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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루비 May 12. 2024

나목(裸木)으로부터 삶을 향한 생생한 욕망과 광기

-소설 <나목>(박완서, 세계사)을 읽고

소설 <나목>의 화자는 한국전쟁의 와중, 미군 피엑스에서 근무하는 이십대 여성 ‘경’(李炅)이다. 경은 하루아침에 두 오빠를 잃은 전쟁 유가족이다. 자신의 적극적인 조치가 오빠들을 외려 사지로 몰았다는 아이러니로 고통받는다. 그날의 폭격으로 이지러진 지붕 아래, 무덤 같은 집에서 생의 의지를 잃고 “회색빛 고집”만 남은 엄마와 둘이 살아간다. “고가의 망령에 들려” 어디로도 떠나지 못한 채. 서로의 온기로 지탱하고 함께 피울음을 울어 줄 유일한 육친-사랑하던 엄마의 영혼은 텅 비었다.  

    

“어쩌면 하늘도 무심하시지. 아들들은 몽땅 잡아가시고 계집애만 남겨 놓으셨노.”     


엄마의 뒤틀린 넋두리는 경에게 비수를 박고, 경은 은행나무 밑 ‘노란 융단’에서 뒹굴며 울음을 쏟는다.      


“죽고 싶다. 죽고 싶다. 그렇지만 은행나무는 너무도 곱게 물들었고 하늘은 어쩌면 저렇게 푸르고 이 마당의 공기는 샘물처럼 청량하기만 한 것일까. 살고 싶다. 죽고 싶다. 살고 싶다. 죽고 싶다.”(304)     


전쟁으로 폐허가 된 서울에는 숱한 상흔과 공포가 떠돌지만 피엑스는 전쟁과는 단절된 딴 세계다. 물건을 거래하고 호객을 하고 몸을 파는 이들, 애인에게 러브레터를 쓰고 초상화를 주문하는 미군, 휘황한 쇼윈도, 미제 화장품, 파티, 열망과 쾌락, 애증과 모멸이 부대끼는 곳. 경은 ‘환쟁이’들이 스카프에 초상화를 그려 주는 피엑스 초상화부에서 미군을 호객하는 일을 한다. 화가 옥희도-이미 결혼하여 다섯 아이를 둔-를 만나 사랑에 빠지는가 하면, 전쟁이 남긴 끔찍한 상처에 무시로 몸부림친다. 그 펄떡이는 삶에의 의지와 차라리 죽음에의 갈망이라는 분열이 너무도 생생하게 그려진다. 한국사의 끔찍한 비극-도저히 제정신일 수 없을 참상-을 살아낸, 욕망이 들끓는 20대 여성의 심리가 이토록 생동감 있게 그려지다니. 경은 살고 싶고 사랑하고 싶고 어서 이 두려움과 고통에서 놓여나고 싶고 미치고 싶고 미친 듯이 기쁘고 싶다.   


“서로 용납될 수 없는 이 두 가지 절실한 소망은 항상 내 속에 공존하고, 가끔 회오리바람이 되어 나를 흔들었다. 미구에 나는 동강나버리고 말 것이다. 나는 자신이 동강날 듯한 고통을 실제로 육신의 곳곳에서 느꼈다.”(124)     


“그러나 나는 미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나는 내 속에 감추어진 삶의 기쁨에의 끈질긴 집념을 알고 있다. 그것은 아직도 지치지 않고 깊이 도사려 있으면서 내가 죽지 못해 사는 시늉을 해야 하는 형벌 속에 있다는 것에 아랑곳없이 가끔 나와는 별개의 개체처럼 생동을 시도하는 것이었다.”(182)     


“그러고는(어머니에게 ‘의치’를 끼우게 할 생각을 하고는)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곧이어 살고 싶다로 고쳤다. 죽고 싶다, 살고 싶다. 죽고 싶다. 살고 싶다. 두 상반된 바람이 똑같이 치열해서 어느 쪽으로라도 나를 처리할 수 없다.”(218)     


