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하정인(12)

임금의 통한(痛恨)

by 최재효












임금의 통한(痛恨)







"스님, 소녀는 지금 정신이 혼란스럽습니다. 제가 얼른 알아 들을 수 있도록 말씀해 주세요."

세희공주의 얼굴이 백짓장으로 변하고 이마에 식은 땀이 송알송알 맺혔다.



"부모 대에서 지은 악연으로 인하여 그 후손들 역시 악연을 맺으며 살아갈 필요는 없습니다. 삼라의 모든 인연 또한 변하게 마련이어서 그 결과는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이옵니다. 오로지 자신들의 행위에 따라 선연이 될 수도 또는 계속해서 악연이 될 수도 있는 것이지요. 아기씨께서는 그 청년이 동학사에 나타나거든 부부의 연을 맺으셔야 하옵니다.



“나무 아미타불"



"제가 그 분과 부, 부부의 연을 맺어야 한다고요?"


세희공주는 스님의 도깨비 같은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주지 스님은 공주가 혼란스러워하자 사미에게 차를 내오도록 했다.



청년이 여인과 열락의 밤을 보내고 잠에서 깼을 때 해는 중천에 떠 있었다. 칼칼한 목을 축이기 위해 자리끼를 찾았지만 그릇은 보이지 않았다. 청년은 간밤의 달콤하고 뜨거웠던 기억을 떠올리며 흡족한 표정을 짓고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주변을 둘러보고 혼비백산 하였다. 자신이 누워있는 곳은 깊은 산속에 다 쓰러져가는 흉가(凶家)였고 곁에는 거의 다 썩은 관이 놓여 있었다.



또한, 자신은 알몸 상태로 하얗게 탈색된 수의(壽衣)를 둘둘 말고 있었다. 몸에는 여기 저기 상처가 나있었다. 누군가 입으로 깨물거나 손톱으로 할퀸 자욱이 선명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청년이 관 속을 들여다보니 색이 바랜 치마 저고리를 걸친 백골이 누워있었다. 백골은 검은 머리만 남아 있을 뿐 머리 뼈와 가슴 뼈 그리고 다리뼈가 하얗다 못해 눈이 부실 정도로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아악-.


청년은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차가운 바람소리만 들려 올 뿐이었다. 가까운 숲속에서 이름 모를 산새가 구슬피 울고 산봉우리 위로 조각 구름이 조용히 남녘을 향해 날고 있었다.



"아! 내가 간밤에 귀신과 사랑 놀음을 하였더란 말이더냐? 내가 마신 술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청년이 정신을 차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관 옆에는 썩은 물이 담긴 그릇들이 흩어져 있었고 역겨운 냄새가 진동했다. 무서움도 잠시 청년은 관 속에 누워있는 백골이 분명 자신을 살리기 위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은 그 여인이 분명하다고 판단했다. 백골에 걸쳐진 옷을 보니 여인이 자신을 만나기 위해 유점사에 올 때 입고 있던 녹색 저고리와 붉은 치마가 분명했다.



아흑-.


청년은 갑자기 오열하기 시작했다. 백골이 되어 무심한 세월 동안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을 여인을 생각하니 울컥 가슴이 아리면서 여인에게 큰 죄를 지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청년은 여인의 백골을 어루만지면서 통곡했다.



“미안하오. 정말로 미안하오. 나를 살리기 위해서 이리 된 것을 나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으니 어떻게 이 죄를 갚아야 할까요?”


여인이 죽고 난 뒤 마을 사람들이 여인을 수습하여 관을 방에서 내오려고 하였으나 내올 수 가 없었다. 아무리 많은 동네 장정들이 달려들어 관을 들려고 해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마을 사람들은 여인의 관을 방 안에 그대로 둔 채 대문을 폐쇄하고 말았다. 마을 사람들이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녀가 한양 도령과 정분이 났던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매정하게 떠난 한양 도령을 원망했다.



여인이 죽은 뒤 동네 사람들은 밤마다 귀신이 나온다고 하여 하나 둘 동네를 떠났고 지금은 마을 전체가 폐허가 되다 시피 했다. 청년은 여인의 옷장을 뒤져 깨끗한 옷으로 백골을 덮고 양지바른 곳에 정성을 다해 묻어 주었다.



