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이싱(Pricing)을 통해 본 가격의 현재와 미래
일반적으로 프라이싱(Pricing)이라 함은 '가격을 책정하는 행위'를 뜻합니다. 전통적인 의미의 가격은 '재화, 즉 물건, 용역, 자산 등의 금전적 가치'로, 요즘은 보통 제품의 가격으로 '소비자가 어떤 제품 한 단위를 구매하기 위해서 지불해야 하는 화폐의 양'으로 정의됩니다.
이렇듯 가격은 추상적인 가치이며 실제로 재화의 교환은 화폐를 매개로 이루어지므로 가격의 역사는 곧 화폐의 역사입니다. 화폐가 생기기 전 사람들은 직접 물건을 생산하여 사용하거나 남은 물건을 자신이 필요로 하는 다른 물건과 교환했습니다. 최초의 경제 사회 형태인 물물교환 경제 사회에서 경제 사회 규모가 커지면서 사회 구성권들 대다수가 공통적으로 중요하게 여기는 물건이 생기게 됩니다. 이 물건이 자연스럽게 다른 물건의 가치를 측정하는 기준점 역할을 하는 최초의 화폐, 상품 화폐입니다. 농기구를 만드는데 필수적인 금속, 옷을 만드는데 필요한 옷감 및 식량 등이 최초의 상품 화폐입니다. 이후 금속 중에서도 그 가치가 높았던 금, 은을 보관하기 쉽게 주화의 형태로 만든 금속 화폐가 널리 통용됩니다. 이런 실물 화폐는 문제점이 많았는데요. 교환 외 직접 사용이 가능하기 때문에 부정한 방법으로 만들어 유통시키거나 보관을 할 뿐 잘 통용되지 않은 등 다양한 부작용을 양산하였습니다. 이에 국가에서 가치를 보증하는 지폐, 수표, 어음 등 태환 화폐와 신용 화폐가 실물 화폐를 대체, 현재 보편적인 화폐의 형태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현재 제품은 소비자 간 직접 거래 대신 시장에서 거래됩니다. '제품의 시장 가격'이란 말도 여기에 연원이 있습니다. 그러면 제품의 시장 가격은 누가 정하는 걸까요? 자본주의 경제학에서는 시장의 성격에 따라 가격을 결정하는 자가 달라진다고 얘기합니다. 첫째, 다수의 소비자와 공급자가 존재하는 '완전 경쟁 시장'에서는 수요량과 공급량이 일치하는, 즉, '수요공급의 법칙'에 의해 가격이 시장에서 결정되는데 이 경우 개별 소비자와 공급자 중 누구도 가격을 임의로 정할 수 없습니다. 모두가 정해진 가격을 받아들여야 하는 '가격 수용자(Price taker)'가 되는 셈입니다. 단일 공급자가 시장에 모든 재화를 공급하는 '독점 시장'에서는 양상이 좀 다른데요. 해당 공급자가 제품의 생산량, 공급량 등을 임의로 설정할 수 있는 시장 지배력(Market power)을 가지기 때문에 가격 또한 스스로 결정할 수 있습니다. 즉, '가격 결정자(Price maker)'가 됩니다. 하지만 현대 자본주의로 오면서 양상은 변화하게 됩니다. 제품이 수없이 많아지고 다양해졌으며 유통 구조도 이에 못지않게 복잡해지면서 경쟁 시장이긴 하지만 실제 제품의 가격은 제품을 실제로 생산하여 유통시키는 기업의 몫이 되었습니다. 가격을 어떻게 정하느냐에 따라 기업의 성패가 결정되기도 하므로 기업에게 가격 정하기, 즉, 프라이싱(Pricing)은 매우 중요한 일이 되었습니다.
가격은 이제 제조원가에 이익을 더해 정하는 단순한 방식으로 정해지지 않습니다. 현대의 많은 프라이싱 전문가들이 '소비자가 느끼는 제품의 가치'로 가격을 정의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가치를 어떻게 만들어내고 소통하고 관리하는가 하는 것이 프라이싱에서 매우 중요해졌습니다. 가치를 높게 유지해야 제대로 된 가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죠.
신제품 프라이싱을 할 때는 크게 세 단계를 거치게 됩니다. 첫 번째, 가격 포지셔닝 결정 단계입니다. 제품 포지셔닝에 따른 가격의 포지셔닝을 결정하는 즉, 고가 전략과 저가전략 중 하나를 우선 선택합니다. 그다음이 실제 제품의 가격을 결정하는 프라이싱입니다. 다양한 방법을 사용해서 제대로 된 가치를 가격으로 정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시장에 제품이 출시된 후 시장의 피드백에 반응, 기본 가격에 다양한 변주를 가하는 프라이싱 다양화 단계입니다. 보통 프라이싱 다양화는 단계는 제품 판매량 증대를 목적으로 합니다.