경은 ‘무서움증’에 서울의 밤 골목을 “돌격하듯이 달음질”치고, 어머니에게서 생기를 되돌리려 발악을 하고, 옥희도를 향한 욕망을 서슴없이 드러내고, 모딜리아니 그림 속 여인 같은 그의 아내에게 패악을 부리고, 다시 그녀에게 달려가 안기고픈 충동을 느끼고, ‘녹색 눈’ 조와 하룻밤을 보내려다 붉은빛 홑청을 보고 오빠들을 떠올리고 만다. ‘살고 싶다’와 ‘죽고 싶다’가 똑같이 치열해 어느 쪽으로든 금세 폭발할 것만 같은, 그 종잡을 수 없는 광포에 읽는 내내 빨려들었다. 


특히 두 장면이 마음에 남는다. 엄마가 오빠들 방에서 “유도복을 품에 품고, 사진을 보며 기타를 튕긴” 흔적을 발견하고는 경이 폭주하자 둘이 처절하게 싸우는 장면.      


“어머니도 지지 않고 덤볐다. 어머니는 이미 그림자가 아니었다. 힘찬 맥박이 뛰는 건강하고 뜨거운 여인이었다./ 드디어 내 팔을 할퀴다시피 매달린 어머니의 손에 기타의 한쪽이 잡혔다. 나도 필사적으로 기타의 대가리를 부둥켜 안고 당기다가 어머니가 힘차게 낚아채는 바람에 방바닥에 동그라졌다. 그래도 나는 놓지 않았다./ 우리 모녀는 기타를 사이에 놓고 미친 듯이 방바닥을 뒹굴고 짐승처럼 씨근대며 자신의 육신을 돌보지 않고 처절한 싸움을 했다./ 한참 만에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빈손으로 물러났다. 이긴 쪽은 어머니였다./ 모처럼 시도해본 과거와의 단절은 이렇게 해서 수포로 돌아갔다.”     


그 뒤 어질러진 물건들은 제자리에 다시 놓이고 둘은 마주 앉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식사를 한다……. 


또 하나는 과거를 회상하는 대목이다. 아버지는 경을 편애했는데, 누가 딸을 편애해 버릇이 없달까 봐 가끔 엄하게 굴었다. 어느 날, 그는 경이 학용품 사고 남은 돈으로 군것질을 했다며 벽장에 가두었다. 경은 무서움을 견디며 차츰 어둠에 익숙해졌고 벽장에 있던 책들에 빠져들었다. 귀가한 어머니는 놀라서 벽장문을 열고 경을 안아 주었다. 경은 “어머니에 대한 대접성으로 앙 하고 울음을 터뜨렸”고, 아버지는 황급히 경에게 (놀란 데 좋은 약이라며) 빨간 가루를 주었다.       


“그 약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를 기억해낼 수는 없어도, 내가 형벌을 받는 동안 조금도 가엾지 않았다는 게 지금도 대견스럽게 회상됐다./ 그렇지 나는 결코 나를 가엾게 내버려둘 수는 없지. 나는 내가 조금씩 소중스러워졌다. 소중한 나를 배고프게 내버려둘 수는 더군다나 없었다. 발딱 일어나 부엌으로 나갔다. 그리고 어머니가 눈치채지 않게 소리를 죽여가며 밥상을 챙겼다.” (185)     


나는 왠지 울컥해졌는데……. 박완서는 ‘작가의 말’에서 그 암담한 시절에 “미치지도, 환장하지도, 술에 취하지도 않고, 화필도 놓지 않고, 가족의 부양도 포기하지 않”은 한 예술가를 증언하고자 <나목>을 썼노라고 밝혔다. 화가 박수근이 그러하였듯이, 박완서 또한 자신을 가여운 채로 내버려두지 않았고, 작품으로써 끝내 ‘나의 나됨’을 증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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