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하정인(6)

숙연(宿緣)

by 최재효















숙연(宿緣)





멀리서 늑대 울음소리와 이름 모를 산 짐승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청년은 깊은 생각에 빠져 있는 노스님을 방해하지 않기 위하여 합장을 한 채 속으로 비명에 간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많은 혈육들의 왕생극락을 위하여 기도를 하였다. 이 년 전 악몽이 떠올랐다.



청년은 금강산 유점사에서 과거공부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보름 동안의 긴 여정(旅程) 끝에 한양에 거의 도착할 무렵인 시월 중순경 청년은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수양대군의 칼날에 무참하게 척살당했다는 소문을 듣고 발길을 남도(南道)로 돌려야 했다.



경상도와 전라도를 전전하던 청년은 어디를 가도 역적의 무리를 소탕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하룻밤도 발편잠을 이룰 수 없었다. 낮이면 허름한 절간이나 폐가에 숨어들어 잠을 청하고 밤이면 정처 없이 유랑의 길을 걸어야 했다. 하삼도(下三道)를 거지처럼 떠돌다가 겨우 찾아든 곳이 계룡산 자락이었다.



계룡산은 예로부터 삼한의 4대 명산 중의 하나로 주변에 백제 유적과 고찰 등이 많이 산재해 있었다. 계곡마다 소(沼)와 폭포가 절경을 이루고, 삼국시대부터 큰 사찰이 창건되어 동쪽으로는 신라 경덕왕 때 회의(懷義)가 창건한 동학사(東鶴寺), 북서쪽에는 갑사(甲寺) 남서쪽에는 신원사(新元寺)가 자리 잡고 있었다.



남동쪽으로는 이성계가 조선의 도읍지로 정하려고 했던 신도안(新都內)이 위치하고 서쪽의 용문 폭포, 동쪽의 은선 폭포, 갑사의 구곡(九曲), 동학사 계곡 등이 절경을 이루고 있어 토속신앙을 비롯한 유사 종교가 번성한 지역이기도 하다. 특히 동학사는 주위에 여러 암자를 거느리고 있었다.



‘나무 지장보살마하살. 부디 할아버님과 아버님께서 극락왕생하도록 자비를 베푸소서.’


청년은 속으로 비명에 간 조상들의 명복을 빌었다.


“아니 되오.”


깊은 생각에 빠져있던 주지 스님이 갑자기 방안의 정적을 깼다.


“스님, 아니 된다니요? 무엇이 아니 된다는 말씀이신지요?”


“나무 아미타불. 처사는 불자의 길을 걸을 수 없습니다.”


“스님, 불자가 될 수 없다니요? 무슨 뜻인지 저는 전혀 못 알아듣겠습니다.”


“…….”


“스님!”


“…….”


“제가 불자가 될 수 없다면 세상을 살아갈 방도가 없습니다. 부디 불자가 되도록 허락해 주세요. 스님.”


“…….”


“스님, 부탁드립니다.”


주지 스님은 다시 장고(長考)에 든 듯 두 눈을 감고 염주 알만 굴리고 있었다.


‘스님께서 나의 가력(家歷)을 아시고 내가 불자가 될 수 없다고 하신 걸까? 그러나 나는 더 이상 세속의 미련을 떨치고 새로운 세상을 살고 싶은데 왜 아니 된다고 하시는 걸까?'



“처사, 잘 들으세요.”


주지 스님은 청년을 바라보더니 천천히 법문을 시작하였다.


“처사는 이미 숙연(宿緣)을 맺은 귀인(貴人)과 인연의 끈이 닿아 있습니다. 머지않아 그 귀인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네에? 제가 곧 귀인을 만나게 된다고요?”


“세속에서는 사람이 한번 태어나 죽게 되면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처사께서 오늘과 같이 혈혈단신이 된 것도 이미 정해진 운명이고 새로운 인연의 고리가 맺어지게 될 일도 모두가 삼생(三生)에 걸쳐 이어진 업(業)의 질긴 끈 때문입니다.”



‘업의 질긴 끈?’


청년은 생전 처음 듣는 업이라는 생소한 말에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업이란 사바의 사대부중(四大府衆), 즉 우바이, 우바새, 비구, 비구니들이 살아생전 행하는 것으로 사람을 죽이고, 남의 물건을 훔치고, 타인의 여인을 범하는 등의 육체로 짓는 행위의 신업(身業)과 거짓말을 하고, 이간질 시키고, 진실이 아닌 것을 말하고, 악한 말을 하는 등의 말로 짓는 행위의 구업(口業)과 욕심내고, 성내고, 진리를 믿지 않는 마음으로 짓는 행위의 의업(意業) 등 세 가지 업으로 구분하는데 여기에는 인과응보의 철저한 원칙이 따릅니다.


즉, 선한 행위에는 좋은 결과가 이루어지고, 악한 행위에는 나쁜 결과가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그래서 작은 선(善)이라도 기꺼이 받들어 행하고, 비록 작은 악(惡)이라 할지라도 지어서는 안 되는 것이며, 나아가 육도의 윤회의 사슬을 끊고자 한다면 선도, 악도 업(業)이므로 그 두 가지를 놓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좋은 향은 다 타서 사라진 뒤에도 향기가 옷에 배어들어 오래오래 남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생전에 지은 업(業) 속에 남은 어떤 흔적이나 세력은 무의식적 존재 속에 머물러 있다가 기회가 오면 거기에 상응하는 결과를 초래할 뿐더러 존재들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그들로 하여금 살아가게 하는 동력(動力)으로 작용하고 죽은 뒤에는 그들의 미래를 만드는 원천이 된답니다.