(1) 가격 포지셔닝 결정
사실 가격 포지셔닝 전략은 어떤 분석을 통한 결과가 아니라 기업의 전적인 전략적 의사 결정입니다. 크게 저가(Mass) 전략과 고가(Premium) 전략으로 나눌 수 있는데요. 저가 전략은 가격 경쟁력을 확보, 다량의 제품을 다수에게 판매하여 이익을 높이고자 할 때 사용합니다. 단시간 내 시장 진입 및 확보가 유리한 장점이 있는 반면, 다수의 공급자와 경쟁을 해야 하고 굳어진 저가 이미지로 고가 제품으로 라인업 확장이 어려운 단점이 있습니다. 반면 고가 전략은 품질 경쟁력을 확보, 소량의 제품을 높은 가격에 판매하여 이익을 높이고자 할 때 사용합니다. 경쟁력 확보 시 배타적 시장을 보유할 수 있으나 이러한 시장을 확보하기까지 시간과 돈이 많이 들고 외부 시장 변동성에 영향을 크게 받는 단점이 있습니다.
(2) 프라이싱
제품의 가격 포지셔닝을 정했으면 제품의 판매 가격을 책정해야 합니다. 판매 가격을 책정하는 방법은 기준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자사 내부에 기준점을 둘 경우 제품 원가에 기반해서 판매 가격을 결정하는 '원가 가산 결정법'을 사용하게 되는데요. 단위 매출원가에 판매관리비, 영업이익을 더해 판매 가격을 산정합니다. 데이터에 근거를 두고 있어 일정 부분 이익을 보장한다는 장점이 있지만 소비자 반응을 고려하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더 비싼 가격에 구매할 의향이 있는 소비자들로부터 얻을 수 있는 잠재 이익을 잃음으로써 이익을 극대화할 수 없죠. 다음으로 경쟁사의 가격을 기준으로 삼는 '경쟁사 기준 결정법'입니다. 기존 시장에 있는 경쟁사 제품의 판매 가격을 기준으로 자사 제품의 가격을 결정합니다. 손쉽게 가격 경쟁력까지 확보할 수 있으나 장기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가격 결정력을 가지지 못하는 가격 수용자로 전락할 위험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소비자를 기준으로 하는 '시장 기반 결정법'입니다. 시장 내 다수 소비자들의 제품에 대한 수요곡선을 만들고 이를 자사 공급곡선과 비교, 분석하여 가격을 결정하는 방법입니다. 소비자가 생각하는 제품의 가치를 반영하기 때문에 이익 극대화를 실현할 수 있지만 수요곡선을 만들어내는 과정이 간단치 않습니다.
그럼에도 최근에는 많은 기업이 소비자 반응을 예상, 더 많은 이익을 거둘 수 있는 '시장 기반 결정법'을 사용합니다. 이를 위해 제품을 출시하기 전에 다양한 방법으로 수요 곡선을 얻으려 노력하는데요. 직접 소비자에게 제품 가격을 제시, 구매 의향을 묻기도 하고 제품 가격에 대한 민감도를 파악하기도 합니다. 이 경우 소비자들이 답변을 과장하기도 하고 가격에 영향을 미치는 다른 요인을 고려하지 못하기 때문에 정확한 수요곡선을 얻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 보다 정확한 결과를 얻기 위해 통계 분석법을 사용하는데 '컨조인트 분석(Conjoint analysis)'이 대표적입니다. 자사 제품 및 경쟁사 제품의 가격, 주요 속성들-기능, 디자인 등-을 사전에 선정, 실제 시장 상황과 유사한 구매 상황을 만들고 속성들을 변화시켜가며 어떤 제품을 선택할지를 질문합니다. 결과 분석을 통해 제품 속성을 반영한 가격을 책정할 수 있고 추가적으로 가격 변화에 따른 수요량 변화까지 시뮬레이션할 수 있어 많은 기업들에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어려운 과정을 거쳐 가격을 정했다고 프라이싱이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제품을 출시하기 전에 기본 전략을 잡고 운용하되 출시 후에도 소비자의 반응이나 시장의 변화에 따라 제품의 포지셔닝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지속적으로 가격을 변주해야 합니다. 출시 전 결정해야 하는 프라이싱 전략으로는 시장 침투(Penetration)와 스키밍(Skimming) 전략이 있습니다. 시간 흐름에 따라 제품의 가격을 지속적으로 높이는 것을 시장 침투, 반대로 가격을 낮추는 것을 스키밍이라고 하는데요. 이 같은 출시 전 가격전략은 제품을 안정적으로 시장에 자리 잡게 하거나 브랜드 위상을 확립할 목적으로 사용합니다. 도요타의 경우 미국 자동차 시장에 저가 제품으로 진출한 후 고가 제품 렉서스를 출시할 때 점진적으로 가격을 올리는 시장 침투 전략을 사용했습니다. 반대로 애플은 아이폰 신 모델 출시 때마다 스키밍 전략을 사용하는데 새로운 버전의 모델이 나오기 전 기존 모델의 가격을 최대로 떨어뜨리는 버저닝 전략까지 섞어 사용합니다.
