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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용수 May 29. 2022

#11 - 돈을 쓸 때는 화끈하게 써야한다

룩소르 서안에 있는 왕가의 계곡 투어

나일강을 건너기 위해 보트에 올랐다.  출렁거리는 배에 혼자 타고 있으니 신선놀음하는 기분이 들었다. 뱃놀이를 즐기고 싶어서 좀 천천히 가 달라고 이야기해볼까라고 생각했으나 이미 반대편인 나일강 서안의 선착장에 도착해버렸다. 배에서 내려보니 저 너머에 누군가가 서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저 사람이 오늘의 가이드&운전기사인가 보다. 강둑에 놓인 계단을 따라 올라가니 그가 말을 걸었다.


가이드 : 네가 유시프야?

나 : 으..응.. 유시프 맞아…


여기서 내 이름 ‘용수’는 어떻게 해도 ‘유시프’로 들리나 보다. 이젠 그냥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그는 자기소개를 했다.


가이드 : 반가워 나는 ‘ㅁㅁㅁ’야. 이집트 정부에서 인정한 라이선스가 있는 가이드야. 오늘 오후까지 네가 가

            고싶은데가 있으면 어디든 좋으니 이야기를 해.

나 : 응 고마워 일단 먼저 왕가의 계곡을 가고 싶어.

가이드 : 아 그러면 가는 길에 멤논의 거상을 들렀다 가는 건 어때? 왕가의 계곡으로 가는 길에 있어. 그리고

           물을 미리 하나 사서 가는 게 좋을 거야. 곧 더워질 테니.

나 : 알았어 먼저 멤논의 거상을 보고 왕가의 계곡으로 가자.


미안하게도 그의 이름은 잊어버렸다. 저들이 나의 이름을 유시프라고 부르듯 나 역시 이집트인들의 이름은 입안에 맴돌기만 할 뿐 정확히 머리에 새겨지지가 않는다. 들어도 계속 잊어버리게 되었다. 아무튼, 그의 차에 올랐다. 한 30만 킬로쯤 탄 거 같은 승합차였다. 아마도 평소에는 단체관광객 위주로 투어를 진행하나 보다.

나일강을 건너는 보트

선착장에서 서쪽을 향해 직선으로 뚫린 대로를 한참을 달렸다. 시내를 빠져나오니 빨간 무언가를 말리는 농장이 좌우로 펼쳐졌고, 곧 멤논의 거상이 나왔다. 룩소르 패스를 주섬주섬 꺼내니 여기는 입장료가 없다고 했다. 그럴 만 하긴 한 게 멤논의 거상은 그냥 대로 옆에 서 있다. 가이드는 멤논의 거상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이곳은 원래 18 왕조의 아멘호테프 3세의 장제전이 있던 자리고, 저 거상은 아멘호테프 3세를 새긴 것인데 장제전은 다 무너지고 거상만 남은 거라고 했다. 가이드의 자세한 설명은 반쯤 부서져서 커다란 돌 뭉치 같기만 한 거상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지금은 부서지고 없지만 저 두 개의 거상 뒤로 있었던 장제전의 모습도 눈에 보이는 듯했다. 아. 이래서 이집트에서는 가이드 투어를 다들 추천하는구나. 만약 여기를 혼자 왔더라면 인터넷을 찾아보면서 혼자 끙끙대고 있었을 거였다. 사진을 찍으려는 나에게 가이드가 저기 어디 서 보라고 했다. 거기가 포토스팟이었다. 거상 두 개와 나의 모습을 한 번에 담을 수 있는 그런 자리였다. 혼자 다니면 셀카 모드로 낑낑대며 사진을 찍거나 현지인들에게 팁을 주고 사진을 찍어달라고 했어야 했다. 그런데 지금은 부담 없이 내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할 사람이 있다. 이게 별거 아닌 거 같아도 이집트 같이 북적이는 곳에서는 느끼는 피로함을 꽤 줄여주었다. 역시 돈을 쓸 때는 써야 한다.

멤논의 거상. 가이드가 찍어준 내 사진은 실수로 지워버렸다....

