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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꽃 Jan 13. 2019

한국 갭이어 65번째 갭퍼

고등학교에서 문과와 이과를 정할 때는 친구들을 따라서, 대학교에 입학 할 때 학과는 부모님의 선택으로. 이름만 최현수로, 정작 본인 최현수의 선택 없이 흐르는 대로 흐르다 보니 어느새 본인의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하는 성인, 대학생이 되어있었어요.

정작 홀로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본인 색이 없는 회색인간 같이 말이죠. 그 사이에서 괴리를 느끼고 스트레스와 함께 20살, 위궤양과 함께 대학 1년을 끔찍하게 버텨내고 군 입대를 앞둔 시점.

최현수는 결심해요, 피할 수 없는21개월을 온전히 나의 시기로 채워보자, 주체적으로 나라는 사람으로 살아보자.

그렇게 시작한 나란 사람을 알아가기 위한 첫 단계 ‘메모’ 틈이 날 때 마다, 생각들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 갈 때마다, 무엇인가를 느낄 때 마다 그러한 순간순간을 기록했고, 느낀 점 등을 쉴 새 없이 적었지요.

이에 그치지 않고 Out put이 있으려면 In put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시작한 ‘독서’ 한 권 한 권 읽을 때 마다 인상적인 문구, 느낀 점, 총평을 적는 방법으로 독후감 또한 작성했어요. 그 덕분에 21개월 간 156권이라는 권수가, 3권의 독후감 노트가, 5개의 손 메모장이 채워졌고, 정작 나는 없었던 내 마음 속 저 최현수라는 사람의 고유의 색도 채워지기 시작하는 듯 했어요.

책을 통해 세상을 간접경험 하다 보니 실제로 세상에 나가 책의 배경에도 가보고 싶고 경험을 하고 싶은 욕구가 생기기 시작했고 군에서 전역 후 계획으로 여행을 준비해요 그리곤 생애 첫, 군대 내에서 하나부터 끝까지 준비한 약 2달여 간 중국, 유럽 배낭 여행을 다녀온 후 1학년 때와는 달리, 본인의 색을 가진 모습으로 복학을 할 수 있었죠.

2학년 1학기, 군대에서 수기로 작성한 목표 중 하나 ‘장학금 받기’ 그 목표를 이뤄내기 위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의로서 학업에 임했고 보기 좋게 학기를 마칠 때는 장학생이 되어 “나도 내가 하고자 하는 대로 할 수 있구나” 라는 커다란 자신감을 얻었답니다.

여름방학, 다른 이들은 토익이나 자격증 준비를 할 때 내게 보상을 해주자며 장학금으로 약 3주간 대만 일주를 다녀 옵니다. 그렇게 나로서 잘 채운 후 찾아온 2학기. 1학기는 학점을 채웠으니 2학기는 교내 외 활동과 대외 활동으로 스펙을 쌓자는 생각으로 일정표가 매일매일 꽉꽉 차게 보내는데 당연히 과하게 만든 일정표에 맞춰 생활하다 보니 몸은 몸대로 지쳐가고 자연히 학과 성적 또한 저조 한 결과를 보여주고 말아요.

학업, 대내외 활동 어느 것에도 온전히 집중 할 수 없음에 스트레스를 받아서였을까요. 몸이 내가 나로 살지 않으니 화가 났는지 1학년 때처럼 몸이 장염과 위염으로서 신호를 보냈고 다시 제 색을 잃어간다고 생각 할 때, 그 순간 결심합니다.

이렇게 또 다시 내가 나로 사는 것이 아닌 삶을 살 수는 없다, 사회 알람에 맞춘 대학 졸업장은 당장에 필요 한 게 아니다.

아니 사회 알람에 딱딱 맞추어 졸업 후 직장을 갖고 가정을 가진 후에는 나의 인생 시계를 볼 수 있을까?

이 몸도 마음도 젊을 때 “세상 경험을 통해 견문을 넓히고, 전공공부, 스펙 대신 내 공부를 하자 다채롭게 빛을 내는 최현수로 살자.” 하고 말이죠.