그러므로 과거에 진 것을 오늘에 놓고 미래에 갈 것도 오늘에 놓아야하며, 과거에 진 업을 오늘에 놓는다면 미래에는 업이 붙을 일이 없게 되지요. 현재에 붙을 것이 없다면 어찌 미래에 붙을 것이 있겠습니까? 모든 것 놓고 들어가면 놓는 대로 지옥고가 찰나찰나 무너져 내려 업도 윤회도 없게 된답니다.“



주지 스님은 더욱 알쏭달쏭한 말씀으로 청년의 마을을 뒤흔들었다.


‘그렇다면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그렇게 무참히 돌아가신 것도 업을 쌓은 결과란 말인가? 아아, 무섭다. 무서운 일이로다. 그런데 숙연(宿緣)을 맺은 귀인(貴人)이 이미 이곳에 와 있다니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 수 가 없도다.‘



청년은 점점 알 수 없는 법문을 펼치는 노스님이 수수께끼 인물 같아 보였다.


"처사는 이곳에 유하면서 잠시 마음을 평온케 하시기 바랍니다. 나무 아미타불."


청년은 하는 일 없이 동학사에 머물며 소일하였다. 아침 일찍 일어나 대웅전을 비롯한 전각들 마당을 쓸고 식사를 준비하는 스님들 일을 돕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낮에는 계룡산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답답한 마음을 달래며 스님의 법문을 수백 수천 번도 넘게 되뇌며 곧 만나게 될 귀인이 누구인지 궁금해 했다.



어느 날 늦은 밤 청년은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동학사에 나와 동네가 있는 곳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달이 중천에서 밤길을 밝혀주었다. 늘 쉬어 가던 너럭 바위 쯤 내려왔을 때 청년은 얼른 나무 뒤로 모습을 감추었다. 그 너럭 바위에 웬 여인이 앉아 있었고 옆에 몸피가 투실해 보이는 중년 여인이 땀을 닦아내고 있었다. 두 여인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지만 잘 들리지 않았다.



청년은 좀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지만 몸을 숨길만한 곳이 없었기 때문에 그냥 나무 뒤에 서서 여인들의 행동을 지켜보기로 하였다. 바위에 앉아있는 여인의 모습이 어렴풋이 청년의 시야에 들어왔다. 달빛을 받은 여인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귀한 티가 나보였다. 분명 여염의 여인은 아니듯 했다.



'이상하다. 이 야심한 밤에 절에 오는 사람이 없는데 무슨 일로 여인들이 절을 찾아오는 걸까? 다가가서 말을 붙여볼까?'


청년이 혼자말로 중얼거리고 있을 때 절 쪽에서 내려오는 불빛이 보였다. 청년은 얼른 나무 뒤에서 나와 도랑 아래로 몸을 숨겼다. 등불이 가까이 다가왔다. 걸어오고 있는 사람은 주지스님과 동자승이었다.



"지금 쯤 오실 때가 되었는데……."


"스님, 이 밤에 누가 오신다고 마중을 나가시는 것인가요?"


앞서서 걷던 동자승이 주지 스님을 바라보았다.


"아주 귀한 분이시란다."


"귀한 분이요? 스님, 누군데요?"



"너는 알 거 없느니라. 어서 앞서 가기나 하거라."


수수께끼 같다고 생각했던 주지 스님은 동자에게 더욱 알쏭달쏭한 말만 했다.


"스님, 저기 웬 사람들이 있어요. 저기 바위에……."


"오오, 그래, 저기 오셨구나. 오셨어."



"스님께서 말씀하신 귀한 분이 바로 저기 있는 여자들인가요."


"쉿, 조용히 하거라. 아주 귀한 분이시란다."



주지 스님은 달빛을 받고 너럭바위에 앉아 쉬고 있는 여인에게 다가갔다. 여인들도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는 불빛을 보고 긴장하기 시작했다. 등불 뒤에는 분명 스님이었다.



'아, 어마마마께서 미리 연통을 보내셨구나.'


젊은 여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스님을 향해 합장을 하고 고개를 약간 숙였다.



"나무 관세음보살. 공주마마, 먼 길 오시느라 고생이 크셨습니다."


"나무 관세음보살. 소녀, 스님을 뵙습니다."


"스님, 그 귀하다고 하신 분이 바로 공주마마님이셔요?"



주지 스님 곁에 있던 동자승은 공주마마란 말에 깜짝 놀라며 주지 스님에게 물었다.


"쉿, 지금부터 너는 방금 네가 보고들은 바를 누구에게도 절대로 발설하여서는 아니 된다. 알겠느냐?"



"네에. 스님. 명심하겠습니다."


다행히 도랑에 있던 청년은 주지 스님과 여인들이 주고받던 이야기를 자세히 듣지 못했다. 두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이 분명한데 바람소리와 풀벌레 소리 때문에 잘 들리지 않았다.


'저 여인들과 주지 스님은 알고 있는 사이로구나. 어떤 사이기에 주지스님이 마중을 나오셨을까? 혹시 저 여인이 며칠 전 주지스님이 나에게 말씀하신 그 귀인 아닐까?'


청년은 밤늦게 동학사를 찾아 온 여인의 정체가 더욱 궁금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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