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하정인(10)

여귀일몽(女鬼一夢)

by 최재효











여귀일몽(女鬼一夢)








“소녀의 아버지는 서방님의 할아버님 밑에서 오랫동안 무장으로 있으면서 여진족과 싸우셨던 분입니다.”


“할아버님 밑에서 무장으로?”



청년은 더욱 미궁에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무엇이 어찌된 일이며 어디서부터 실마리를 풀어야 할지 난감했다. 할아버지 밑에서 일했던 무장의 딸 이라면 이미 인연은 선대(先代)에서 부터 이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로다. 그렇다면 내가 잠시 이곳에 기거할 때 왜 그런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단 말인가? 정말 묘한 일이로다.’



“아버님께서는 늘 서방님의 가족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김종서 대감은 조선을 떠받치는 기둥이셨으며, 그 분이 없는 조선은 생각할 수 없다고 하셨나이다. 소녀는 어려서 부터 아버님으로부터 서방님의 가문에 대하여 수 없이 이야기를 들어왔고 또한 서방님에 대하여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나이다.


그러나 소녀 역시 마음에 없는 분과 혼인을 하였고 낭군은 몇 해 전 역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며 얼마 후 아버님마저 세상을 버리셨습니다. 서방님께서 유점사에서 공부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소녀는 서방님께 정성을 다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혼인을 했던 몸으로 차마 서방님에게 소녀의 배필이 되어 달라고 하기에는 너무 현실의 벽이 높았고 염치가 없었습니다. 소녀는 이승에서의 못 다한 서방님과의 인연을 내생(來生)에서 잇고 싶습니다."



여인은 말을 마치자 어깨를 들썩이며 가늘게 흐느꼈다.



‘아아, 할아버님 이야기를 여기서 저승의 여인에게서 듣다니......’



여인은 일어나더니 주안상을 들고 들어왔다. 소반에 정갈하게 차려진 술과 음식들이 여러 날 굶다시피 한 청년의 허기를 채워 주기에 충분해 보였다. 그제야 청년의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렸다. 여인이 공손히 청년에게 주전자를 들어 술을 따랐다.



“서방님, 드셔요. 합환주 입니다.”


“합환주?”



“오늘밤은 소녀가 정성을 다해 모시겠나이다.”


“아니 되오. 그대는 이승의 사람이 아니거늘 어찌 이승의 사람과 잠자리를 함께할 수 있단 말이오?”



“서방님, 육신은 없으나 마음이 있고, 마음이 있으면 육신 또한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옵니다. 자, 보세요. 서방님께서 그리도 자주 사랑해주셨던 소녀이옵니다.“



여인은 일어나더니 겉저고리 벗고 치마끈을 풀었다. 여인은 마치 첫날밤을 준비한 신부 같았다. 술 몇 잔과 여인의 모습에 청년은 몽롱한 기분에 젖었다. 그는 기분이 좋아지면서 마치 구름 위에 뜬 느낌이 들었다. 다리를 수도 없이 꼬집어보았지만 그때마다 통증이 전해졌다. 한 잔, 두 잔 계속 따라주는 여인의 술잔에 청년은 그만 세상의 일을 잊고 달콤함에 빠져들었다. 이제는 자신이 술에 취한 것인지 세상이 취한 것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오오, 그렇구려. 내가 유점사에서 과거 공부 할 때 자주 대했던 육덕이구려. 이제라도 그대와 함께하고 싶소. 그때는 정말로 내 미안했소. 이제 우리 천년만년 살고지고. 천년만년…….”

청년이 여인을 끌어 안았다.



“서방님, 소녀 오늘밤만 서방님을 모셔야 하옵니다. 이 밤이 지나면 소녀는 평안한 마음으로 구천을 떠날 수 있을 것 같사옵니다. 이승에서 맺힌 한이 있으면 영혼은 마음 편하게 떠나지 못하고 구천을 헤매게 돤답니다.

소녀 이제 서방님을 뵈옵고 하룻밤 꿈같이 보낼 수 있게 되었사오니 더 이상 이승에 미련이 없사옵니다.”


