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도망길에 오르다
"위장님께서는 바로 앉으세요. 나는 더 이상 공주가 아닌걸요. 편히 앉으세요."
"마마, 소신이 어찌 감히……."
"괜찮아요. 편히 앉으세요."
"공주마마, 황송하옵니다."
세희공주의 권유에 박경언은 할 수 없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앉기는 했지만 좌불안석이었다. 상감의 적장녀(嫡長女)로 비록 상감의 눈 밖에 난 상태지만 감히 조선의 공주 앞에서 자세를 흩트릴 수 없었다. 공주는 종이품의 무관인 박경언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공주와 시선이 마주치자 박경언은 얼른 고개를 숙였다.
"괜찮아요. 그냥 편히 자세를 취하세요."
"공주마마, 소, 송구하옵니다."
"물론 어마마마께서 보내셨을 테지요? 내가 야반도주하던 날 정말로 위장께서 고생하셨어요. 그 빗속에 쪽배를 타고 되돌아가는 위장님의 무사귀환을 위하여 부처님께 기도를 드렸답니다. 그 기도 소리를 부처님께서 들으신 것 같습니다."
세희공주의 말에 박경언은 가슴이 뭉클했다. 박경언도 천둥번개가 치는 강을 건너면서 공주의 안위를 걱정했었다.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 같았던 공주를 가까이서 대면하게 되자 박경언은 감개무량했다.
"위장님, 아바마마와 어마마마께서는 옥체 무강하신지요? 또한, 내가 야반도주하고 난 뒤 대궐의 일이 궁금합니다. 요즘의 대궐 일에 대하여 소상히 말씀해 주세요."
박경언은 그간의 대궐 사정과 상감 부부의 근황을 고한 뒤 품속에서 편지를 꺼냈다.
"공주마마, 중전마마의 서찰입니다."
중전 윤씨의 편지를 받아든 세희공주는 조심스럽게 서신을 읽어내려 갔다. 어머니의 서신을 읽는 그녀의 가슴이 두방망이질했다. 공주의 얼굴에 세상의 온갖 고뇌가 그려졌다 사라지고 있었다. 그녀는 읽다가 길게 한숨을 쉬다가 잠시 천정을 올려다 보기도 했다. 어머니의 서신을 다 읽은 공주는 자리에서 일어나 북녘을 향해 절을 올렸다. 절을 마친 공주의 두뺨에 눈물이 방울방울 맺혔다.
"어마마마……."
세희공주의 흐느끼는 소리가 밖으로 흘러나가고 있었다. 유모는 공주의 흐느끼는 소리에 바짝 신경을 곤두세우며 문 앞으로 한 발짝 더 다가갔다.
"공주마마, 고정하시옵소서. 옥체 상할까 걱정되옵니다."
"위장님, 아바마마께서 나를 선원록(璿源錄)에서 삭제하였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공주마마, 황공하옵니다."
"사실이구려. 아바마마께서 나 같은 불효막심한 여식은 인정하지 않으시겠다는 말씀이지요?"
"마마, 송구하여이다."
'아아, 아바마마께서 그리도 나를 미워하셨단 말인가? 아무리 자식이 잘못을 하였다고 하나 어찌 조선 왕실족보에서 조차 나의 존재를 지워버릴 수가 있단 말인가? 어찌.‘
흑-.
세희공주는 방바닥에 엎드려 통곡하며 눈물을 쏟아냈다. 아버지의 처사가 여린 공주의 가슴에 못을 박았다. 공주는 아버지에게 직언을 하던 그날 밤을 떠올렸다. 그녀는 아무리 생각하여도 자신은 아버지에게 잘못이 없다고 판단했다. 오히려 아버지의 그릇 된 행동을 부추기거나 은근히 방조한 아버지의 측근들이 얄미웠다. 한참을 울고 난 공주에게 박경언은 중전 윤씨가 보낸 물건을 공주 앞에 내놓았다.
"위장님, 이것이 다 무엇인지요?"