'동학사로 돌아가는 거야. 그날 밤에 보았던 여인이 또 다른 이승의 배필이라면 나의 배필을 찾아가야지. 간밤에 여인이 현신하여 나에게 나타난 것도 또 다시 나를 살리기 위한 배려일지도 모르지. 어서 이곳을 떠나자. 잘 있어요. 먼 훗날 내가 다시 이곳을 지나거든 그대 묘를 찾겠소.'



청년이 눈물을 뿌리고 여인의 무덤을 막 떠난 뒤 관군들이 유점사 근처에 나타났다. 그들은 절을 비롯하여 인근 마을과 폐가를 샅샅이 뒤지며 수상한 자들을 찾기 위하여 혈안이 되어 있었다. 청년은 다시 동학사를 향해 떠났다. 낮이면 산속이나 음침한 곳에 숨어 잠을 자고 밤을 이용해 이동하였다.



청년이 공주 땅을 밟을 무렵 조정에서 상왕인 노산군을 복위시키고 상감을 죽이려했던 일대 정변이 일어났다. 조선 전체가 다시 살얼음판처럼 꽁꽁 얼어붙어 백성들은 불안에 떨었다. 조정에서는 전국에 군사들을 보내 잡히지 않은 반역의 무리들을 색출하려는 움직임이 불길처럼 일었다. 청년은 계룡산으로 향하던 도중에 정변 소식을 듣고 발길을 다시 남도로 돌려야 했다.



계유정난 이후 정국(政局)은 잠시 조용했다. 그러나 겉으로는 상감에게 머리를 숙였어도 상당수 많은 대신들은 상감에게 반감을 품고 있었다. 상감에게 어쩔 수 없이 옥새를 전달했던 중신은 성삼문이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더 이상 상감의 신하가 아니었다.



성삼문은 집현전에서 동문수학했던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등 뜻이 맞는 동지들을 규합하기 시작하였고, 무인인 유응부도 거사에 합류하기로 했다. 그들은 상왕 복위를 추진하기로 했다. 1456년 6월 창덕궁에서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자리에 예조에서는 별운검(別雲劒)을 세우기로 했다. 별운검에는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成勝)과 유응부가 정해졌다.



상왕 복위를 모의한 주동자들이 직접 상감을 시해할 수 있는 기회를 잡게 된 것이다. 성삼문 등은 이날을 거사일로 잡고 상감과 그의 아들, 상감의 측근들을 제거하기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추진했다. 그런데 갑자기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상감의 최측근인 한명회 등이 연회 장소인 창덕궁 광연전이 좁고, 너무 덥다는 이유로 별운검을 세우지 말고 세자도 오게 하지 말 것을 상감에게 청하자, 상감이 윤허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거사 주모자들 간에 의견이 엇갈리기 시작했다. 유응부 등은 기밀이 누설될 가능성을 염려하면서 계획대로 추진하자고 했고, 성삼문과 박팽년은 ‘별운검을 세우지 않고 세자가 오지 않는 것은 하늘의 뜻이니 거사 날짜를 다시 정하자’고 했다. 결국 거사는 연기되었고 유응부 등의 우려대로 내부의 밀고자가 나타났다.



김질(金礩)이 바로 그 주인공이었다. 거사가 연기되면서 불안해진 김질은 장인인 우찬성 정창손(鄭昌孫)을 찾아가 상왕 복위운동의 전말을 알렸고, 정창손은 그 길로 김질과 궁궐에 달려가 상감에게 고변을 알렸다. 즉시 성삼문 등에 대한 체포령이 떨어졌고 상왕 복위 운동에 참여한 인사들이 줄줄이 압송되었다.



이 변고에서 성삼문(成三問), 하위지(河緯地), 이개(李塏), 유성원(柳誠源), 박팽년(朴彭年), 유응부(兪應孚)등의 충신들과 이들과 연루된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가족 중 남자들은 삼족이 죽임을 당하는 참극이 벌어졌다. 조정에서는 전국 관아에 상왕 복위 운동에 가담했다 용케 도망친 자들과 그들의 친인척들을 색출하라는 엄명을 내렸다.



그런 와중에도 상감은 자신 때문에 자결한 큰딸 세희공주가 불쌍한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부덕을 탓한 딸이기에 미웠지만 또한 혈육이기에 아련한 그리움이 일기도 했다. 어릴 때는 다른 자식들보다 자신에게 귀여움을 많이 받고 자랐고 효성 또한 지극해 세희공주를 애지중지 했다. 그녀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이었기에 상감의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아, 어쩌다 과인이 딸을 죽게 했단 말인가? 훗날 나는 천벌을 받을 것이다. 천벌을…….'