여인은 일어나 청년에게 절을 하더니 속옷 차림으로 청년에게 안겨왔다. 향긋한 분 내음에 청년은 그만 실신할 지경이었다. 이미 청년의 손길이 여러번 지나갔던 육신이라 여인은 청년의 몸짓에 어색함이 없었다. 황촛불이 바람에 펄럭일 때마다 남녀의 묘한 그림자가 벽에 새겨지고 있었다.



‘얼마 만에 맡아보는 여인의 체취인가? 이것이 정녕 꿈인가 생시인가? 정말로 달콤한 밤이로다.’


여인은 연거푸 청년에게 술잔을 건네고 청년의 품을 파고들었다.



“서방님, 이 밤을, 이 밤을 애타게 기다렸나이다. 내일 아침 해가 밝거든 소녀를 잊고 다시 동학사로 돌아가소서.”


“그대는 내가 동학사에서 오는 것을 어떻게 알았소?”



“이승의 몸이 아닌 소녀가 모르는 일이 어디 있사옵니까? 조금 전에 말씀드리지 않았사옵니까? 이승에는 서방님의 배필이 둘이라고요. 두 사람 중에 소녀는 이미 저승의 몸이 되었고 또 한 사람은 동학사에 있사옵니다. 소녀, 동학사에서 부터 늘 서방님 곁에 있었나이다.”



“동학사에서부터?”


“서방님 동학사 뒤편에서 탑돌이 하시던 날 밤 생각나시옵니까?”



청년은 동학사에서 남매탑을 돌 때 어떤 여인의 뒤를 따라 탑돌이를 할 때를 떠올렸다. 그때 탑돌이를 끝내고 불빛에 얼핏 보았던 여인이 바로 지금 앞에 앉아있는 여인과 같았었다는 사실을 기억을 하고 그만 전율하였다.



‘그 여인이 지금 내 앞에 앉아있는 여인이라니? 아냐 분명 그 여인은 지금 동학사 요사채에 있어. 그 여인은 그 여인이고 지금 내 앞에 있는 여인은 다른 여인이야. 도대체 무엇이 어찌된 것인지 모르겠어.‘

청년은 눈을 감고 세희공주를 떠올렸다 눈을 뜨고 앞에 앉아 있는 여인의 얼굴울 자세히 들여다 보았다.



“서방님의 또 다른 배필을 찾아 가소서. 서방님이 동학사 뒤편에서 남매탑을 함께 돌던 그 여인과 서방님은 불구대천철천지원수 지간이옵니다. 그러나 원수이면서 떨어질 수 없는 사이기도 합니다.”

여인의 말에 청년은 깜짝 놀랐다.


“그것은 또 무슨 말이오? 철천지원수이면서 떨어질 수 없는 사이라니?”



“모든 것은 서방님과 그 여인이 함께 살을 맞대고 살면서 풀어야할 난제입니다. 두 분은 인연의 업보에 매어 있습니다. 더 이상 아무 것도 알려고 하지마시고 내일 날이 밝거든 계룡산 동학사로 떠나소서.”



청년은 자신의 목숨을 살리기 위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은 여인이 너무 가엾고 불쌍했다. 그러나 이미 세상 사람이 아닌 여인을 위하여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술기운이 은은히 온 몸에 퍼져 청년은 마치 자신 역시 이승의 사람이 아닌 천상의 사람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오랜만에 안아보는 옛 여인이었다. 보드라운 속살이 청년의 가슴에 닿을 때 청년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서방님, 소녀는 저승에 들더라도 이 마지막 밤을 결코 잊지 못할 겁니다. 서방님과 청실홍실 인연을 엮어 한 세상 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모두 헛된 꿈이 되어버렸나이다. 첫 닭이 울기 전 소녀는 서방님과 운우의 정을 마음껏 나누고 싶나이다. 서방님!"



"미안하오. 내가 그대의 그런 깊은 뜻을 알지 못하고 떠나려했습니다. 먼 훗날 내가 저승에 들면 그대와 이승에서 못 다한 부부의 연을 다시 잇기를 원하오. 정말로 미안하오. 나를 용서하시구려."



황촛불이 아롱거리며 두 육신의 아름다운 춤사위를 밝혀주었다. 여인의 달콤한 혀가 청년의 입안을 휘젓자 청년은 본성을 이기지 못하고 여인의 깊은 속살을 파고들었다.