갭이어를 준비하는데 평소와는 달리 더 큰 비용이 필요하다고 생각들을 하죠. 하지만 그런 목돈이 어디서 뿅 하고 나올 리도 없구요. 초등 학생 때 부모님이 네 용돈을 관리하라며 만들어 주신 통장 그 덕이었을까요 그 때부터 백 원 천 원 아껴가며 저축하는 경제 관념이 생겼죠.

학기 중에도 주말 아르바이트를 방학 땐 짧은 시기에 돈을 더 쥐기 위해 공장에서 새벽시간에 일을 하기도 했어요. 이렇게 생활 속에서 절약하고 아끼는 습관이 군대에서까지 이어져 그 적다는 군대 월급도 조금씩 모았구요.

그러나, 그렇게 모았던 돈도 몇 차례의 여행을 거치고 나니 거의 바닥을 보이더군요 결국 부모님께 부탁을, 아니 부모님과 협상을 시도합니다.

휴학 후 돌아오면 2학년 때처럼 장학금을 받을 것이고, 내 손으로 등록금을 내고 학교를 다니겠습니다. 한 학기 등록금 만큼만 빌려 주세요.

그러곤 그 돈을 흥청망청 썼을까요? 결국 부모님한테 받았네 이런 이야기 될까요?

이 것은 돈이 아니라 부모님의 노후이다, 최대한 쓰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출발 전, 도서관에서 캐나다 관련 책들을, 심지어는  컨설팅을 가보기도 하고, 당연히 카페나 블로그 등을 통해 캐나다에 관한 자료들을 모으고 좀 더 나가 일할 때 갖춰야 할 자격증, 조건 등을 조사했어요.

그 덕이었을까요, 도착하자마자 영업장에서 사용 할 수 있는 자격을 취득해 일주일 만에 숙식이 제공되는 호텔에 일을 잡을 수 있었어요.

본인의 의지만 있다면, 생각보다 큰 비용은 들지 않을 수도 있다라는 거,

혹시 모를 사태에 대해 대비는 꼭 해야겠지만, 굳이 잔고에 목매며 갭이어를 늦추는 일을 하는 것 보다는 본인이 할 수 있는 일을 더 집중하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었는데 너무 연연하지 말걸 하는 생각도 해봐요.

그리고! 부모님께 받은 돈은 고스란히 잔고에 있답니다.






휴학 하는 것 자체가 제게는 고되고 힘든 결정이었답니다. 고등학교 때부터 교제를 시작해 군대를 기다려준 6년 된 여자친구, 저를 지지해주던 학과 교수님과의 면담 중 “외화 낭비의 일등공신이 될 것이고, 전공도 영어도 얻지 못할 것” 이라며 혹평을 듣기도 하니까요.

비단, 이것들 뿐이었을까요? 졸업을 앞두고 필드로 나갈 동기 여자학우들과 자격증 준비에 한창인 남자 동기들, 이후 상위 자격증에서 경력이 뒤쳐질 것이라는 선배들의 말, 친척이나 지인들의 시선, 사회적 알람, 한 번 핑계를 대기 시작하면 끝이 없었죠.

시간을, 가치를 잴 수 밖에 없더라구요 뒤쳐지는 건 아닐까 하고 말이죠.

그런데, 작년의 불안이나 걱정거리가 생각 나시나요? 아니 그럼 지난 주의 걱정거리나 불안이 생각 나시나요? 걱정이나 불안은 지나면 생각도 나지 않을 거라고 마주하자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냥 혼자 몰래 가도 될 일을 두려워서 였을까요 어릴 적 혼자 집에 있을 때 TV를 켜놓았던 것 처럼 주변 사람들에게 말하고 다니고, 교수님에게 면담을 요청하기까지 했으니까요.

나 이거 할거야!

라고 말하며 다닌 게 걱정을 덜게 해주었다고 생각해요. 이 덕에 하나 확실하게 경험으로 알게 된 것이 있어요. 무언가 하고 싶으면 주위 사람들에게 말하라 생각보다 언어의 힘은 강하더라구요.

그 힘이, 걱정을 나누는 것이, 마주하는 것이 어느새 머리 속에서 두려움을 생각하지도 못 하게 해줄 것이니까요.






