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의 탑돌이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아아, 참으로 기이한 일이로다. 두 사람은 이미 마음이 통하였구나. 부처님께서 두 사람의 연을 잇고 계시구나. 사람의 인연 또한 맺어지면 언젠가는 끊어지게 마련이고 그 질긴 인연은 이승과 저승을 넘나들며 반복 되는 것인데. 저 두 남녀에게 부처님의 가피가 있어야 할 텐데…….'
달이 이미 서산으로 기울고 너무 어두워 탑돌이 하기에는 무리일 듯 했다. 그러나 공주와 청년은 쉬지 않고 반야심경을 읊으며 탑돌이를 계속하였다. 다만 하늘에 희뿌옇게 흩뿌려진 은하수가 있어 그나마 사방의 사물의 윤곽이 어느 정도 분간할 수 있을 정도였다. 종종 별똥별이 앞산으로 떨어지기도 하고 멀리서 산짐승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 공주가 돌아오기만 기다리던 유모가 남매 탑을 향해 올라오다가 희한한 광경을 보고 얼른 등불을 껐다.
어둠 속에 공주와 이상한 남자가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고 염불을 하며 탑을 도는 묘한 광경에 유모는 그들의 탑돌이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산사의 밤공기가 차 더 이상 탑돌이를 하다가 몸이 성하지 않은 공주가 병이 날까 걱정이 되었다.
'어쩌나, 마마의 탑돌이를 멈추게 해야 하나?'
'아, 이제 탑돌이를 멈추고 쉬어야 하는데 저 사내는 계속 염불을 하고 있네. 다리도 아프고 한기가 몸속에 스며들어 으슬으슬 떨려오는데 어쩌지?'
공주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때 공주의 마음을 알아차린 유모가 등불을 들고 다가왔다.
"아기씨, 이제 그만 들어가셔요. 날씨가 너무 찬데 잘못하면 고뿔 걸리겠어요. 내일 다시 하시면 되잖아요. 이제 그만하세요."
유모가 공주의 탑돌이를 멈추게 하였다. 뒤따르던 청년이 공주 곁을 막 스쳐지나 가려 할 때 였다.
"나무 관세음보살. 고맙습니다. 장부님 덕분에 오늘 밤 탑돌이를 오래 할 수 있었습니다."
공주는 청년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합장한 채 청년에게 인사말을 건넸다.
"나무 석가모니불. 혹여 저 때문에 놀라지 않으셨는지요? "
청년이 공주의 얼굴을 살며시 바라보며 응대했다.
"아닙니다. 고맙습니다."
세희 공주가 용기를 내어 청년을 넌지시 바라보았다. 어두운 상태이기는 하지만 희미한 등불과 은하수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에 청년의 안면 윤곽을 확인 할 수 있었다.
'아아, 유점사에서 알고 지내던 그 여인의 얼굴이다. 맞아 분명해. 죽은 여인을 이 야심한 밤에 탑돌이를 하다가 다시 만나다니. 그때 그 여인은 저승에 들었는데? 정말로 기이한 일이구나. 혹시 나에게 원한을 품고 여기 까지 따라온 것은 아니겠지? 그도 아니라면 이 여인이 스님이 말한 그 귀인이란 말인가?'
유모의 등불이 세희 공주의 얼굴을 잘 보이도록 하였다. 청년이 공주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자 그녀도 눈을 크게 뜨고 청년을 올려다보았다.
'아, 헌헌장부로다. 이런 깊은 산사에 미장부(美丈夫)가 있다니 믿기지 않는 일이야. 긴 시간 나와 반야심경을 읊으며 탑돌이를 함께한 인연은 도대체 어찌된 것인가?'
공주는 청년을 보자 한양에서 야반도주할 때 노량진까지 자신을 안내해준 무장이 생각났다. 무장과 나이며 키가 비슷했지만 청년이 무장보다 훨씬 준수한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럼, 저는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세희공주와 유모가 자리를 뜨자 청년은 허탈했다. 여러 시간을 함께 탑돌이 한 여인이 지난해 자신을 위해 정성을 다하다 자결한 여인과 얼굴이 같다는 사실에 전율하였다.
'참으로 기이한 인연이로다. 죽은 여인이 이승에 있다니…….'
청년이 자리를 뜬 뒤에도 주지 스님은 한동안 그 자리를 뜨지 못하고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요사채로 돌아온 세희공주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어디선가 본 듯한 청년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보았지만 그 곳이 어디인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새벽 예불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올 때까지 세희공주는 뒤척거리기만 했다. 세희공주와 기이한 만남을 가진 청년 역시 잠을 이루지 못하고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유모, 지금이 몇 시 쯤 되었어요?"
해가 중천에 가까울 무렵 세희공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기씨, 좀 더 주무시지 않고요? 밤새 한잠도 못 주무신 것 같은데요. 점심 때가 조금 지났어요."
"벌써 그렇게 되었어? 내가 늦잠을 잤네."
"아기씨, 앞으로는 야심한 시각에 탑돌이는 하지 마셔요. 그러다 병이라도 얻으시면 어쩌시게요?"
"유모, 난 괜찮아요. 유모 어젯밤 탑돌이 할 때 본 그 장부님 어때요?"
"어떻다니요?"
"아이, 그냥……."
"아기씨, 마음에 드세요? 쇤네가 보기에는 산속에서 자란 사내 같지 않아 보이던데요."