다시 차에 타고 왕가의 계곡으로 출발했다. 입구까지는 산을 하나 돌아서 가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꽤 걸렸다. 가는 길 옆으로는 기념품 가게들이 눈에 띄었다. 아니나 다를까 가이드는 나에게 좋은 기념품 가게를 소개해줄 테니 투어가 끝나면 거기를 가자고 했다. 어떤 기념품들이 있냐고 물으니 돌을 깎아 만든 작은 석상들을 판매하는 곳이라고 했다. 아직 여행 초반이고, 기념품을 잔뜩 사버리면 배낭에 메고 다니기가 너무 힘들 거 같았다. 당장은 필요 없다고 이야기했다. 그는 절대 후회하지 않을 거라며 꼭 가자는 말을 수차례 했다.  뭐 일단 투어가 끝나고 생각해 보자고 했다.

왕가의 계곡 입구. 경비가 삼엄하다.

왕가의 계곡 입구부터 무덤이 있는 곳 까지도 걸어서 한참 가야 했다. 그래서 무덤까지 전동카트를 타기로 했다. 가격은 10파운드(750원) 정도 했던 기억이다. 가이드는 세티 1세와 네페르타리의 무덤까지 들어갈 수 있는 패스를 산거냐고 물었다. 아니라고 했더니 그는 몹시 아쉬워했다. 왕가의 계곡에서는 세티 1세의 무덤이 가장 멋있고, 왕비의 계곡에서는 네페르타리의 무덤 말고는 볼 게 없다고 했다. 사실 룩소르 패스를 사면서 엄청 고민했던 점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집트에 남아 있는 왕들의 무덤 중에서 가장 잘 보존되어 있고 가장 화려한 무덤이 바로 세티 1세와 네페르타리의 무덤이다. 그래서 이 두 곳을 보려면 추가 요금을 내야 한다. 그런데 룩소르 패스로 저 두 군데까지 관람하기 위해서는 프리미엄 패스를 사야 했다. 가격은 딱 두배인 200달러. 늘 예산은 한정되어 있으니 포기해야만 했다. 뭐 대단하면 얼마나 대단하겠냐 싶기도 했다. 가이드는 람세스 6세나 투탕카멘 무덤이 멋있으니 거기를 꼭 보면 된다고 했다.

왕가의 계곡 지도

전동카트에서 내려서 문이 열린 무덤 중 가장 가까운 람세스 9세의 무덤으로 갔다. 입구부터 차례대로 볼 때, 규모가 가장 크다는 람세스 3세 아들의 무덤과, 카이로 박물관에서 미라로 만난 유야, 튜야의 무덤을 먼저 가게 된다만 하필 그날따라 문을 열지 않았다. 람세스 2세의 무덤도 닫혀 있었다. 람세스 2세는 투탕카멘 다음으로 유명한 왕이니까 꼭 가 보고 싶었던 곳인데 좀 아쉬웠다. 관리상의 이유로 늘 몇몇 무덤은 닫혀있을 거라는 사실은 알았지만 하필이면 내가 보고 싶었던 게 문을 닫았다니. 어쩔 수 없다 이건 다음에 다시 오라는 신들의 계시다. 아무튼 가이드는 람세스 9세에 대해 이런저런 설명을 해 주었다. 20 왕조의 왕으로, 20 왕조는 고대 이집트가 슬슬 무너져 내리고 있던 시기라며 그래도 무덤은 볼만 할 거라고 했다. 그러고는 나보고 무덤에 들어가서 관람을 하고 오라고 했다. 어? 무덤 안까지 함께 와서 무덤 구조나 벽화에 대한 설명을 해 주어야 하는 거 아닌가? 알고 보니 가이드가 함께 들어와서 내용을 설명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단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앞에 ‘Lecture Prohibited’라고 크게 적혀 있었다. 가뜩이나 무덤 안은 비좁은데 오래 있지 말고 빨리 보고 나가라는 말이지. 이런 제기랄! 오늘 꼭 가이드 투어를 하기로 결심한 이유가 바로 벽화의 내용을 설명 듣는 데에 있었다. 어제 카르낙 신전과 룩소르 신전을 다니며 벽에 새겨진 내용을 너무 알고 싶었다.  왕가의 계곡에 있는 무덤벽화야말로 자세한 스토리를 알고 싶어서 투어로 온 것이었는데, 내가 가장 기대했던 벽화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럴 거였으면 차라리 어제 개인 가이드 투어를 신청했어야 했다. 오늘은  그냥 단체 투어나, 개별관광을 하고.

