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시장 플랫폼은 '하이퍼로컬' 이어야 한다.
전통시장 플랫폼은 '하이퍼로컬' 이어야 한다.
서울시는 금년 상반기(3~5월) 동안 3가지 물류 시범사업을 진행한다고 발표했다.
첫 번째는 물류 공동배송망(3월), 두 번째는 전통시장 새벽/당일배송(4월), 마지막으로 시청 내 로봇 택배(5월)가 바로 그것이다.
세 가지 주제 모두 그다지 새로울 것도 없지만, 그간 물류/유통 산업계의 숙제 같았던 내용들이 관(官) 주도 하에 보도된 것을 보니 묘한 기대감이 피어났다.
그중에 나의 관심을 가장 자극시킨 내용은 '전통시장 당일배송'이다. 필자는 '오늘회'와 '배달의민족'을 거쳐 현재는 서비스를 중단했지만, 가장 최근엔 국내 최대 도소매 유통시장인 가락시장을 기반으로 한 농수산품 당일 배송 스타트업의 초기 멤버로 합류하여 운영을 했었다. 노량진과 비마트를 거쳐 가락시장까지 경험을 해본 내게는 관심을 안 가지려야 안 가질 수가 없는 주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난 아직 전통시장에 '배송'이 필요한 구체적인 이유를 찾지 못했다. 현재의 전통시장 플랫폼(배송) 모델은 전통시장만이 줄 수 있는 가치와 대척점에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오늘은 내가 생각하는 전통시장 기반 온라인 커머스의 어려움과 전통시장의 강점을 이야기 해보려 한다.
우선 농수산물 유통을 경험해보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상품의 계량화나 일률화가 어렵다는 점이다. 온라인 커머스 당일 배송의 경우, 예약 주문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주문 상품을 미리 결제하고 배송일자를 지정해 두는 것이다. 여기서 간극은 발생한다.
'예약' 시스템은 물류에선 매우 합리적이지만, 농수산품의 특성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① 농수산물의 심한 가격 변동 폭(경매)
② 상품 퀄리티 유지와 CS의 한계
농수산물은 매일 새벽 경매를 진행한다. 수입 상품의 경우 시세 변동폭이 덜 할 수 있지만, 국내에서 소량 생산되는 농산품의 경우 일별 시세 변동폭이 매우 큰 편이다.
때문에, 출하량 등을 기민하게 파악하여 소비자가(판매가)를 수시로 업데이트해주는 것이 중요하다. 이외에도 구매가를 변동시키는 이유는 매우 다양해서 여러 변수를 꼼꼼히 파악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구매가와 판매가를 유기적으로 연동시키지 못하는 경우, 예상 구매가에 상품을 구입하지 못해 소비자에게 전달을 못하거나, 적정 마진을 벗어나 '비싸게 사서 싸게 파는' 비영리 자선사업 커머스가 될 수도 있다.
대량 구매 및 재고 보관 등을 통해 정가 보장에 대한 메리트를 주는 방법도 있지만, 통상 '시장 = 신선,저렴' 이라는 키워드가 소비자에게 익숙한 점을 고려한다면, 전자의 방안이 전통시장 커머스에 좀 더 적합한 모델이라고 생각된다.
예약 결제는 '나를 믿고 결제해주면 네가 원하는 것을 줄게'라는 암묵적인 약속과도 같다. 때문에 고객은 배송받은 상품이 기대와 다르면 서로의 약속을 깬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를 근거로 전통시장 기반 플랫폼의 CS 대처가 어려운 이유를 두 가지 꼽을 수 있다. 첫 번째는 플랫폼이 판매자가 아니라는 것과 두 번째는 상품, 특히나 농수산물에 대한 고객의 예상 가치는 극히 주관적이라는 것이다.
농축수산품의 경우, 온라인을 이용해 구매한 상품에 보다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는 소비자가 많다. 직접 상품을 보고 결정할 수 없으니, 혹여 판매자가 나에게 조금 안 좋은 상품을 보내주는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 때문이다. 이 부분은 플랫폼과 판매자가 부단한 노력으로 소비자와의 신뢰 관계를 쌓는 것 말고는 해결 방법이 없다. 플랫폼과 판매자는 꾸준한 상품 퀄리티 유지와 CS 발생 시의 신속 정확한 대처 등을 통해 고객과의 신뢰 관계를 쌓을 수 있다.
하지만, 전통시장 상인 분들은 그 자리에서만 수십 년씩 장사를 해오신 소위 '장사의 고수' 분들이 대부분이다. 그만큼 본인 상품에 대한 애정과 프라이드도 많으셔서 상품 CS가 발생하는 경우 원만한 처리가 어려운 경우가 더러 있다.특히나, 현장 거래와 단골 장사를 오래 하신 상인 분들의 경우 CS를 단순히 '불평불만' 정도로 치부하는 경우도 있어 고객의 목소리를 듣고 데이터화 시켜야 하는 플랫폼 입장에서 난처한 경우가 많다.
때문에 단순히 배송 서비스만 붙여 '빠르게, 많이' 판매할 것이 아니라, 시장 상인분들에게도 온라인과 플랫폼 환경에 대한 이해와 교육을 진행하여 건강한 플랫폼이 될 수 있는 기반을 먼저 만들어야 한다.
농축수산물 버티컬 커머스는 이미 많고 다양하다. 그리고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 가락시장 역시 '가락24몰' 이라는 자체 쇼핑몰이 있지만, 타 커머스들과 비교하면 활성도는 적은 편이다. 이유가 뭘까. 아마 차별성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직접 접속을 해봐도 '가락시장' 이라는 네임밸류 외에 단가, 품질, 편의성 어느 하나도 특별한 포인트는 없다.
내가 생각하는 전통시장 플랫폼의 역할은 개별 매장의 매출 신장이 아닌, 플랫폼을 통해 시장으로 사람들이 모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제 시장의 가치는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곳이 아니라, 하나의 경험적 공간으로서 의미가 크다고 생각한다. 개인 간의 대면과 커뮤니케이션이 점차 줄어드는 현대 사회에서 시장은 그 장소에 있는 것만으로 활기가 돌고 에너지가 생기게 만드는 오묘한 힘이 있다.
그래서 전통시장 커머스 플랫폼은 '하이퍼로컬'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 넓고, 더 빠르게'가 아니라 '더 좁고, 더 관계지향적'으로 발전해야 한다. 전통시장 플랫폼의 이용자는 전통시장을 한 번도 안 가본 사람이 아니라, 한 번이라도 가본 사람이 이용할 확률이 훨씬 높다. 때문에 전통시장 플랫폼은 시장의 단순 매출 증진이 아니라, 사람들을 시장으로 끌어들이는 창구로써 존재해야 하며 '배송'은 이를 위한 하나의 기능이어야 한다.
이제는 "전통시장을 살려야 한다." 는 20년도 더 된 캐치프레이즈만 외칠게 아니라, 전통 시장의 현재를 정확히 파악하고 진단해야 한다. 예전과 비교해서 상품의 경쟁력은 떨어졌을지언정, 오히려 전통시장만이 줄 수 있는 경험적 매력은 그 자체로 해자(垓字)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강점을 고객들에게 매력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전통시장 플랫폼이 구축된다면, '배송'이 없더라도 전통시장은 다시 살아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