 일었다.
“비랑!”
“도미!”
두 사람은 서로 얼굴만 바라보며 말을 잇지 못했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도미는 초췌한 얼굴로 비랑을 바라보면서 만감이 교차했다.
‘정말로 아내가 간밤에 좌평이랑 눈이 맞아 몸을 섞었단 말인가? 옷을 모두 벗기고 아내의 은밀한 부위를 확인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 일을 어찌한다?’
도미는 속으로 고민했다. 복사꽃처럼 웃고 있는 비랑의 얼굴에는 비감함이나 죄의식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도미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비랑.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있소. 미안하오. 당신에게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구려. 용서하오. 나는 당신의 지아비 될 자격이 없소. 당신이 가고 싶은 곳으로 가도 좋소.”
도미의 슬픈 표정에 비랑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도미.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간밤에 아무 일도 없었어요.”
“아무 일도 없었다니? 대신이 가져온 속곳은 도대체 뭐란 말이오?”
지금껏 한 번도 비랑에게 큰 소리를 내본 적이 없는 도미였다.
“그 속곳은 뒷집에 사는 여리 것이에요.”
비랑으로부터 상세한 사건의 전말을 들은 도미는 조금 전 오해한 것을 미안해했다. 간밤에 지혜로 위기를 넘긴 비랑이 고마웠다.
“사악한 왕이 속은 것을 알면 우리 부부를 가만두지 않을 거요. 어서 이곳을 떠야겠소.”
도미는 왕의 군사들이 금방이라도 자신들을 잡아가기 위하여 들이닥칠 것만 같아 불안했다. 한편 여리는 자신이 간밤에 가짜 왕과 동침하며 정을 통한 사실을 이웃들에게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고 다녔다. 이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서 저녁나절에는 임금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해좌평을 불러라.”
왕은 노발대발했다.
영문을 모르는 내관들과 시녀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왕이 저렇게 화를 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해부루가 왕 앞에 엎드렸다. 그는 엄명에도 불구하고 여리와 육욕의 향연을 벌인 사실을 왕이 눈치챈 줄 알고 덜덜 떨면서 오줌까지 지렸다.
“이놈. 해부루야. 어젯밤 네놈의 행동에 대하여 이실직고하렷다.”
“소, 소신은, 간밤에 도미 처의 속곳을 빼낸 죄밖에 없사옵니다.”
해부루는 머리를 조아리면서도 연신 왕의 눈치를 살폈다.
“이놈아, 누가 그걸 몰라서 묻느냐? 네놈이 범한 계집이 정녕 도미 처가 맞느냐?”
해부루는 간밤의 일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도미의 처로 알던 계집과 몸을 섞은 사실은 분명했다. 그리고 아침에 통정(通情)한 사실을 입막음하기 위하여 은자 한 상자 건넨 사실까지 기억해 냈다.
“대왕, 분명한 것은 소신이 그 계집의 속곳을 빼낸 사실이 분명하다는 것과 또한….”
해부루는 주저주저하며 말을 잇지 못하였다.
‘나는 이제는 죽은 목숨이로다. 으이그, 마누라 펑퍼짐한 궁둥이나 두들기며 지낼 것을….’
“대왕, 죽여 주소서.”
“이놈아, 죽이긴 왜 죽여. 네놈이 간밤에 몸을 섞은 년이 가짜 도미 처인데. 네놈이나 나나 백성들 앞에서 얼굴 들고 다니긴 다 틀렸다.”
“네놈이 살길은 지금 즉시 군사를 이끌고 가서. 두 연놈을 잡아 오는 일이다. 알겠느냐?”
해부루는 목숨을 살려준 왕의 하해와 같은 은총에 감지덕지하면서 군사를 이끌고 도미의 집으로 바람같이 달렸다. 도미와 비랑은 값어치 나갈 만한 금은보화만 챙겨 막 방을 나서려고 할 때였다.
“저 두 연놈을 포박하라.”
병사들이 도미와 비랑을 오랏줄로 꽁꽁 묶어버렸다.
“우리 부부가 뭔 죄가 있어 이러는 게요?”