람세스 9세 무덤 입구

혼자서 무덤 입구로 들어갔다. 무덤 안쪽 벽은 온통 벽화와 상형문자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눈이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3000년 전에 화가와 장인들이 이걸 하나하나 새기고 칠했다는 거다. 비교적 덜 유명한 왕인 람세스 9세의 무덤이 이럴진대 유명한 왕들은 도대체 어떻다는 거지? 무덤에서 나와서 아까 추천받은 람세스 6세의 무덤으로 바로 가자고 했다. 입구에서 가이드에게 무덤 주인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람세스 6세는 욕심이 몹시 많은 왕이었다고 한다. 람세스 6세의 무덤은 원래 5세의 무덤이었으나 6세가 빼앗았단다. 덤으로 다른 여러 건축물에서 선대 왕들의 이름을 지워버리고 자기 이름을 새겨 넣기까지 했다고 한다. 아니 무덤이 얼마나 으리으리했으면 그걸 다 뺏을 정도였을까? 직접 들어가 본 람세스 6세의 무덤은 나라도 욕심낼만했다. 아까 본 람세스 9세의 무덤은 여기에 비하면 시시했다. 복도만 해도 엄청나게 길고, 벽과 천장은 온통 벽화로 장식되어 있다. 벽화의 색깔도 람세스 9세 무덤에 비해서 훨씬 잘 남아 있었다. 관이 안치되어 있는 주실의 천장에는 엎드린 사람과 별이 뜬 하늘이 그려져 있었다. 바로 하늘의 여신 누트다. 추가 요금이 필요 없는 람세스 6세의 무덤이 이 정도인데 세티 1세와 네페르타리 왕비의 무덤은 도대체 어떻단 말인 거지? 100달러를 아끼기 위해 스탠더드 룩소르 패스를 사버린 어제의 나를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 그렇다 돈을 쓸 때는 화끈하게 써야 한다.

람세스 9세 무덤 벽화
람세스 6세 무덤에서 인상깊었떤 천장그림

바로 옆에는 그 유명한 투탕카멘의 무덤이 있었다. 아마 이집트에 관심 없는 사람들도 투탕카멘은 한 번쯤 들어봤을 거다. 투탕카멘은 인상이 강해 보이는 바로 그 아케나톤 왕의 아들이다. 그는 너무 어린 나이에 즉위해서 막상 당대에는 존재감이 없는 왕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현대에 와서는 이집트 역대 지도자 중에 가장 유명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아마 현대 이집트의 지도자인 무바라크나 나세르보다 더 유명할 거다. 그 이유는 바로 투탕카멘의 무덤이 가장 온전하게 발굴된 무덤이기 때문이다. 무덤 안으로 들어가니 맨 먼저 투탕카멘의 미라가 있었다. 그 역시 후손들의 관광수익 증대를 위해 유리관 안에서 열 일하는 중이었다. 비록 살아있을 때 별로 한 일이 없다고 하더라도 덕분에 후손들이 엄청난 관광수익을 올리고 있다. 어쩌면 현대 기준 이집트에서 가장 위대한 왕이 투탕카멘이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안으로 들어가 보니 무덤이 그렇게 크지는 않았다. 하지만 도굴꾼의 손을 거친 적이 없으니 무덤 벽에 그려진 벽화의 3000년 전 색감이 그대로 살아있었다. 고대 이집트인들의 색깔 취향은 오히려 현대적이라는 생각도 했다. 내가 그림을 잘 모르니 이 점은 반박 시 님의 말이 맞다. 그런데 세티 1세나 네페르타리의 무덤은 이런 생생한 그림이 훠얼씬 큰 공간에 훠얼씬 많이 있다는 거다. 또 한 번 생각했다. 그래 역시 돈을 쓸 때는 화끈하게 써야 한다.


투탕카멘 무덤


그 외에 다양한 왕들의 무덤을 잔뜩 돌아봤다. 나의 가이드는 조금 지친 거 같았다. 한쪽에 마련된 쉼터에서 잠시 쉬면서 다음에는 하트셉수트 장제전으로 가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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