거슬러보면 제가 캐나다 워킹홀리데이를 결정하게 된 것은 '군대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라고 말하곤 해요.

조금 더 나 답게 살아보려고 시도했던 21개월 덕에 여행 관련 서적들을 읽었던 게 시발점이 되어 전역 후 다녀온 외국여행들 이런 경험들을 통해 느낀 세상 경험의 필요성 그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나왔고 그렇게 마주한 캐나다는 제게 기회였고 여유였으며 오아시스였어요.

도착 직후 구직을 준비하며 자격요건을 취득하고 밤새 준비한 인터뷰, 그 덕에 트립어드바이저 1위 호텔에서 바로 숙식을 제공받으며 일을 시작 할 수 있음에 모국어가 아닌 곳에서도 내가 살아 남을 수 있구나 하는 자신감을

한국에서는 반 오십이라며, 군대 다녀 온 아저씨취급을 받는데, 이곳에서 24살이라면 Baby, Super Young 하다며 뭐든 할 수 있을 거라는 사람들

지역 프로그램으로 있는 다양한 수업들도 듣고 액티비티도 다 참여했어요. 영어 수업은 물론 요리수업, 생소한 Zumba, 숨겨진 트레일 코스를 달리거나 세계적 호수에서 스케이팅을 하는 등의 모임 등에 참여하기도 하고 말이죠.

엄격한 분위기가 아니라, 매일 안부인사로 마주하는 직원들과 날씨가 좋으면 그냥 나가 날씨를 즐기는 사람들 그렇게 그 속에 있다 보니 하루하루 가만히 있으면 무엇인가를 해야 할 것 같은 강박이 있던 제게 차츰 진정 여유가 무엇인지를 알려주었죠.

이렇게 짧지만 길었던 벤프에서의 6개월을 보내고 나니 추천서도 받고 세계적 체인의 호텔에 갈 기회가 있었음에도 스펙을 쌓으러 온 게 아니라 나를 위해 왔다는 생각으로 약 2달여간의 미 서부 로드트립을 떠나게 되어요.

쉼표 속에서 쉼표를 또 갖게 되니 무엇인가를 경험할 때 받아드리는 마음이, 시선이 더 깊게 빨아드리는 것 같았달까요. 그렇게 캐나다 서부까지 올라와 학교로, 집으로 돌아간 직장의 친구들도 만나고 캐나다 시작점 벤쿠버와 빅토리아에 들르니 그 때의 걱정은 온데간데 없이 좋은 기억들만 보이더라구요.

그 과정에서는 모를거에요 앞으로의 일이 어떻게 펼쳐 질 지, 하지만 그 결과가 좋으면 그렇게 헤매고 불안하던 시기도 밝게 보이겠죠.

6개월의 일을 하고 2달의 여행을 마치고 나니 제 비자는 얼마 남지 않아 구직하기에 힘들 거라는 주위의 우려들이 있었지만 걱정하지 않았어요, 제가 하기 나름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리고 보기 좋게 이전에 일을 했던 장소인 벤프로 돌아온 당일, 일을 잡을 수 있었어요

마음 가짐이 바뀌니 긍정적 선순환이 일어남을 느낄 수 있는 지난 캐나다에서의 시간이었어요.

앞으로 남은 시간도 긍정적으로 그려지구요.







오자마자 자력으로 일을 구할 수 있었던 것, 벤프지역 신문에 제 사진이 실린 것, 캐나다에서 찍은 사진이 코엑스 전시에 걸린 것, 워킹홀리데이 자료로 한국 공모전에 당선 된 것, 풀코스 마라톤을 달린 것, 외교부 워킹홀리데이 통신원이 된 것, 친구들과 여행을 다녔던 것, 하루하루 즐겁게 채우던 것 이렇게 나열하면 끝도 없을 것 같아요.

그만큼 행복했던 기억들이 많이 있지만 개인적으로 진한 인상이 남아있는 일이 있어요.

