깔끔한 우드척다람쥐 프레드는 공들여 가꾼 굴에서 홀로 지낸다. 그러던 어느 날 어깨가 시려오고, 매일 밤 아내가 시린 어깨를 따뜻하게 해주는 ‘악몽’에 시달린다. 혼자만의 생활이 좋고 아이들은 끔찍하지만, 프레드는 별수 없이 신붓감을 찾아 나선다. 그는 뱀의 도움으로 “미소가 예쁘고” 말이 잘 통하는 피비를 만난다. 운명처럼 피비와 사랑에 빠지고 결혼을 하는데, 문제는 피비가 (그와는 달리) 아이들을 좋아한다는 것.
한편 프레드가 사는 굴에서 얼마쯤 떨어진 곳에 “뚱뚱하고 못생긴 인간” 부부가 산다. 자식은 아홉인데 남편 허블 씨는 몸이 다쳐 더 이상 일을 못할 처지다. 허블 부인은 남편을 대신해 일하러 가고, 허블 씨는 늘 술에 절어 산다. (아빠가 술에 취한 탓에 보통 숫자로 불리는) 여섯, 일곱, 여덟은 무지막지하게 먹어대는 막무가내 막내 아홉을 어느 날 밖(시궁창)에 내다 버린다.
프레드에게는 몹시 불행하게도, 아홉은 하필이면 피비의 눈에 띈다. 피비는 이 덩치 큰 인간 아기를 보살피기로 마음먹고 ‘마거릿’이라는 이름을 지어 준다. 아기 덕분에 프레드가 애지중지 가꾸어 온 깔끔한 보금자리는 순식간에 난리구석으로 변한다. 할 수 없이 셋은 뱀의 권유로 ‘큰 굴’로 이사를 간다(뱀은 냉담한 듯 중요한 순간마다 큰 역할을 한다). 그곳에는 갖가지 사연으로 오게 된 다람쥐, 뱀, 박쥐 부부, 스컹크가 모여 살고 있다. 여기에 피비 언니(싱글맘) 배빗과 세 아이가 집이 물에 잠기는 바람에 이사를 오고, 인기녀 배빗을 흠모하는 수달, 호저, 너구리도 들락거린다.
이런 상황을 읽는 것만으로도 뒷골이 당긴다. (프레드처럼 깔끔하지는 않지만) 나 또한 조용한 공간에서 혼자 있는 걸 좋아하므로. 결혼을 하고 육아를 하면서 나만의 굴- 좁고도 평안한 내 세계는 파사삭 부서졌다. 아기는 내 의지를 사뿐히 짓밟고 늘 예상을 비켜 가는 존재. 혼자 아기를 돌보는 하루가 그토록 지루하고 진땀 나는 시간일 줄은 몰랐다. 요령이 부족한 탓도 있을 테고.
첫애가 다섯 살 때, 공동육아어린이집을 찾아 이사를 갔다. <못된 마거릿>을 읽으며 그 시절을 떠올렸다. 아이가 아니면 만나지 못했을 사람들, 새로운 세상으로 발을 디뎠다. 품앗이를 통해 육아의 수고를 덜었고 꽤 즐거운 순간도 더러 만났다. 물론 관계가 늘 원만할 수는 없다. 아이들은 다 다르고 저마다의 독특함과 사정이 있다. 동구는 온순하지만 직장맘이라 자주 맡겨지고, 동순이는 잘 먹지만 지나치게 활달해 눈을 뗄 수가 없다. 우리의 ‘품’은 평등하지 않고, 오해와 서운함이 쌓이고는 했다.
그 뒤 아이들은 자라고 다시 이사를 했으며, 일상은 고요해졌다. 많은 엄마-아이들과의 유대, 그 복닥거림과 긴장의 시간에서 놓여나 한편으로 홀가분했으나 종종 그 시절이 그리워졌다. 귀엽고 밉살맞은 우리의 ‘마거릿’들을 제 깜냥만큼 먹이고 돌보며 함께 키워낸 시간들. 그 따뜻한 경험으로 나 또한 혼자만의 굴에서 조금은 벗어난 듯하다. 털이 망가지는 게 싫어 부둥켜안지도 않던 프레드가 차츰 변하듯이.
정성껏 돌봐 온 마거릿이 사라진 뒤 피비는 상심에 빠지고, 그런 피비를 보며 프레드는 깊이 감동한다.
-‘정말로 마거릿을 사랑했구나. 그렇게 밉살스러운 아이를 그토록 사랑하다니.’ (151쪽)
-프레드는 변해 있었다. 허물을 벗은 게 뱀이 아니라 프레드인 것 같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매일매일 프레드는 마거릿이 무사할 거라고 위로해 주었다. 그리고 매일매일 피비를 꼭 안아 주었다. 털이 헝클어져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이다. (178쪽)
환대란 타인에게 자리를 주는 행위라던가.* ‘큰 굴’은 절대적 환대가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큰 굴의 ‘가족’은 누가 와도 내치지 않을 뿐 아니라 불평도 생색도 없이 각자 할 만큼을 돕고 나눈다. 게다가 버려진 나약한(비록 덩치는 크지만) 생명을 돌보는 쪽은 인간이 아닌 동물. “날벼락같이 흉측한 인간 아이”, 제 이름도 못 가졌던 아홉은 그들에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거두어진다. 제멋대로 날뛰던 아기는 따뜻한 보살핌으로 쑥쑥 자라고, 환대를 경험한 마거릿은 빛나는 존재로변화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