비랑이 해부루를 노려보며 입에 거품을 물었다.
“네년이 네 죄를 몰라서 그런 말을 하느냐? 요망한 년 같으니.”
해부루는 간밤에 열락을 함께한 여인이 아리따운 비랑이 아니라는데 더 화가 치밀었다.
‘흠, 저런 기가 막히게 예쁜 계집을 두고 내가 간밤에 엉뚱한 년하고 그 짓을 했다니 내 눈이 멀었었구나. 빌어먹을….’
해부루는 백제 최고의 미녀를 앞에 두고 건드려 보지 못한 것이 속이 아팠다. 도미와 비랑이 잡혀간다는 소문이 금방 퍼졌다. 마을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하지만 힘없는 사람들은 말없이 도미 부부가 잡혀가는 것을 바라만 봐야 했다.
“여봐라, 그 미천한 목수 놈을 혼내줄 묘책이라도 있느냐?”
왕은 아부하기 좋아하는 신하들을 불러놓고 도미를 어떻게 처리할지 의논했다. 능변가인 *덕솔 읍호가 아뢰었다.
* 덕솔 - 德率. 백제때, 십육관등가운데넷째등급의벼슬을이르던말.
“대왕, 일찍이 한무제는 태자공 사마천(司馬遷)에게 거시기를 까는 궁형(宮刑)을 내린 적이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당시에는 죄인들의 두 무릎을 절단당하는 형벌, 코를 자르는 형벌, 발뒤꿈치를 잘라내는 형벌, 죄인을 끓는 물에 튀겨 죽이는 형벌, 불에 달궈진 구리 기둥 위를 걷게 하는 형벌 등이 있었습니다. 그 밖에도 매를 치거나 주리를 트는 형벌 등 다양하옵니다.”
왕은 읍호의 말에 만족하지 않았다.
“더 잔인한 형벌은 없느냐?”
“흉악무도한 죄인에게 주는 형벌이 있습니다. 죄인의 양쪽 눈알을 빼내는 형벌로 죄인이 아무것도 볼 수 없게 하는 겁니다.“
왕은 읍호의 말에 귀가 솔깃했다.
“그 형벌을 주면 사람이 죽지 않느냐? 짐은 여인 때문에 백성을 죽였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다.”
“대왕, 사람의 목숨은 하늘에 달린 것이므로 죽을 때가 되지 않으면 아무리 무서운 형벌을 준다고 하여도 절대로 죽지 않습니다. 그러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으래? 그 괘씸한 놈의 두 눈알을 빼버린다?”
그러나 왕은 백성들의 시선이 무서웠다. 왕이 무능하거나 악정(惡政)을 저질러 백성들에게 마음을 잃어 왕위에서 쫓겨난 역사적 사실들을 알고 있었다. 영리한 왕은 도미가 형벌을 받게 되면 백성들은 분명 자신이 도미 처를 탐내어 무고한 백성에게 벌을 내렸다고 손가락질할 것 같았다. 내기에서 졌다고 무고한 백성의 처를 빼앗는 것은 천인공노할 일이 틀림없었다. 왕은 도미에게 무슨 죄를 뒤집어씌워 벌을 줄까, 고심했다.
“대왕, 최근에 도미가 지은 작은 전각에서 서까래 하나를 뽑아 책임을 물으소서.”
왕의 심중을 헤아린 읍호가 달콤한 제안을 했다.
‘서까래 하나 잘못 썼다고 목수의 두 눈을 뽑는다면 백성들이 나의 처사에 대하여 잔인하고 포악하다고 할 거야. 그래, 그거야.’
왕은 무릎을 치면서 자신이 꾀가 많은 사람이라고 자부했다. 왕은 조정좌평 진사미를 불러 어명을 하달했다.
“지금 즉시 도미가 지은 대전 뒤편 전각을 몽땅 허물어라.”
진사미와 읍호는 군사들과 가장 최근에 도미가 지은 전각으로 달려갔다.
“저 전각을 사정없이 허물어라.”
군사들이 벌 떼처럼 달려들어 순식간에 전각 한 채를 허물어뜨렸다.
