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역 50일을 앞두고 돌아보는 군생활
군생활 50일을 앞두고 휴가를 나왔다. 50일이면 윤군 규정에서도 소위 '말년'으로 인정해준다는데, 나에게도 말년이 찾아왔다. 어느덧 길고 긴 군생활도 끝나가는 것이다.
군대를 다녀온 모두가 그러겠지만 나 또한 많은 것을 잃었고, 반대로 많은 것을 얻었다. 대표적으로 600일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의 '온전한 자유'를 잃었고, 그에 대한 대가로 독서습관, 끈질김, 새로운 시야와 같은 군대라서, 군대이기 때문에 얻은 것들도 있다.
군대를 다녀온(대체복무 포함) 모든 사람들이 잃는 가치는 크게 차이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600일 +@의 온전한 자유) 내가 군생활을 하면서 얻게 된 것들에 대해 얘기해보고자 한다. 대부분의 남자들이 거쳐가는 군대이지만 개개인이 얻어가는 가치의 크기와 종류는 모두 다를 거라고 확신한다. 내가 알게 되고, 얻게 된 가치들이 가장 뛰어난 것은 아니지만 '인생에서 버려지는 21개월'로 생각했던 기간 동안 뜻밖의 것들을 얻게 되어 이렇게 유쾌한 독백을 남긴다.
군대에 와서 내가 가장 잘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책을 집어 든 것이다. 입대하기 전, 나는 1년에 5권 남짓을 책을 읽는 수준의 독서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자기 전 자발적으로 위인전을 읽던 어릴 적 독서광의 모습은 성인이 되고 나선 찾아볼 수 없었다. 바쁘다는 핑계로 읽지 않다 보니 책에서는 얻을 게 없다고 착각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차라리 책을 볼 바에는 살면서 몸으로 부딪히고 겪어보겠다는 무모한 생각도 했다.
그러던 내가 군대에 와서 무언가에 홀린 듯 책을 집어 들었다.(아마 가장 가까운 곳에서 항상 책 좀 읽으라고 닦달하던 엄마의 잔소리가 효과가 있던 것 같다.) 그렇게 첫 책을 집어 든 이후 나는 20개월 동안 200권이 넘는 책을 읽었다. 인문학, 자기 계발서, 소설, 고전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책을 읽었다. 계산해보면 한 달에 10권, 한 권의 책을 읽는데 3일 정도 걸린 것 같다. 같은 책도 이해가 되지 않으면 혹은 너무 감명 깊게 읽었을 때는 두 번, 세 번 많게는 다섯 번 까지도 읽은 적이 있으니 한 권을 읽는데 걸린 시간은 더 짧았던 것 같다.
단순히 많이 읽기만 한 건 아니다. 이렇게 브런치에 책을 읽고 생각을 공유하기도 하고, 책을 통해 가장 힘든 순간을 견뎌내기도 했고, 새로운 것들을 책을 통해 배우기도 했다. 사실상 군생활을 하면서 얻은 것들의 대부분은 책으로부터 왔다고 할 수 있겠다.
입대하기 전 스스로 생각의 깊이가 부족하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욕심은 많고, 이루고자 하는 것들은 거대한데 내 소프트웨어는 목표에 비해 한참 딸린다고 해야 할까? 어쨌든 많은 결핍을 느꼈다.
사실 군생활을 하면서 책 읽는 것 말고도 많은 것들을 시도해봤다. 프로그래밍도 6개월간 열심히 공부해봤고, 중국어도 동기에게 열심히 배웠다. 둘 다 너무나도 재미있었지만 마음속 깊은 갈증은 해결해주지 못했다. 아마도 '내적가치의 결여'라는 나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주기엔 부족했던 모양이다. 프로그래밍을 잘하고 중국어를 잘하면 겉에서 보이는 나의 가치는 높아 보일 것이다. 그렇지만 나에게 진정으로 부족한 내적가치를 채워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다 때려치웠다. 그리고 독서에만 몰두했다.