미 서부 로드트립 중의 일이었어요. 일정이 정해지지 않았기에 숙소 예약도 없이 해안가 도로를 따라 가는 길이었어요. 해안가 도로를 구경하며 가다가 멈추고 싶은 곳에서 내려 노래하고 돌아다니다 보니 어느새 해는 저물기 시작해 하늘은 어둑어둑 해지기 시작했죠.

다음 도시까지는 꽤나 먼 거리가 남았고, 동선에 있던 모든 캠핑장이 자리가 없어서 자는 건 마다하고 당장 저녁을 해 먹을 장소도 찾을 수가 없던 곤란한 때, 저녁이라도 해결하기 위해 가장 가까운 캠핑장으로 향해요.

이미 깜깜한 밤, 캠핑을 즐기러 온 사람들에게 말을 거는 것 조차 폐가 되는 것 같았지만 구석에서 취사를 할 수 있느냐고 묻기를 수 차례, 다들 본인들의 시간과 공간을 침해하는 게 싫어서 였을까요 아무도 긍정적인 대답을 해주지 않아 거진 포기를 할 때쯤

한 커플이 흔쾌히 자리는 물론, 심지어는 불을 함께 써도 된다고 해주는 거에요!

그렇게 급하게 저녁을 해서 그 커플에게 나누어주고 더 이야기를 진행하니 본인들은 캠핑카에서 잘 예정이니 너희가 우리 자리에 텐트를 치고 자라고 하는 것 있죠.

누군가의 호의 덕에 참 운이 좋았던 일이에요 그런데 여기서 저는 크게 얻어 맞은 것만 같았죠.

 전혀 되지 않을 것 같은 일이더라도, 두드리면 될지도 모르는구나

앞으로 곤란한 일이 생겼을 때에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알게 된 것만 같아 개인적으로 참 행복했던 기억으로 남아있어요, 실제로도 기대하지 못 한 곳에서 좋은 일이 발생해 정말 즐겁게 보내기도 했었구요.

음과 양의 조화처럼(?) 좋았던 기억, 성장의 거름이 되는 기억들만 있던 것은 아녜요.

당연하게 힘들고 고되고 짜증나고 자책하고 하루하루가 불편한 일들도 많았죠. 캐나다 오는 비행기 편이 문제가 생겨 시작부터 곤란했고, 마중 온 여자친구의 얼굴에 출국 자체도 더욱 무겁게 시작했죠.

혹여 걱정을 할까 부모님이나 지인들에게는 혼자 끙끙 앓며 내가 이러려고 타국에 왔는가 싶게 우울했던 적도,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내가 이렇게 까지 해야 할까 하며 서러워했던 밤 들도 없었다고는 말 못하죠.

그 중 힘들었지만 기억 남는 일로 호텔에서 주방 보조로 일할 때의 이야기에요. 메인 레스토랑들의 주방이 아니라 호텔직원 전용 식당의 주방에서 가끔 일을 하게 될 때가 있었어요.

마약 중독에 다혈질이라 다른 주방 직원들도 꺼려하던 직원식당 담당 셰프는 그곳에서 일 할 때 마다 제 일을 간섭은 기본, 자존감을 바닥으로 떨어뜨리게 면박을 주고 하는 일을 더 복잡하게 만들기 일쑤였지요.

그러곤 어느 날 직원식당 주방 보조가 일을 그만 두게 되고 그 공석에 제가 들어가게 되었어요. 정말 끔찍했죠 그렇게 일하는 환경도 분위기도 불편하게 하루하루 보내다 보니 대학 시절 때 위궤양 증상이 느껴지는 것 같았어요.

주방보조들에게 함부로 하는 사실을 아는 부서 매니저가 그 셰프를 징계까지 받게 했지만 소용 없었어요. 그리곤 생각이 바뀌었죠, 극복하지 못할 것만 같았던 문제로 여기던 그를 친구로 만들어보자는 생각이 들었어요.

여기가 군대도 아니고 캐나다에 와서도 한국식 일처리에 머물러서 왜 내가 사람에게 스트레스를 받아야 하지? 싶었거든요 하나의 성장과제라고 여겼어요.