그들은 전각을 허물고 손뼉을 치며 좋아라 날뛰었다. 해 질 무렵이 되자 해부루는 도미와 비랑을 압송하여 대궐로 들어섰다. 부부는 왕이 기다리고 있는 대전으로 들어섰다. 왕이 도미 부부는 노려보았다.
“도미야! 어째서 대궐 전각을 엉터리로 지어 무너지게 했느냐?”
“엉터리라니요? 소신은 온갖 노력을 기울여 전각을 지었사옵니다.”
“네놈이 감히 짐을 기만하려 드는구나? 짐이 먼저도 네놈과 내기하여 이겼지만, 짐이 넓은 마음으로 용서하려 했다. 그런데 네놈이 최근에 지은 전각이 무너졌느니라. 네놈이 짐을 능멸하고도 살기를 바라느냐?”
도미는 전각이 무너졌다는 소리에 자기 귀를 의심했다. 분명히 그럴 리가 없었다. 며칠 전만 해도 태풍이 불어도 수백 년은 끄떡없을 만세 반석 같은 전각이었다.
진사미와 읍호가 도미 부부를 데리고 무너진 전각이 있는 곳으로 갔다. 도미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얼굴이 백지장처럼 변하며 부들부들 떨었다. 비랑도 무너진 전각을 보고 가슴을 쳤다.
“비랑, 이것은 나를 함정에 빠트려 당신을 차지하려는 왕의 모략이오. 나는 이제 어떤 형벌을 받고 죽을지 모르오. 나는 결백하오. 분명히 어제까지만 해도 저 전각은 멀쩡하게 서 있었소. 내가 형벌을 받고 멀리 귀양을 가거나 죽더라도 당신은 내 진심을 알아줘야 하오. 비랑….”
도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속으로 한탄했지만 당장 눈앞에 닥친 화를 모면할 길이 없었다.
“도미. 저는 죽어도 다른 남자의 여인이 안 될 거예요. 절대로 안 될 거예요. 그러니 안심해요. 도미.”
도미와 비랑은 땅바닥에 퍼더버리고 앉아 통곡했다. 부부는 다시 대전으로 들었다.
“도미야, 네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느냐?”
왕은 느물느물 웃으면서 도미와 비랑을 번갈아 보았다.
“왕이시여, 결단코 이 몸은 전각을 지을 때 털끝만큼의 하자가 있다면 제 몸이 가루가 되는 형벌을 받아도 달갑게 받겠으나, 이건 아니옵니다. 어제 소인이 전각 주변을 정리할 때만 하더라도 손톱만큼의 하자도 없었사옵니다. 이건 누군가가 저를 모함하기 위한 술수입니다.”
도미는 울면서 애원 조로 왕에게 사정하였다.
“대왕님, 여염의 여인이 무엇을 알겠소이까 마는, 지아비는 지금껏 세상을 살아오면서 개미 한 마리 함부로 죽이지 않고, 길바닥에 떨어진 남의 살 한 톨 주워 본 적이 없는 착한 사람입니다. 또한 지아비의 목수 기술은 백성들의 칭송을 받아왔나이다. 그런데 하물며 대왕님께서 거처하실 전각을 함부로 지어 무너지게 할 수 있겠나이까? 이는 어떤 음모가 있음이 분명하옵니다.”
비랑 또한 울면서 왕에게 애원하였으나 왕은 못 들은 척할 뿐이었다. 대전 앞마당에 형틀이 준비되어 있고 나졸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여봐라, 저 못된 목수 놈의 볼기를 치고 옥에 가두어라. 내알 날이 밝는 대로 광장으로 끌어내어 두 눈을 뽑아내고 멀리 귀양을 보내도록 하라. 또한 저 계집은 죄가 없으니 일단 방면토록 하라.”
왕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도미는 밖으로 끌려 나갔다. 그의 엉덩이가 까내려 가고 볼기치는 소리가 대전 앞뜰에 가득했다. 음흉한 왕은 자신이 내린 명령을 스스로 지키지 않았다. 비랑은 방면되지 않고 시녀들의 손에 이끌려 별궁으로 갔다.