군생활과 독서에 몰두한 끝에 둘의 공통점을 전역 50일을 앞두고 찾아냈다.
고진감래
바로 '고진감래'의 가치다.(책을 읽는 과정이 고통스럽다는 건 아니다. 단지 책을 읽는 과정에 비해 그 열매가 너무나도 달고 크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것이다.) YOUTUBE발 인스턴트 음식 같은 영상 콘텐츠에 익숙해져 있던 나에게 2~3시간은 기본으로 걸리는 책은 완독 했을 때의 가치가 너무나도 컸지만, 읽는 과정에서 책에 집중하는 것이 처음엔 꽤나 고역이었다. 이와 비슷하게 전역이라는 그 감격스러운 순간을 위해 600일이 넘는 기간 동안 온전한 자유를 포기해야 한다. 그 자유를 포기하며 낯선 환경에서 600일이라는 시간을 보내다 보면 생각보다 많은 것들을 얻어갈 수 있다. 마치 극도의 규율과 통제 속에서 창의력이 꽃피듯이 규율과 통제 속 환경은 새로운 것들에 대한 시야를, '다름'을 인정하는 태도를, 수확을 위해서는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들에 대해 가르쳐주었다.
사실 나의 군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24살의 늦은 나이에 입대를 했다. 그 때문에 느껴지던 세대차이 때문이었는지, 단순히 내가 군대라는 집단에서 모난 돌이었던지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군생활 동안 동기들과 종종 트러블이 있었다. 이로 인해, 그리고 할 말은 하고 보는 성격 때문에 간부님들에게 자주 불려 다니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전에는 겪어보지 못한 극도의 스트레스와 우울감에 빠진 시기를 겪기도 했다.
또한 사회에 있는 동안 같이 프로젝트를 했던 친한 형들, 친구들은 간절히 원하던 기업에 취업하고, 새로운 프로젝트를 하면서 자신들의 실력과 가치를 높이고, 열정이 넘치는 사람들과 만나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엄청난 경험을 하며 멋있는 것들을 해낼 때 나는 군대에 있다는 사실에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기도 했다. 하고 싶은 것도 많고, 가고 싶은 곳도 많고, 배우고 싶은 것도 많은 나에게 군대라는 곳은 지옥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남들이 앞서 가는 게 얼마나 배 아팠으면 군생활중에 가장 많이 들은 노래가 다이내믹 듀오와 첸의 '기다렸다 가'일까... 이래서 어른들이 철없을 때 군대를 빨리 다녀오라고 말했던 것 같다.)
그러나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할 때, 가고 싶은 곳을 가지 못할 때, 배우고 싶은 것도 배우지 못할 때 비로소 그것들의 진정한 가치를 깨닫게 된다는 점을 얼마 전 알게 됐다. 하고 싶은 대로만 하고, 실패를 겪어보지 못하면 성장할 수 없다. 인생은 허들의 연속이고 나는 이제 고작 몇 개의 허들만 넘었을 뿐이다. 내가 인생의 격언으로 삼는 스티브 잡스의 '여정 자체가 보상이다.'라는 말처럼 지금의 고난과 역경은 결국 더 뛰어난 가치를 담은 '인간 오혜성'을 만들어 낼 거라고 확신한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헤르만 헤세의 책 <데미안> 속 한 구절처럼 나는 알을 깨고 나오기 위해 투쟁해야 한다. 그것이 책 속의 주인공처럼 숭고한 가치와 깨달음을 위함이 아니더라도 결국 나의 인생에서 거쳐야 하는 하나의 여장이라는 점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전역 50일을 앞두고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차분하다. 뒤쳐졌다는 느낌보다는 하나의 수련을 끝마치고 온 수도승의 기분이랄까. 남은 기간 동안 독서에, 새로운 앎에 더욱 열중해야겠다.
나는 지금 알을 깨고 나오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