여인의 긴 신음소리와 청년의 밭은 숨소리가 방안을 가득 채웠다. 여덟폭 병풍 속의 신선들이 두 젊은 육신의 끈적한 몸놀림을 바라보며 배시시 웃고 있었다. 여인이 구름이 되고 비가 되더니 청년은 그 비를 흠뻑 맞고 전율하였다.



청년은 뱀처럼 여인의 풋풋한 육신을 칭칭 감고 뜨거운 입김을 뿜어댔다. 용호상박의 길고 긴 시간이 꿈결처럼 흘러갔다. 황촛불이 거의 제 모습을 잃어 갈 무렵 이었다.



멀리서 새벽닭 우는 소리가 들리자 여인은 촉촉한 나신(裸身)을 일으켜 세웠다. 너무나 아름답고 부드러운 피부였다. 유점사에서 과거 공부할 때 자주 여인의 집에서 운우를 나누었을 때만 해도 청년은 여인의 육신을 바로 보지 못했다. 공부하는 입장에서 여인의 체취를 맡는다는 것에 양심의 가책을 느꼈을 뿐만 아니라, 여인과의 열락에 관하여 큰 호기심도 없었다.



"서방님, 소녀 이제 떠나야 할 시간입니다. 소녀, 미리 저승에 가서 서방님 오실 날 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겠나이다. 서방님……."


여인은 어느새 소복 차림으로 청년에게 공손하게 절을 하였다. 절을 하는 그녀의 양 볼에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미안하오. 정말로 미안하오. 먼 훗날 그대를 만나면 부부의 연을 맺어 천년만년 살겠소."


청년도 눈물을 흘리며 여인을 꼭 안아주었다.



청년이 동학사를 떠나 수 일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자 주지 스님은 걱정이 태산 같았다. 삼세의 숙연이 닿은 여인을 두고 떠난 청년이 모든 사실을 알아버린 것 아닐까하고 주지 스님은 마음이 불안했다. 공주와 청년의 숙연은 양가 부모 사이의 악연으로 말미암은 것이었고, 두 가문의 후세가 정인(情人)이 되어야 풀 수 있는 기막힌 사연을 주지 스님은 알고 있었다.



“청운아, 아직도 그 처사님은 나타나지 않으셨느냐?”


“네에. 스님.”



주지 스님은 청년이 떠나간 뒤 하루 종일 동자를 동학사 입구에 세워놓았다. 보름이 지나고 한 달이 다 지나도록 아무런 소식이 없자. 주지 스님은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자신의 속내를 누구에게도 드러낼 수 없어 그는 속이 까맣게 타들어갔다.



“대자대비하신 부처님, 처사가 다시 돌아오게 해주소서. 낭떠러지나 가시밭길에 들지 않도록 자비를 베푸소서. 처사가 무엇을 보았는지 모르겠으나 단단히 오해를 하고 있는 듯합니다.”



주지 스님은 대웅전에 들어 하루 종일 목탁을 두드리며 부처에게 자비를 구했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한편 세희공주는 바람처럼 사라진 청년이 몹시 궁금했다. 그녀는 화려한 옷을 입지 않고 소박한 법복 차림으로 날마다 불경을 읽고 독경을 하며 청년이 다시 돌아오기만을 염원하였다.



'벌써 한 달이 지났는데 그 분은 정녕 바람처럼 사라진 것인가?'



“아기씨? 요즘 무슨 고민이 그리 많으시기에 얼굴에 수심이 가득한가요?”


“그래? 내 얼굴이 그리 수심이 가득해 보여?”



“네. 마치 먼 길 떠난 서방님을 기다리는 여인같아 보여요.”


“유모. 시집도 안 간 사람에게 무슨 그런 말을…….”



“혹시 그 위장이 보고 싶으셔서 그런 건 아니신지요?”


“위장?”



'유모 말처럼 그 박경언 위장님이 보고 싶은지도 모르지. 아냐. 그렇지 않아. 나는 그분에게 더 관심이 있어. 그 잘 생긴 장부님…….'



"아기씨, 그런데 그 청년 있잖아요?"


유모가 세희공주의 속내를 훤히 알고 있는 듯했다. 세희공주는 '그 청년'이라는 말에 가슴이 뛰면서 탑돌이 하던 밤을 그려보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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