왕은 지아비 도미의 엉덩이 살이 터지고 피가 튀는 장면을 보여주면 자신에게 증오심을 가지게 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별궁으로 인도하라고 했다. 사실상 유폐된 것과 같았다.
“비랑, 이왕 이런 지경이 되었으니, 마음 고쳐먹고 대왕님의 분부에 고분고분 따르세요. 부귀영화를 누리는 건 비랑의 마음에 달려 있어요. 오늘 밤은 차분히 쉬면서 잘 생각해 봐요.”
깊고 깊은 별궁으로 인도되어 지밀 시녀의 시중을 받으며 목욕하는 비랑은 온통 도미 생각뿐이었다. 그녀는 대궐에 끌려올 때부터 무사히 집에 돌아갈 수 없을 것을 예상했다.
“아, 지금쯤 그이는 어찌 되었을까?”
욕조 통에서도 비랑은 흐느끼며 자신의 운명에 대하여 통탄했다.
“비랑, 울지 마세요. 눈 한번 딱 감고 마음만 돌리면 왕의 총애를 받을 터인데. 어차피 이래도 한세상 저래도 한세상 아닌가요? 잊으세요. 이제 모두 잊고 대궐에서 새로운 인생을 살아봐요.”
지밀 시녀는 비랑의 애통해하는 마음을 달래보려고 달콤한 말로 달래보았으나 비랑의 흐느낌은 멈추지 않는다. 엉덩잇살이 너덜너덜하게 걸레가 된 도미는 감옥에 갇혔다. 그는 자신이 백제의 백성으로 태어난 사실이 원통했다. 지금이라도 자유의 몸이 될 수 있다면 아내와 이웃 나라 신라나 북쪽의 고구려로 월경하여 도망치고 싶었다.
“대왕, 소첩이 지금 그거 하는 시기입니다. 며칠만 기다려 주소서.”
“그거를 하는 기간이라고? 그럼, 사나흘 지나면 되겠구나.”
비랑은 밤늦게 왕이 부르자 몸엣것을 하는 때라고 속이고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백제는 위로 고구려의 막강한 기세에 눌려 기를 펴지 못하고 있었고, 동으로 신라의 빈번한 침략으로 하루도 마음 편히 살 수 없었다. 고구려나 신라로 야반도주하는 백성들이 갈수록 늘었다. 백제왕과 고위 관리들은 이웃 나라로 도망치는 백성들이 국경에서 잡혀 오면 광장에서 많은 백성이 보는 가운데 참수형에 처했다.
공포 정치에 억눌린 백성들은 마음을 졸이고 살아야 했다. 그러나 왕과 고관대작은 백성들의 고통을 외면 한 채 환락에 빠져있었다. 여색에 눈이 뒤집힌 왕까지 나서서 여염의 아녀자를 겁탈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고위 관리들도 왕의 엽색행각을 본받아 얼굴 반반한 여인은 처녀이거나 지아비가 있는 유부녀라도 가리지 않고 겁탈하는 행위가 빈번히 일어나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
다음 날 아침, 대궐 앞 광장에는 도미가 나라에 큰 죄를 지어 두 눈알이 뽑히는 형벌을 받는다는 소문을 듣고 백성들이 몰려들었다. 해가 동천에 오르자, 병사들이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도미를 부축하고 광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도미의 고의(袴衣)는 피에 범벅이 되어있었다.
광장 가운데 어린아이 키 정도의 단이 설치되고 그 단위에 십자 형틀이 놓여 있었다. 처참한 몰골의 도미를 보자 백성들은 웅성거렸다. 북이 울리면서 군중은 조용해지고 군관이 단위로 올라가더니 문서를 읽어 내려갔다.
[백성들에게 짐의 마음을 알리노라. 짐은 대궐 공사를 맡은 도미가 지극정성으로 짐에게 충심을 다한 데 대하여 높이 평가하노라. 그런데 불미스럽게도 대궐 전각이 무너지는 바람에 나라에 큰 환란이 닥칠 뻔했다. 이에 짐은 마땅히 도미를 참수(斬首)형으로 다스려야 하지만, 그간의 도미 충성심을 깊이 헤아려 죽음만은 면해주기 위하여 간단한 형벌로 일벌백계를 삼고자 하노라.]
