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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루비 Mar 07. 2024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고통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고통>(마쓰모토 도시히코, 김영현 옮김, 다다서재)   


이 책은 의존증(책에서는 addiction을 ‘의존증’으로 번역하기로 한다) 전문 정신과 의사의 ‘25년간 임상 기록’이면서 저자 자신의 이야기다. 그가 의존증 임상에 빠진 데는 스펙터클한 사춘기 시절도 영향을 미친다.


 ’80년대 전반, 저자가 다니던 공립중학교는 폭력이 일상적이었다. “교실 유리창과 문은 항상 어딘가 부서져 있”고, “화장실에서는 항상 담배와 시너 냄새가” 나던 곳. 애초에 교사들의 심한 체벌이 있었고 폭력서클 멤버가 체벌 교사를 구타하는가 하면 두 세력간 난투극도 왕왕 벌어졌으며... 이 전쟁통에서 저자는 흡연도 시너도 하지 않고 “단 한 번도 따귀를 맞지 않은” 희귀한 학생이었다. 반면 초등학교 시절 친했던 한 친구는 중학교 때 ‘불량학생’으로 변모, 끝내 시너/약물 의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사람은 배신하지만, 약은 배신하지 않아.”
 

친구의 말처럼 사람에게 의존할 수 없어 약물에 의존하는 이들을, 저자는 한참 세월이 흐른 뒤에 치료하게 된다.  


더없이 무거워 보이는 제목이지만, 환자들의 여러 사례와 더불어 글쓴이의 개인사라든가 자신이 실제 중독되었던 것들-‘세가 랠리 챔피언십’ 게임, 카페인(사이펀으로 추출한 커피에서 카페인 알약까지), 중고 알파로메오(이탈리아 차) 개조 등-에 대해 시시콜콜히(뭘 이렇게까지) 밝히며 간간이 유머도 있어 술술 읽힌다.      


“대부분의 환자는 주위의 공갈 협박에 못 이겨서 마지못해 병원을 방문한다. 그래서 초진 환자들은 진료실에서 눈앞의 의사를 저주하듯이 쏘아보거나 고개를 돌려 외면한다.”      


의존증을 진료한다는 것은, 그럼에도 진료실에 온 이유-환자 마음속 한편에 존재하는 ‘이대로는 안 돼’-에 “발을 밀어 넣고 상대방이 문을 열게 하”는, “영업, 아니, 유혹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는 일.


환자들의 여러 사례를 통해 의존증의 이해를 돕고 치료의 어려운 지점, 사회적 편견이나 “안 돼, 절대(だめ、ぜったい)”식 규제의 문제점 등을 토로한다. 인상 깊은 사례가 많은데, 특히 ‘트라우마’에 관한 이야기. 

한 여성 환자는 입원한 지 일주일 뒤 밤마다 극심한 공포에 시달렸는데, 원인은 트라우마(동거 남성의 폭력)였다. “마음의 외딴 방에 동결 보존되어 있던” 고통스러운 기억이 “해동”되어 되살아난 것. 저자는 그를 통해 트라우마가 의존증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며 약물 의존증의 본질은 ‘쾌감’이 아니라 ‘고통’이라는 관점을 얻는다. 쾌감을 잊지 못해서가 아니라, 약물이 고통을 일시적으로 없애주기 때문에 손을 떼지 못한다는. 운 좋게 약물을 끊어도 과식/구토, 자해 행위로 의존증의 대상이 변화하기도 한다.      


“아마도 자해 행위는 ‘아픔으로 아픔을 억제하는’ 행위일 것이다. 트라우마라는 스스로 설명도 제어도 할 수 없는 고통에서 정말 한순간이나마 벗어나기 위해 자해 행위라는 스스로 설명도 제어도 할 수 있는 고통을 이용하는 것이다.”     


여러 약물의 종류와 변천사도 흥미롭다. 특히 2010년대 등장했다는 ‘위험 드러그’. “불법약물의 화학 구조를 아주 조금 바꾼 것으로 불법약물과 같은 약리적 효과를 유지하면서도 법의 규제망을 피하는, 이른바 ‘탈법적’인 약물”이라고. 위험 드러그는 점점 괴물같은 약으로 변해 큰 사회문제를 일으킨다. 위험 드러그의 유행은 일본인의 준법정신 때문이라는, 아이러니한 견해도 제시된다. 


“체포되지 않고 취하고 싶다는 일본인의 집착이랄지 이상한 정열은 굉장해요.” 


어느 날 한 각성제 의존증 환자는 묻는다. 왜 알코올은 괜찮고 각성제는 안 되는가. 심신의 건강과 사회에 가장 해를 끼치는 약물은 알코올인데.      


“이 세상에는 ‘좋은 약물’도 ‘나쁜 약물’도 없으며, 약물의 ‘좋은 사용법’과 ‘나쁜 사용법’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왜 알코올은 괜찮고, 각성제는 안 되는가’라는 그 환자의 질문에 대한 내 나름의 답이다.... 그리고 ‘나쁜 사용법’을 그만두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다른 어려움이나 고민이 있다. 그것이야말로 내가 의사로서 약물 의존증 환자와 계속 마주 앉는 이유다.”      


누구나 어떤 계기로 약물에 탐닉할 수 있지만 의존증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은 대개 상처를 안고 있다. “살아남기 위해 고통이 필요한” 사람이 있는 것이다. 도덕성이나 의지의 문제가 아니며, 처벌보다 섬세한 치료가 필요하다. 약물 자체가 아닌, 그 너머의 ‘사람’을 보아야 한다.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건강하지 않음”은 비단 의존증 환자에게만 필요한 것은 아니다. 저자가 ‘세가 랠리 챔피언십’에 그렇게나 몰두했듯이. 나의 경우 현재는 진한 드립커피, 달달한 것들, 연애예능, 굿즈마스터 게임, 종종 sns, 이따금 알코올... 다들 한두서너 개쯤은 있겠지. 


저자는 “어딕션(의존증)의 반대말은 맨정신이 아니라 커넥션(연결)”이라는 요한 하리의 말을 인용한다. 의존증은 타인에 대한 절망을 드러냄으로써 연결을 갈망하는 처절한 메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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