유모는 순간 공주의 눈빛을 살폈다. 분명 공주가 어젯밤에 만난 그 장부에게 마음이 가있는 것이 분명해보였다.
"유모, 이런 깊은 산속에서 미장부를 만나다니 나와 무슨 기이한 인연이 있는 것 같아."
"글쎄요. 쇤네 눈에도 평범한 장부 같지는 않아 보이던데요? 그 미장부가 아기씨 마음을 훔친 건 아니지요?"
"차암 유모도. 괜히 이상한 말을……."
'간밤에 그 장부는 이미 내 마음을 사로잡았는데…….'
그때 문밖에서 유모를 찾는 소리가 들렸다.
"유모 나가봐요. 누가 온 것 같은데."
밖에 나갔던 유모가 금방 돌아왔는데도 세희공주는 얼굴은 빨갛게 상기되어있었다.
"유모 무슨 일인데?"
"마마, 아니 아기씨, 그분이 오셨구먼요."
"그분?"
"왜 있잖아요. 한양을 빠져나오던 날 아기씨와 쇤네를 쪽배에 태워 한강을 건네준 그 무장님 말이어요."
"그 무장님!"
"네에, 그 늠름하고 멋지게 생긴 그 무장님이 수하 여럿을 데리고 와서 공주님을 뵙겠다고 하세요."
"그분이 지금 어디 있어요?"
"대웅전에서 주지스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을 보고 막 뛰어왔어요."
'이상하다. 그분이 여기 어떻게 오셨을까? 혹시 어마마마가 나의 안위가 걱정되어 보내셨을까? 그렇지 않다면 이곳에 나타날 리가 없을 텐데…….'
공주가 생각에 잠겨있을 때 우렁찬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공주마마, 소장 문안드립니다."
분명 그 무장의 목소리였다. 비록 약간의 시간이 흘렀어도 한양에서 야반도주하던 날 밤에 공주를 업고 걷던 그 무장의 목소리가 분명했다.
"마마, 어서 나가보세요."
세희공주는 그날 밤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내에게 업히면서 세상의 모든 고난을 남자들이 짊어지고 간다고 생각했었다.
'그 만세반석같은 등, 그 무장의 등은 단단하면서도 따뜻했었지. 그때 그 분이 나를 찾아왔다니. 혹시 대궐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 아닐까?'
"공주마마, 소장 공주님께 문안 올립니다."
"공주마마, 어서 나가보시어요. 그 잘생긴 무장이 마마를 애타게 찾잖아요."
'애타게?'
"유모, 잠시만 기다리라고 하세요. 멀리서 오신 손님을 어찌 맨 얼굴로 맞이해요?"
"네에. 얼른 준비하시고 나오세요. 쇤네가 나가서 무장님에게 그리 전할게요."
공주는 야반도주할 때 공주들이 평상시에 입는 옷가지를 가지고 나왔다. 비록 사찰의 요사채에 은거하고 있는 몸이지만 한양에서 온 무장에게 화사한 모습을 보이고 싶었다.
'아, 궁궐에 있을 때 보다 많이 야윈 것 같기도 하고, 얼굴에 수심이 쌓인 것 같은데 혹시 무장이 나를 보고 실망하지 않을까?'
경대를 보며 곱게 단장을 하던 세희공주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이리저리 보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단장을 마친 공주가 밖으로 나오자 무장과 긴 칼을 찬 수행원들이 공손히 허리를 굽히고 공주에게 예의를 차렸다. 곁에 있던 유모는 약간 흥분한 듯 얼굴이 상기 된 채 공주와 무사들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여러 명의 스님들이 좀처럼 보기 힘든 광경을 숨을 죽여 가며 바라보고 있었다.
"소장, 공주마마를 뵈옵니다. 그동안 옥체 무강하셨나이까?"
엷은 녹색당의에 붉은 치마를 받쳐 입고 긴 비녀를 꽂은 공주의 모습은 막 아침이슬을 맞고 피어나는 모란꽃 같았다. 도톰하고 윤기 흐르는 입술 사이에서 금방이라도 백옥구슬이 떨어질 것만 같았다. 공주의 뺨이 칠월의 복숭아 보다 발가스름했다. 공주가 섬돌 아래로 내려오자 젊은 무장은 큰 소리로 외쳤다.
"소신, 중전마마의 명을 받고 공주마마의 안위가 걱정되어 왔습니다. 공주마마, 그동안 얼마나 고초가 크시었습니까? 소장의 불충을 용서하여 주소서."
젊은 무장은 공주를 동학사까지 모시지 못한 것에 대하여 송구스러워했다.
"무장님, 일어나세요. 먼 길 오시느라 얼마나 고생하시었습니까?"
세희공주가 합장으로 무장일행을 맞았다.
"황공하옵니다. 공주마마."
"무장께서는 안으로 드세요. 여기는 이목(異目)이 많습니다."
"신, 내금위(內禁衛)소속 위장(衛將) 박경언 공주마마께 다시 인사 올립니다."
요사채로 든 무장은 다시 한 번 공주에게 공손히 예를 올렸다. 붉은색 철릭에 검정색 전립(戰笠)을 쓴 의젓한 모습에서 공주는 든든함을 느꼈다. 예의를 마친 무장이 꿇어앉자 공주는 무장의 얼굴을 자세히 보고 싶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