군관이 왕의 교서를 낭독하자 여기저기서 군중이 웅성거리며 항의하는 소리가 난무했다. 관리들과 군사들은 긴장한 채 군중을 노려보았다.
“미친 임금 같으니라고. 천벌을 받을 것이다. 백성의 아내를 빼앗기 위하여 충성을 다하는 선량한 자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다니….”
한 노인이 조그만 소리로 중얼거리자, 옆에 있던 다리 한쪽이 없는 젊은 남자가 거들었다. 사람들은 노인의 말에 동조하며 고개를 끄떡거렸다.
“염병할 내가 저런 놈을 믿고 고구려와 신라를 상대해 싸우다가 다리 병신이 되다니, 망할 징조다. 망할 징조야. 빌어먹을….”
젊은이는 목발을 높이 들고 격앙된 목소리로 외쳤다. 도미가 높은 단(壇) 위로 옮겨졌다. 단 위 십자 형틀 옆에 각종 도구가 놓여 있었다.
“대역죄인 도미에 대한 형을 집행하겠다. 백성들은 잘 보거라”
군관이 오른손을 높이 들자, 병사들이 도미의 사지를 형틀에 묶었다.
“시행하라.”
군관이 명을 내렸다. 도미가 발버둥을 치자 병사들이 그의 입을 헝겊으로 틀어막고 사지를 꼼짝 못 하게 잡았다.
날카로운 비수가 도미의 양 눈알을 파내기 위해 살 속으로 파고들어 갈 때 도미는 부들부들 떨다가 정신을 잃었다. 피가 튀고 어린아이 주먹만 한두 눈알이 피를 뚝뚝 떨어뜨리며 적출되었다. 눈알이 적출된 우묵한 두 구멍을 병사들이 헝겊을 둘둘 말아 틀어막았다.
그의 눈알을 뽑아내는 병사들도 치를 떨며 도미를 바라보지 못했다. 병사들은 도미가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처벌을 받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강제로 두 눈알이 뽑힌 도미에게 군관은 다시 명을 내렸다.
“저놈을 쪽배에 태워 강에 띄워라.”
얼굴을 붕대로 둘둘 감은 도미가 손바닥만 한 쪽배에 실려 강에 버려졌다. 강둑에는 도미의 처참한 광경을 보고 통곡하는 백성들도 있었다.
“어쩔거나, 어쩔 거나. 어여쁜 임을 두고 저리 떠나가는 저임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저리 무심히 떠날거나. 어허! 세상인심 야속하다. 부디 멀리멀리 가시거든 고운 임 다시 만나 이승에서 하지 못한 인연을 맺으시오. 말세로다. 임금이 백성의 아내를 탐하니, 어이, 나라가 태평할꼬….”
어느 노파는 즉석에서 노래를 지어 부르며 쪽배에 실려 흘러가는 도미를 위로했다.
“비랑아, 네 지아비는 적당히 혼만 내서 보냈느니라.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멀리 가서 혼자 편히 잘 먹고 살도록 수만금의 보화(寶貨)를 안겨주었느니라. 그러니 너는 이제까지의 일을 모두 잊고 나와 한평생 잘 먹고 잘살아 보자.”
왕은 호탕하게 웃으면서 비밀 시녀에게 비랑을 깍듯하게 모시라고 명을 내렸다. 하루가 이처럼 지루하게 지나간 적이 없었다. 임금의 침궁에서 하루 종일 멍하니 천정만 바라보던 비랑은 갑자기 울컥하고 서러움이 복받쳤다.
“도미. 어찌하면 내가 이 못된 왕으로부터 도망할 수 있단 말이에요? 네? 대답 좀 해보세요?”
