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소영 Mar 25. 2019

가상현실로의 여행

누구나 현실은 고달프다. 그런 현실을 잠시나마 탈피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내게 왔다. 프랑스라발(Laval)에서 열리는 가상현실 전람회에 가게 된 것이다. 게다가 전 세계 27개국에서 온 전문가 그룹에 속하게 되어 VR(가상현실) 선수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각 나라 대표로 온 그들에 비하면 가상현실에 관한 전문성도 선호도 떨어지는 필자이지만 프랑스 정부의 호의를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문화 대국의 자부심에 비해 이렇다 할 콘텐츠가 없었던 프랑스는 21세기를 맞아 문화 콘텐츠 강국으로의 새로운 도약을 시도하고 있다. 오늘날의 문화 콘텐츠는 기술과 분리되어 생각할 수 없기에 프랑스는 <스테이션F>라 부르는 세계 최대의 스타트업 인큐베이팅 센터를 최근 파리에 오픈하고 기술비자까지 발급하며 전 세계 기술인력들을 흡입하고 있다. 그와 동시에 미술관이나 박물관, 영화와 공연예술 등 문화기관들의 촘촘한 네트웍을 통해 재능 있는 콘텐츠 크리에이터들을 적극 발굴해 가고 있다. 실리콘 벨리가 기술 위주의 생태계라면 프랑스는 기술과 그와 관련된 콘텐츠를 함께 키워가는 생태계를 만들고 있다.


라발이라는 도시는 파리에서 서쪽으로 한시간 반 가량 기차를 타고 간다. 큰 강을 중심으로 펼쳐져 있는 전형적인 중세도시이다. 산업이라곤 낙농업이 좀 있다고 하던가, 도대체 이런 곳에서 유럽에서 가장 큰 가상현실 전시를 한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천 년 가까이 거의 변함이 없었는 듯한 집들과 도로가 있는 라발은 도시 그 자체로 가상현실이었다. 반질반질 달은 바닥 돌들이 이어가는 좁은 골목골목마다 사랑과 미움, 전쟁과 상처, 웃음과 울음이 켜켜이 스며 있었다. 사람들은 가고 없지만 그들이 남긴 수 많은 스토리들이 공중에 둥둥 떠다니는 것 같았다. 


그런데 VR 박람회는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 이 만명 가량의 인파가 몰리는 큰 행사임에도 현수막은 보이지 않고 작은 포스터 몇 개로 길안내 하는 정도이다. 라스베가스 풍의 큰 컨벤션에 익숙한 나는 조용한 외형에 놀랐다. 그러나 한편 ‘라발비츄얼’이라는 앱을 다운받으면 컨벤션 참석자들의 프로필은 물론이고 관심사에 따라 서로를 연결해 주고 미팅 일정까지 조율해 주는 기술적 섬세함이 돋보였다. 우리 일행은 주최측으로부터 근사한 프랑스 정찬을 대접받고 행사장으로 향했다. 일행은 가상현실이나 증강현실 프로덕션을 운영하거나 가상현실 관련 영화제를 조직 운영하는 창작자와 배급자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나처럼 미디어 아트 전문가들도 있었다. 모두를 잇는 공통점은 새로운 영역에 들어가기를 주저하지 않는 크리에이터들이란 점이다.


사실 몰입적인 환경에서 가상의 세계를 체험하는 기술의 시작은 꽤 오래 되었다. 일찍이 1930년대에 비행기 조종사들을 위한 시뮤레이터가 개발된 바 있고, 1950년대 나온 센소라마(Sensorma)는 입체 영상과 함께 청각과 후각까지 개입해 몰입감을 배가했다. 1970년대 이후에는 나사(NASA)등의 연구기관을 중심으로 HMD(Head Mounted Display) 즉 머리에 착용하는 디스플레이가 개발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20Kg가까이 되는 무게였던 HMD가 발전을 거듭해 오늘날 오큘러스나 삼성 오디세이처럼 상용화 단계에 이르렀다. 이제 게임이나 영화는 물론 의료나 교육, 건설 분야와 같은 실용적인 영역에서도 VR의 상용화가 논의되고 있다. 바야흐로 가상현실의 세기를 맞았는가?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VR(가상현실), AR(증강현실), 그리고 MR(복합현실)을 총칭하여 요사이는 XR(확장현실)이라는 용어를 쓴다. 이런 차이점이 있다. VR은 다소 부담스러운 헤드기어를 머리에 쓰고 현실을 완전히 이탈하는 것이고, AR은 현실 공간 위에 가상의 정보를 덧입히는 것이다. 수 년 전 열풍을 일으켰던 포케몬고가 대표적인 AR의 사례이다. 우스꽝스러운 헤드기어를 쓸 필요 없이 핸드폰만 가지고도 쉽게 새로운 현실을 체험할 수 있다. MR은 VR과 AR의 장점들을 잘 섞어 놓은 것으로 최근 마이크로소프트 사가 출시한 홀로렌즈가 대표적인 제품이다. 망막에 직접 상을 맺게 하는 기술로 몰입감을 주면서도 현실과 정보공간 간의 자유로운 연결을 가능케 해 가상현실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다는 평이다.


물론 과대광고인 면이 없지는 않다. 실제로 체험해 본 홀로렌즈는 시야가 좁았고 헤드세트도 생각보다 무거웠다. 기록적인 투자유치로 유명한 매직리프는 유통조차 잘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상공간의 확장과 현실공간과의 연결이 미래의 뚜렷한 추세가 될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 확장과 연결은 인간의 본성이고 기술이 막 따라잡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무엇을 확장하고, 무엇과 무엇을, 어떻게 연결하느냐 인데 여기에 콘텐츠 크리에이터들의 창조성이 요구된다. 말하자면 전혀 새로운 형태의 스토리텔링이 요구되는 것이다.

구석기 시대 동굴 벽화에서도 보듯 인류는 항상 가상세계와 더불어 살아왔다. 그림과 조각, 책, 연극, 영화, 컴퓨터 게임에 이르기까지 매체는 달라도 변화무쌍하고 때로는 혹독한 우주에 대해 어떤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는 살아낼 수 없었던 종이 호모 사피엔스이다. ‘의미 만들기’, 즉, 우리가 ‘문화’라 총칭하는 것이 새로운 기술환경에서 어떻게 꽃을 피울 지 기대해 마지 않는다. 가상현실은 여태까지의 매체와는 전혀 다르게 시간과 공간을 체험하는 새로운 인지와 감각의 장을 열고 있기 때문이다. 지평선이 360도로 펼쳐져 있고, 시간이 공간적으로 줌인 줌아웃 되는 새로운 세상은 열린 가슴과 무한한 호기심, 그리고 당당한 젊음을 기다리고 있다.


작가의 이전글 잿빛 하늘 아래서 미래를 묻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