"소신도, 그 상자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 수 가 없습니다. 공주마마께서 평소에 애지중지하시던 물건인 듯하옵니다.
'내가 애지중지하던 물건?'
공주가 비단보자기에 쌓인 상자를 풀자, 금은보화와 패물 그리고 불경이 쏟아져 나왔다. 관세음보살보문품원경과 아미타경 그리고 지장경 등이었다. 불심이 돈독한 공주는 불경을 보자 합장을 하였다.
"나무 아미타불!"
"마마, 중전마마께서 보낸 나머지 물건은 유모에게 건넸습니다. 소장은 바로 한양으로 떠나야 하옵니다. 중전마마께 올릴 서찰을 적어 주소서."
"아닙니다. 위장께서 보신 그대로 어마마마께 전해드리세요. 소녀는 건강하고 아무 불편함 없이 이곳에서 잘 지내고 있다고 말씀하세요. 전 이제 조선의 공주가 아닙니다. 아바마마께서 저를 왕실족보에서 삭제한 마당에 어찌 왕손의 핏줄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위장께서 보고들은 바를 한 치의 어긋남 없이 어마마마께 고해주세요."
"공주마마."
"……."
박경언이 공주와 함께 한 식경 정도 요사채에 들어 있을 무렵 아침 일찍 동학사를 떠나 이 산 저 산을 방황하던 청년은 이상한 느낌이 들어 다시 동학사로 돌아왔다. 그는 세희공주가 머무는 요사채를 향해가던 중에 요사채 밖에 대기 중이던 군사들을 보고 크게 놀랬다.
"아니, 구, 군사들이 여인이 머무는 방 앞에?"
청년은 군사들이 이상한 소문을 듣고 자신을 잡으러 온 것으로 판단했다.
'이대로 이곳을 떠나는 거야. 그 여인이 나와 숙연의 연을 맺은 여인인 줄 알았더니, 나를 잡기 위하여 파견 된 관아의 기녀(妓女)이거나 관헌들의 식솔이 틀림없어. 괘씸한지고! 도대체 여인들은 믿을 수가 있어야지.'
청년은 어젯밤에는 공주가 자신에게 헌신하다가 죽은 여인과 똑같아 새로운 만남에 많은 기대를 했었다. 청년이 실망의 빛을 감추지 못하고 막 요사채를 떠나려고 할 때 공주가 기거하는 방문이 열리면서 곱게 단장한 공주와 박경언이 밖으로 나왔다.
'저 여인이 입은 옷은 왕실사람들이 입는 옷이 분명한데. 어찌, 저 여인이 저런 옷을 입고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저 여인이 왕실의 사람이 분명할 터.'
청년의 가슴은 뛰기 시작했다. 주지 스님의 말 대로 자신과 끈끈한 인연을 맺고 있는 여인이라고 생각했지만, 철릭을 입은 늠름한 박경언이 공주와 방에서 나오자 청년의 가슴은 무너져 내렸다.
'도망가는 거야. 멀리 도망가서 다른 삶을 찾아야지. 내가 괜한 기대를 했어. 저 여인은 나하고 어울리지 않아. 저 여인에게 다가갔다가 나의 신분이 밝혀지면 나는 그날로 죽은 목숨이다.'
청년은 그길로 동학사를 떠나 정처 없는 유랑의 길에 올랐다. 동학사를 떠난 청년은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 무작정 떠나기는 했지만 수중에 돈 한 푼 없는 거지나 마찬가지였다. 낮이면 폐가나 산속에 몸을 숨기고 밤이면 길을 걸었다. 남도를 향해 걷던 청년은 유점사에서 알게 되어 자신과 마지막 밤을 보내고 자결한 여인이 궁금했다. 도망치듯 떠난 뒤 늘 마음이 편치 못했다.
여인의 무덤을 찾아 영혼을 달래주고 싶었다. 안성과 여주, 원주를 지나 강릉을 거쳐 한 달 만에 자신에게 헌신적으로 잘해주었던 여인의 집을 찾았다. 막 가을에 접어든 때라 온 산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여인의 저택에 도착했을 때 이미 해는 넘어가고 서녘 하늘에 초승달이 나와 있었다. 집은 문이 굳게 닫혀있었다.