세희공주가 자결한 이후 크게 상심한 상감은 홀로 술잔을 기울이는 룃수가 늘었다. 정국(政局)은 자신이 뜻하는 대로 안정이 되어갔지만, 가슴 한 구석이 텅 빈 것 같았다. 중전 윤씨하고도 그 일이 있고 난 뒤로 관계도 소원해 졌다.



상감이 초저녁부터 마신 술에 불콰해져 후궁인 근빈(謹嬪) 박씨의 처소에 들었다. 근빈을 총애하던 상감은 역모사건이 일어난 뒤에는 자주 근빈을 찾지 않았다. 뜻밖에 상감의 행차에 근빈은 당황하였다. 예전 같으면 상감이 자신의 처소에 든 것이 큰 광영이었으나 오라비인 박팽년이 상감의 손에 처형당한 이후 근빈은 언제 상감의 칼날이 자신을 겨눌지 몰라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자네, 왜 그리 얼굴이 사색이 되어있는가?"


"……."



"어허, 왜 그리 얼굴이 밝지를 못해?"


"사, 상감, 소첩은 상감이 두렵사옵니다."



"지어미가 지아비를 두려워하다니? 그 무슨 해괴한 말이오?"


상감이 근빈의 처소를 찾은 것은 친정 일로 두려움에 떨고 있을 것 같아 그녀를 위로하기 위한 조치였다.



"근빈, 걱정 마오. 자네 오라비는 짐이 아주 아끼고 총애했던 신하였소. 나도 팽년이 그리된 것이 가슴이 아프오. 그러나 근빈에게는 아무해가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마오."



"상감, 고맙사옵니다. 정말로 고맙사옵니다."


"근빈은 과인에게 시집와 덕원군(德源君)과 창원군(昌原君)을 낳지 않았는가? 과인이 어찌 나의 자식을 낳은 지어미를 내 칠 수가 있으리오. 근빈은 아무 걱정 마시오. 난 요즘 자결한 세희공주가 자주 꿈에 나타나 괴로워 밤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소. 간밤에도 세희가 나타나 나를 부덕한 아비라 질타하는 꿈을 꾸었소. 근빈이 보기에도 과인이 그리 부덕한 아비요?"

어느새 상감의 눈굽이 촉촉이 젖어 있었다.



"상감, 부덕한 아비라니요? 상감이 비록 제왕의 운을 타고나 뒤늦게 금상에 오르긴 했어도 자식들에게는 인자하고 후덕한 분이십니다. 세희공주가 요즘 상감의 꿈에 자주 나타난다는 것은 그만큼 상감께서 세희공주를 어여삐 여기신 증거입니다."

근빈이 상감의 아픈 심사를 어루 만져주었다.


"그렇지요? 내가 세희를 어여삐 여겼다는 증거가 맞지요?"



상감은 술잔을 들며 잠시 눈을 감았다. 그는 공주를 자신이 죽인 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죽은 딸을 생각할 수록 상감은 가슴이 아려왔다. 상감은 술에 취하자 참았던 울음을 터트렸다.



"내가, 내가 조금만 참으면 될 것을 그랬나봅니다."

근빈이 손수건으로 상감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남들이 보기에는 상감은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인사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상감, 인명은 재천이라 했사옵니다. 세희공주가 그리 된 것도 모두가 하늘의 뜻입니다. 그러니 너무 가슴 아파하지 마세요. 옥체 상할까 걱정입니다."



"아니오. 나는 훗날 죽어서 지옥에 떨어질 겁니다. 내 손에 죽어간 많은 사람들의 원성(怨聲)에 하루도 편하게 잠을 이룰 수 없어요. 특히, 세희의 울부짖는 소리에 더욱 잠을 잘 수가 없구려."

상감은 이제 대놓고 통곡하였다.



"상감, 그렇게도 세희공주가 불쌍하고 안타깝다면 대궐에 원당(願堂)을 지으시고 공주의 명복을 빌어주세요."



"그리한다고 죽은 세희가 살아 돌아오겠소? 대신들이 나를 뭐라고 하겠소? 역대 조선의 제왕 중에서 나는 딸을 죽인 못된 아비로 낙인이 찍힐 것이오. 그것이 더욱 슬프구려 근빈."


상감은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술에 취해 세희공주를 그리며 장시간 통곡하였다. 최근 들어 자주 가려움증으로 탕약을 든 탓인지 상감의 심신은 예전에 비해 크게 쇠약해져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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