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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이지 May 21. 2020

나를 보호하는 게 우선이 되길

웹진 취향껏 3호 <자기관리> 개인원고

작년 10월쯤 기침이 시작됐다. 처음엔 단순한 감기인가 싶었다. 환절기마다 감기에 걸리는 건 연례행사였으니까. 병원에 가서 감기약 처방을 받아와 먹었지만 차도는 없었다. 뭐, 죽을병은 아니겠지 싶어 어느 순간부터 약도 먹지 않고 병원도 가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 나아지겠거니 했다.


  

시간이 지나 나아졌냐고? 놀랍게도 기침은 석 달째 멈추지 않았고 설상가상 오른쪽 옆구리에 통증마저 생겼다.`이쪽 폐 아니야? 나 진짜 죽을병이라도 걸린 거면 어떻게 해?` 싶었다. 동네 내과에 가서 정밀 검사를 받았지만 속 시원하게 뭐가 문제인지 듣지 못했다. 첫 출근을 앞두고 눈앞이 막막해졌다. 아픈 건 질색인데, 하지만 아프게 한 게 나인데 누굴 탓할까. 사람은 왜 극한의 상황에 몰려야만 심각성을 깨닫는 걸까. 몸을 뒤척일 때마다, 또는 기침을 할 때마다 생전 처음 느끼는 아픔을 견뎌야 했다.



서울에 진료를 잘 봐주기로 유명하다는 호흡기내과에 진료 예약을 했다. 진료 당일까지 낫지 않으니 미칠 지경이었다. 꽤 북적북적한 병원 안에서 대기하다가 내 이름이 호명되자 진료실에 들어갔다. 의사 선생님 앞에 앉아 애매한 기침을 해대는 나를 안쓰럽게 쳐다보시더니 하는 말은 놀랍게도,



“이제부터 커피나 아이스티는 드시지 마시고, 녹차 같은 차 종류도 마시지 마세요. 삼다수 페트병, 아니면 정수기 물만 먹어야 해요.”



사람은 살아가며 충족해야 할 요건들이 있다. 대게 자신의 행복을 위한 요건들을 떠올릴 텐데, 내 삶의 행복을 위해 포기할 수 없는 한 가지는 바로 아이스티였다. 어릴 적부터 아침잠을 쫓기 위해 커피 한 잔 마시는 습관이 있었는데 카페인이 너무 잘 받는 탓에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후 언젠가부터 아이스티가 커피의 대체품이 되었다. 달달한 설탕 덩어리 음료인 아이스티는 모든 이들의 걱정을 샀다. 그러다 당뇨 걸리면 어쩌려고 그러냐며 가족이고 친구고 거리낌 없이 잔소리했지만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다 내 행복을 위한 건데 뭐.



그런데 뭐? 갑자기 아이스티를 먹지 말라고? 아니, 음료수 말고 맹물만 주구장창 먹으라고? 맹물은 아주 가끔, 커피, 또는 아이스티, 우유 같은 것들은 자주 마셨던 게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아, 내가 누렸던 행복을 더는 누리지 못한다니, 그럼 난 무슨 낙으로 살아!



“알레르기성 기관지염인 것 같으니까 흡입 치료제를 써보도록 하죠. 약도 가장 부작용이 적은 거로 줄게요. 그걸로 한 달만 지켜봅시다.”



생전 처음 흡입 치료제를 처방받았다. 간호사 선생님께서 흡입 치료제 사용 방법을 열심히 설명해주는데, 나는 그 앞에서 `그거 막, 불치병이나 천식 걸린 주인공이 항상 들고 다니는 거 아니야? 나 진짜 그 정도로 아픈 거야? 어머, 나 진짜 심각하게 아픈가 봐.` 같은 생각을 끊임없이 했다. 이렇게 자기 관리가 안 되어 있다니. 내키는 대로 먹고, 제한 없이 밤을 새우고, 아픈 건 참을 때까지 참았던 게 이렇게 큰 한 방으로 돌아올 줄이야.



내가 삐거덕거리며 망가지고 있다는 걸 알아채는 건 뭐랄까, 되게 남 일 같았다. 아, 얘 또 아프네, 아픈데 병원도 안 가네, 또 저렇게 먹고 싶은 거 마음대로 먹고 영양제도 안 챙겨 먹네. 이런 식으로 나를 타자화 시켰다. 부정적이고 관리되지 못한 나는 내가 아닌 듯이 말이다. 그것도 다 나인데, 어쩌다 이 지경까지 오게 된 거지?



시간이 지나 점차 나아지는 걸 보며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그 병원에 갈걸.` 싶다가도 사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애초에 아프기 전에 건강을 챙겼으면 아플 일도 없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 관리라는 게 그렇게 거창한 게 아닌데, 아프기 전에 밥도 영양제도 잘 챙겨 먹고, 아프면 참지 말고 바로 병원에 가서 진료받고 약 처방받고 삼시 세끼마다 꼬박꼬박 약 먹고 일주일에 삼일쯤 운동하는 게 다인데. 그런데 나는 그게 어려워서, 내가 아프고 힘들다는 걸 인정하는 게 어려워서, 당장 내 삶을 송두리째 바꿀 정도로 간절하지 않아서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십 대 중반이 된 이상 올해는 나를 많이 아끼는 삶을 보내야겠다고 다짐했다. 참는 게 당연시되어버린 나는, 누군가가 나보다 먼저 알아봐 주길 바랐던 나는 내 인생에 별 보탬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나를 보호하는 삶이 비로소 행복한 삶을 완성한다는 걸 깨닫게 하는 스물여섯 번째 새해가 찾아왔다. 연말에 후회할 게 산더미겠지만 지금은 새로운 시작이니까, 제대로 살아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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