“계세요.”
“계세요. 지나가는 나그네 입니다.”
“계세요.”
아무리 대문을 두드려도 집안으로부터 아무 인기척이 없었다. 문틈으로 보니 집안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다시 한 번 문을 두드려 보았지만 아무 기척이 없었다. 청년이 발길을 돌리려 할 때 대문이 삐걱 소리를 내며 스르르 열렸다.
갑자기 찬바람이 훅하고 불더니 청년을 대문 안으로 밀어 넣었다. 대청과 앞마당이 깨끗하게 청소된 것으로 보아 사람이 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청년은 마치 귀신에 홀린 듯 자신도 모르게 대청에 올라서 안방으로 들어갔다.
헉-.
청년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죽은 줄 알았던 여인이 백설보다 흰 소복을 하고 단정하게 앉아 있다가 청년이 방안에 들어서자 일어나더니 그에게 큰 절을 올렸다. 청년은 등골에 한기를 느끼며 주저앉았다. 그는 자신의 허벅지를 힘껏 꼬집어보았다. 허벅지에서 통증이 전해졌다. 그래도 청년은 이 상황을 믿을 수 없어 혀를 깨물었다. 역시 혀에서 아릿한 맛과 함께 통증이 전해졌다.
“서방님, 어서 오세요. 기다리고 있었나이다.”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소녀, 아직도 이승을 떠나지 못하고 구천을 헤매고 있나이다.”
“아, 아니 그럼. 그대는 이승의 사람이 아닌 귀신이란 말이요?”
“소녀, 서방님이 야속하게 떠나가신 후 차마 이곳을 떠나지 못하고 언젠가 서방님께서 다시 찾아오시기를 손꼽아 기다렸나이다. 이제야 소녀의 소망이 이루어 졌습니다.”
“미안하오. 나는 한양에 부모님과 형제들이 계시기 때문에 내 그대의 소원을 들어주지 못하였소. 정말로 미안하오. 무정한 나를 용서하시오.”
“소녀는 그때 이미 서방님의 앞일을 알고 있었나이다.”
“뭐라고요? 내 장래를 알고 있었다니? 그게 무슨 말이오?”
여인은 점점 알 수 없는 이야기로 청년의 총기를 흐리게 하였다.
“서방님이 한양에 가시면 목숨을 잃을 수 있기에 소녀는 서방님과 이곳에서 한 백년 살기를 애원하였습니다. 그러나 서방님은 소녀의 청을 거절하셨나이다. 소녀는 서방님의 이승 배필 중 한 사람입니다.”
“이승 배필 중 한 사람?”
“네에. 그러하옵니다. 이승에 서방님과 숙연(宿緣)이 닿는 사람이 소녀 말고 또 한 여인이 있습니다.”
청년은 여인의 수수께기 같은 이야기에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닐까하고 무릎을 재차 꼬집어보았지만 통증만 전해질 뿐이었다. 앞에 앉아 있는 여인은 저승에 들어 있는 여인이 분명했다. 그런데 자신이 귀신과 마주하고 앉아있었지만 전혀 무섭거나 두려운 생각이 들지 않았다. 황촛불 아래 다소곳하게 고개 숙인 여인의 모습은 예전과 다르지 않았다.
“그대는 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오?”
“서방님께서 소녀의 간청을 들어주지 않으시고 한양으로 떠나신다고 하기에 소녀 죽음으로 서방님의 발길을 붙잡고 싶었습니다. 귀신이 되어서라도 서방님의 길을 막고 싶었습니다. 서방님께서 한양에 가시면 죽임을 당하실 것이 뻔했기 때문입니다.”
“그럼, 그대는 내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형제자매들이 몰살당할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단 말이오?”
청년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여인이 목숨을 버려가며 자신을 살려주었다는 결론에 이르자 청년은 벌떡 일어나 여인에게 절을 하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