사전 기획이 필요한 시장 침투 및 스키밍 전략 외 제품 출시 후 시장 상황에 반응, 특정 시점에 다양한 가격 정책을 기획하여 대응하기도 하는데요. 더 많은 소비자를 확보하여 제품의 매출을 추가적으로 높이는 것이 목적입니다. '가격 차별화(Price differentiation)'가 대표 격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가격 차별화는 기존 제품에 여러 가지 가격을 책정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 경우 단일 가격으로 인해 발생하는 기대 매출 손실을 만회하여 전체 매출을 늘릴 수 있죠. 가격 차별화는 일반적으로 동일한 제품에 구매 형태 별, 구매 상황 별, 고객 별로 각각 다른 가격을 적용합니다. 먼저 구매 형태 별 가격 차별화에는 두 개 이상의 아이템을 묶어, 묶음 가격을 설정하는 '번들링(Bundling)'이 있습니다. 기본적인 번들링 외 한 제품 내 선택 아이템을 여러 조합으로 묶어 몇 개의 가격대를 설정하는 '옵션 아이템 번들링(Option item bundling)'이 있는데 자동차의 특정 모델 안에 3~4개의 에디션을 두는 경우가 이에 해당합니다. 번들링의 반대 개념, '디-번들링(De-bundling)'도 최근에 많이 사용하는데요. 제품 내 포함되어있던 기본 아이템을 선택 아이템으로 분리, 본 제품에 가격 인하 효과를 가하거나 부가 시장을 창출하고자 할 때 쓰입니다. 랩탑 내 포함되어있던 디스크 드라이브를 별도로 빼내 하나의 제품, ODD로 만들어 새로운 제품 시장을 만들어낸 것이 한 예입니다.
구매 상황 별 가격 차별화는 제품 및 서비스의 형태에 따라 매우 다양합니다. 시간대에 따라 소비자 구매량의 편차가 큰 영화관, 주차장의 경우 구매량이 많은 때와 적은 때의 가격을 각각 달리 가져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같은 제품이라도 구매 상황에 따라 경쟁의 위치 혹은 독점의 위치에 처해지는데 이때도 각각 다른 가격을 설정할 수 있습니다. 같은 음료라도 할인점에서 파는 가격과 호텔 미니바에서 파는 가격의 차이가 큰 경우가 이에 해당하죠. 마지막으로 고객 별 가격 차별화입니다. 인구 통계 및 사회학적 특성에 따라 약자인 어린이, 노인 및 학생에게 낮은 가격을 부여하거나 다수의 고객을 묶어 그룹 가격을 책정하는 경우가 그 예입니다.
서두에서 현재 기업이 가격 결정을 하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복잡한 생산 및 유통 구조에 대한 정보를 기업만이 알고 있는 '정보의 비대칭'이 그 이유입니다. 그러나 IT 기술의 눈부신 발전, 소위 4차 산업 혁명기의 도래로 이런 정보의 비대칭이 급속도로 무너지고 정보 투명성의 시대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제 기업이 더 이상 일방적으로 가격을 정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또한 SNS, 사물 인터넷, 3D 프린팅 등이 보편화됨으로써 생산 원가가 거의 발생하지 않는 제품이 속속 등장하고 있는데요. 이에 제품 소유에 대한 가격이 아니라 제품 사용에 대한 가격 개념이 부상하고 있습니다. 이런 변화에 발맞추어 프라이싱도 점차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장비를 무료로 제공하는 대신 장비 사용량에 따라 비용을 청구하기도 하고 정액권, 연간 할인권의 형태로 제품 단위가 아닌 시간 단위에 대한 권리를 판매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소비자에게 아예 가격 결정권을 양도하기도 합니다. 가격을 기업이 정하지 않고 소비자 집단이 자발적으로 정하게 하는 경우인데요. 최근 소비자들이 직접 에디팅 등 소위 '게이트 키퍼(Gate keeper)' 역할을 하며 출판물 가격을 정하는 것이 한 예입니다.
사회 속에서 소비자이자 생산자로서 살아야 하는 우리 모두 수많은 정보 속에서 필요한 정보를 잘 활용, 제품의 진짜 가치가 무엇인지 파악해야 할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