그러곤 그를 더 반갑게 맞이했고 소소한 이야기도 계속 걸고, 일도 더욱 열심히 했죠. 그리고 하나 하나 이유를 물어봤어요 “니가 원하는 스타일로 하면 더 편하니?” 서로 조율도 하고 조금 손해 보는 것이 결국에는 내가 얻는 것이 많은 것이다 하며 일 하다 보니 일 때문에 스트레스 받는 경우가 줄어들기 시작했고 이 후 매니저와 면담 중 알게 된 사실로 그 친구가 저를 크게 칭찬했었다고 하더라구요.

미국 여행을 앞두고 일을 그만 둘 때에는 진심으로 서로를 위하는 인사를 남겼죠.

군대에서도, 대학생활에서도, 어디서든 사람과의 관계가 힘든 일 중에 하나였고 앞으로도 그럴 것 이라고 생각해요. 또한 사람간의 문제이기에 언제나 또 해결의 여지가 있음을 안 생 경험이기도 하구요.








지금까지 약 1년, 흔히들 말해요 눈 깜짝 할 시간이라고 그만큼 ‘엄청 크게 변했다!’ 랄 것은 없어요. 하지만, 이 1년은 제가 제 손으로 꽉꽉 채운 시간이었기에 내부에서는 적지 않은 변화를 일으켰답니다!

갭이어를 보내기 전, 꽉꽉 채웠던 일정들과 그 사이 빈 시간이 주어지면 무엇을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차서 제 시간을 제 시간으로 보낼 수 없었어요. 심지어 주말에 침대에 누워있는 시간 조차도 맘 편히 쉴 수가 없었죠 생각해보면 참 부끄럽고 바보 같은 일이었죠 강박에 사로잡혀서 말에요.

그런데 이 갭이어를 보내는 동안 이전에는 지나쳤을 것들, 따사한 햇빛을 받을 줄 알며, 매일 매일 있는 석양을 반기며 하루하루를 감사할 줄 아는 시간으로 채우다 보니 절로 한국에서 치열하게 달리기 위해 씌워진 경주마 가리개가 조금은 벗겨진 것 같아요.

평소 나는 자존감이 높다, 크다고 말하곤 했는데, 갭이어 기간 동안 하나하나 자력으로 준비하고 그것들을 성취하며, 묻는 것에 부끄러워하지 않고 되지 않을 것 같아도 두드려보는 최현수가 되면서 이전의 허수아비처럼 말로만 세워 둔 자신감이 아니라 정말 저 최현수를 믿는 자신감을 얻기도 했고요.

결정적으로, 제 전공이 소방안전공학과인데 호텔에서 일하면서 비상사고가 났을 때 안전관리가 철저하게 이뤄지는 걸 보고 한국에서도 호텔과 같이 사람을 많이 수용하고 내부 시설이 많은 특수건물에 안전관리 전문직으로 일하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전공에 관한 관심이 깊어지기도 하고

캐나다 역사는 우리나라보다 한참 짧지만 박물관과 미술관은 더 관리를 잘하는 모습에 우리나라 문화재의 안전관리를 하고싶다 생각이 들었고 자연히 공부를 제대로 해야 할 이유를 가질 수 있었어요

참 감사해요, 갭이어를 갖지 않았더라면 흐르는 대로 제가 어느 일을 하고 싶은 지 모른 채 학점이나 스펙관리만 했을 텐데 이 시간을 통해 진로를 그려보는 것은 물론, 사회 알람에 맞추지 않고 내 인생 시계로 행동하고자 하는 생각도 생겼고요.

적지 않은 변화죠? 1년의 휴학이 남들보다 늦춰진다는 것이 아니라 내 미래를 벌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운 좋게(?) 제가 휴학을 하던 해에 휴학 정책이 바뀌어 최대 3년에서 4년으로 바뀌었어요. 이 갭이어 기간을 어떻게 보낼지 그려보던 중 계획하게 된 것이 있어요.

이 캐나다의 1년 이후 , 반 년간 중,남미 여행, 1년 반 호주에서 새 워홀, 남은 1년은 오세아니아부터 아프리카 ,중앙아시아 동아시아를 통해 한국으로 돌아가는 지구 한 바퀴 세계 여행을 그려봐요.

