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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rsona May 15. 2023

침대

- 안식처 n 보금자리

  흥분과 기대와 기쁨과 행복이 호주로 날아온 며칠이 그랬다. 오늘 밤도 오지 않는 잠과 씨름한다. 이기기를 포기해야 놓여나는 싸움이다. 자반 뒤집기를 하다가 끝내 일어나 불을 켠다. 하루 시간은 빠르게 흐르는데 나의 시간은 느리기만 하다. 다시 씨름판에 나서려고 불을 끈다. 눈부터 감는다. 잠들어야 감는 눈인데 차례를 바꾸어 본다. 밤마다 모래판이 아닌 침대에서 벌어지는 씨름이다. 편히 쉬거나 곤히 잠들어야 할 침대가 노상 싸움판이 된다. 별난 침대에서 느끼던 불안감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별 하나 나 하나 별 둘 나 둘……. 별 없는 천정을 눈감고 바라보며 별을 센다. 별 대신에 모습을 드러내는 사각의 방 하나, 흰색 벽이 마주 섰고 또 한 쌍의 마주 보는 벽이 있을 자리에 한쪽에는 여닫이 출입문이 있다. 맞은편에는 몇 개의 창살로 나뉜 하늘이 보이는 창문이 있다. 하얀 벽 한쪽에 붙여놓은 철제 침대가 보인다. 병상의 내가 보이고 몇 개의 조각으로 나뉜 하늘은 늘 누르스름한 불투명이다. 고뇌에 잠긴 표정으로 입에 문 권련에는 미처 떨지 못한 재가 위태롭게 매달려 있다.    

 세상 걱정 모두 담은 소주 한잔 앞에 놓고 뿜어대는 연기는 촉수 낮은 포장마차 백열등을 휘돈다. 그 멋에 구멍 숭숭 숨찬 가슴만 남았다. 가벼운 감기도 가슴 아픈 나에겐 무거운 병이다. 건강한 시절 생각하다가 참을 수 없는 지경이 되어서야 병원을 찾는다. 감기로 입원 환자가 된다. 일인용 침대에 일주일간 묻혀 지낸다. 가장 연약하고 부끄러운 삶의 위치에 누워 슬픈 나를 느낀다. 더 어린 시절 침대는 슬픔이 아니었다. 부러움이었다. 갈망이었다. 중학생 때 친구 집에 놀러 간 적이 있었다.  

 대문에서 현관 앞까지 큰 나무들이 서 있는 정원이 있었다. 정원에서 바라본 친구네 집은 2층이었다. 그에 더해 방마다 침대가 있었다.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방바닥에 깔고 덮었던 이불과 요를 아침마다 개어 넣은 우리 집 방들이 떠오르는데 공연히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 뒤로 가끔 침대에서 자는 꿈을 꾼 것도 같다. 침대 하나 갖는 게 꿈이 되어버렸다. 꿈은 결혼과 함께 이루어졌다. 

 꿈을 이룬지도 40년이 넘었다. 침대는 일어나기도 앉기도 쉽고 힘이 덜 든다. 사랑의 장소인 더블 침대에서 시작하여 열정 대신 사색이 깊어지면서 싱글 침대 신세를 자주 진다. 짙어가는 저녁놀을 바라보며 사색의 침대에 누워 눈으로 그림을 그린다. 반듯하게 누워 팔다리 죽 편 여덟 팔 자 자세를 하면 살아있다는 존재감을 느낀다. 절로 미소가 피어오른다. 양팔을 가슴에 얹고 다리를 모으며 죽음의 자세라고 상상하기도 한다. 한 침대에서 삶과 죽음을 다 떠올리다니 이상한 생각이 든다. 이제 멀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수원 집에도 각 방에 침대가 있다. 호주에서 딸 가족이 올 때를 대비해서 준비해 두었다. 손주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침대에 익숙하니 그럴 수밖에 없다. 아이들뿐이랴? 어른이 되어서 침대 생활을 시작한 나도 침대가 없으면 불편하다. 온돌방의 온기는 기억 속에만 남아있다. 브리즈번 딸네 집에도 나만을 위한 침대를 마련해 놓았다. 싱글, 사색의 침대다. 흥분과 기대와 기쁨과 행복이 점차 가라앉은 며칠이 지난 뒤 일상이 정리되었다. 

 오지 않는 잠과 씨름한 지 벌써 여러 날이 지났고 편한 하루하루가 즐겁다. 침대에 누워 책을 읽고 음악 듣는 시간이 그렇다. 여유 있는 시간에 빠져드는 낮잠은 불면 없이 하늘하늘 잡념을 지우며 날아간다. 몸과 마음을 가다듬고 나를 돌아보는 밤에도 그렇게 지낸다. 침대 위 나는 유일하게 나를 인식하는 존재로 태어난다. 침대 하나 갖는 것이 꿈이었던 어린 시절은 벌써 오래된 이야기가 되었다.   편안한 잠을 누릴 수 있는 침대는 나의 분신이 되었다. 때로 존재를 인식하게끔 나를 붙잡는 것도 침대이다. 지금까지 함께 해온 나의 침대는 오랜 시간 동안 안락한 쉼을 가져다준다. 별이 총총히 하늘을 수놓은 오늘 밤도 편안한 잠을 깊이 자기 위해 일인용 침대에 눕는다. 가족과 함께 하는 이국의 하늘 밑에서 별을 헤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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