비랑은 울다가 웃다가를 반복했다. 그녀는 마치 정신 나간 사람 같았다. 시녀가 가져온 점심과 저녁도 거르면서 비랑은 통곡했다. 낮에 비몽사몽간에 비랑은 두 눈이 빠진 도미가 쪽배에 탄 채 어느 섬 근처를 떠도는 모습을 보았다.
‘도망가는 거야. 야반을 틈타 도망가는 거야. 도망가서 사랑하는 내 낭군 도미를 찾아 고구려로 도망가는 거야. 도미는 분명 죽지 않고 살아있을 거야. 분명히 죽지 않고 살아 있을 거라고….’
비랑은 비밀 시녀에게 호의를 보이면서 대궐 문을 출입하는 방법과 여러 사정에 관하여 물었다. 시녀는 묻지도 않은 내용까지 상세히 일러 주었다. 늦은 밤이 되었다. 대궐 내 정원에서 소쩍새가 울었다.
비랑은 마음이 울적해지고 부모와 형제들 얼굴이 환영처럼 스쳤다. 유부녀로서 임금의 수청을 들어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얄미웠다. 한 남자만을 낭군으로 모시고 한 백 년 살고자 했던 소박한 꿈이 산산조각이 난 이 시점에 새로이 다른 사내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이 죽기보다 싫었다.
‘어떻게 다른 남성을 받아들인단 말인가?’
“대왕님, 납시오.”
내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왕이 침전으로 들어섰다.
비랑은 벌떡 일어나 웃는 얼굴로 왕을 맞았다.
“오, 비랑아 많이 기다렸겠구나. 이제부터 너는 나의 가장 사랑스러운 여인이란다. 오늘 밤 나와 열락의 밤을 보내자꾸나.”
이미 술에 취한 왕은 역겨운 술 냄새를 풍기며 비랑에게 덤벼들었다.
“대왕님, 어찌 이리도 성급하세요? 합환주도 없이….”
“아, 그렇구나. 미안, 미안. 여봐라, 속히 합환주를 들여라.”
대취한 왕은 술잔을 비우자마자 비랑을 안고 침대로 가더니 그녀의 상의(上衣)를 벗기기 시작했다. 비랑의 뽀얀 속살이 드러나자, 왕은 마른침을 삼켰다.
“대왕님, 송구하옵니다. 이틀만 기다리시면 꽃물이 모두 마르오니, 기다려 주소서.”
“흠, 그래? 그럼 짐이 참아야지. 기다리마.”
대취한 왕은 혼자 중얼거리다가 잠이 들었다. 왕의 성욕을 잠재운 비랑은 침전을 빠져나왔다. 보름달이 하늘 높이 서녘을 향해 흐르고 소쩍새의 구슬픈 울음소리만 들려왔다. 왕은 코를 골며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반달이 거의 서산으로 숨을 즈음 비랑은 살며시 잠자리에서 일어나 왕이 깊이 잠든 것을 확인했다. 그녀는 왕의 옷으로 갈아입고 진기한 패물을 옷 속에 감추었다. 다행히 왕의 키가 크지 않아 비랑에게 꼭 맞았다.
시녀들은 모두 졸고 있었다. 비랑은 비단 왕모(王帽)를 쓰고 긴 칼을 차고 살며시 침전을 빠져나왔다. 그녀는 정문이 아닌 서쪽에 나 있는 쪽문을 향해 재빨리 몸을 움직였다. 달이 서산에 잠겨 대궐 안은 무덤 속 같은 암흑세계였다.
정문과 달리 쪽문은 경비가 허술하여 겨우 병사 두 명만이 문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안에서 문을 두드리자, 밖에 있던 병사가 문을 열었다. 졸던 병사들은 번쩍거리는 황금색 곤룡포에 왕모를 쓴 비랑을 보고 왕으로 착각하여 땅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수고들 많구나. 야간 순찰을 해야겠다. 한 명은 나를 호위하거라.”
왕을 가까이서 본 적이 없는 터라 병졸들은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젊은 병졸 한 명이 비랑을 뒤따랐다.
“너는, 며칠 전 도미라는 사내가 어떻게 되었는지 아느냐?”