정신 없죠, 이 첫 번째 갭 이어 시간 동안 내부에서 작게 타오르는 변화를 일으켰는데, 그 타오르기 시작 한 걸 더 활활 키워보고 싶거든요.

계획한 4년의 갭 이어가 끝난 후에는 학교에 복학 후 전공에 집중 해 제가 원하는 일을 하기 위한 초석을 닦으려 구요.

자격증을 취득 하고 전공 지식을 쌓아 졸업 하여 전문직 경력을 쌓아 전문가가 되어 우리나라의 문화재, 대형 건물이나 특수 건물의 소방안전관리를 하고 싶답니다.

이 1년 정도의 갭이어 덕에 이렇게 까지 그려 볼 수 있었기에 앞으로의 기간도 긍정적으로 될 것이라 그려봐요.






주변 이들에게 계획을 말하자!


이건 하려는 행동을 하게 하는데 분명 직 간접적으로 영향을 줄 거에요. 머리 속에서는 그 계획을 어떻게 풀어 볼지 하는 생각이 더 가득 차고 주변인들은 도움을 주면서 한편으로는 절 지켜보고 있을 테니까요.

이 때 수기로 본인이 하고자 하는 일을 작성해 보는 것도요! 언어의 힘은 강하니까요!


걱정 대신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자.


집 앞의 슈퍼를 나갈 때에도 걱정이에요 무슨 옷을 입을지 씻지 않고 나갔다가 아는 이를 만나면 어떨지 등등, 놀러가서도 화장실에 가고 싶을 때 걱정이고 밥 먹는 게 걱정이에요. 언제나 어디서나 크고 작은 수 많은 걱정들 투성이에요.


그런데 지나고 나면, 해소하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생각이 나질 않아요. 기억 속에서 사라지는 것만 같아요. 생산적이지 않은 일들을 접어두고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자! 라는 거에요. 제 경우는 도서관에서 책들을 통해 자료를 정리했고 블로그나 카페 구글 검색, 심지어는 돈을 투자해가며 컨설팅을 듣기도 했지요.

이런 일련의 과정을 거치다 보니 백지보다 더 하얗고 투명해 앞이 보이지 않던 계획도 슬슬 밑그림이, 윤곽이 잡히는 것 같았거든요. 실제로 이 방법을 통해 제 힘들었던 경험을 성장의 거름으로 만들기도 했으니까요!

물어보자, 나를 믿자


두드리는 자에게 답이 올지니! 캠핑장에서의 예상 치 못한 결과처럼 묻고 두들기면 없던 일도 생기더라고요. 미련이나 후회도 작을 거에요, 적어도 시도는 했잖아요?








제가 감히 쉽게 하라고 말은 못 해요, 모두 각자의 상황에서 어려울 것이기 때문에 하지만, 걱정거리를 해소하면 어느새 기억 속으로 사라지잖아요. 밥 걱정 처럼 말이에요.


살면서 밥은 꼭 먹어야 해요, 그런데 남의 눈이 밥 먹여주지 않죠, 혹여 누군가 입 앞에 밥 숟갈을 떠 준다고 하더라도 씹고 소화하는 건 각자의 몫이죠. 천천히 먹는 것도, 빨리 먹는 것도, 많이 먹는 것도, 적게 먹는 것도 다 우리 마음이고 우리 몸에 맞게 먹어야 하죠. 남 눈치 보며 빨리 먹거나 많이 먹어 체하지 말고, 천천히 먹거나 적게 먹어 배 굶주리지 말고.


먹기 싫다면, 속이 좋지 않다면 잠시 먹지 않아도 되잖아요 다음에 맛있게 먹으면 되니까. 각자의 양만큼, 각자의 속도에 각자의 기호에 맞춰 먹는 거에요. 이렇게 매일 있는 식사는 요것저것 재며 까다롭게 먹으면서


“우리가 꾸려갈 앞으로의 날들, 남 눈치 보지 않고 내가 먹고 싶은 것 먹는 식사처럼 각자 맛있게 채울 수 있도록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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