병졸이 겨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도미는 눈알이 뽑힌 후 배에 태워 바다로 흘러갔나이다.”
비랑은 가슴이 철렁했다. 그러나 꾹 참고 다시 물었다.
“그래, 너는 그가 배에 태워져 어디로 갔는지 아느냐?”
“소인의 생각으로는 아마, 지금쯤 미추홀 앞 바다나 아니면 그 주변 천성도로 흘러갔을 겁니다.”
“그래? 천성도를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느냐?“
“성 밖에 나루터에서 배를 타면 됩니다.”
“너는 짐을 나루터까지만 수행하렷다.”
위례성(慰禮城)은 여름밤 새벽안개에 자욱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밤잠이 없는 매미가 울어 대고 달이 숨은 밤하늘에는 소금을 뿌려 놓은 듯 은하수가 머리 위에서 흐르고 있었다. 비랑은 마음이 급했다. 두 식경(食頃)쯤 걸으니, 나루터가 나왔다. 병졸에게 금 한 량을 주고 돌려보냈다. 비랑은 잠자고 있던 뱃사공을 깨웠다. 화려한 복색의 귀족을 보자 사공들은 넙죽 엎드렸다.
“나는 왕의 동생이다. 급히 왕명으로 볼 일이 있어 천성도를 가야 하니 빨리 배를 저어라. 너희들 수고비는 넉넉히 주겠다.”
비랑이 사공 여섯 명에게 금 한 덩이씩 주자 그들은 입이 벌어졌다.
“여기서 천성도까지 얼마나 걸리느냐?”
“한나절 이상 걸립죠. 순풍이 불면 바람을 타고 두서너 식경 후면 당도 할 수도 있지만, 만약 역풍이 불면 하루는 족히 하루는 잡아야 합지요.”
나이가 가장 많은 듯한 사공이 고개를 들지 못하고 굽실거리며 대답했다.
“너희들에게 뱃삯을 추가로 줄 테니 가장 빠른 배를 대령하렷다.”
사공들은 자신들 끼리 뭐라고 소곤대더니 큼지막한 배를 대령했다.
“돛을 올리고 노를 저어라. 최고로 빠른 속도로 나아가라. 가면서 혹시 조그만 나룻배가 보이거든 배를 멈추어라.”
여섯 명이 젖는 배는 화살처럼 강을 달렸다.
‘그이가 살아 있어야 할 텐데….’
“사공들은 빨리, 더 빨리 노를 저어라.”
남장하고 칼을 찬 비랑의 서슬에 눌려 뱃사공들은 전속력을 냈다. 날이 맑아 오기 시작했다. 희부연 물안개가 사방에 자욱했다. 날이 밝아오기 전에 천성도에 도착해야 했다. 비랑은 도미는 천성도 주변에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만약 정오 안으로 도미를 찾지 못하면 추격해 오는 백제 수군에게 붙잡힐 것이 뻔했다. 안개가 서서히 걷히면서 시야가 넓어졌다.
‘도미, 제발, 제발 살아만 있으세요. 당신의 아내가 지금 가고 있답니다. 도미 제발 살아만 있으세요.’
비랑은 천지신명께 기도를 올렸다. 배가 뱀처럼 서해(西海)를 향해 바람을 갈랐다. 다시 한 식경을 달렸다. 안개가 완전히 걷힌 강 저 멀리 희끄무레한 점 같은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나으리, 섬입니다. 천성도입니다.”
“아, *천성도!”
배기는 더욱 빨리 바람을 뒤로했다.
“저기 천성도 근처에 뭔가 있다. 가까이 가보자.”
젊은 사공이 소리쳤다. 도미가 타고 있는 쪽배가 분명했다. 비랑은 배를 가까이 대라고 명령했다. 도미는 죽었는지 살아있는지 움직임이 없었다. 사공 한 명이 쪽배를 끌어당겨 미동도 없는 도미를 발로 툭툭 쳤다. 그러자 도미가 꿈틀댔다. <끝>
* 천성도 -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곳에 천성도(泉城島)라는 곳이 있다. 천성도는 현재 오두산 통일 전망대가 있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