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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용수 May 22. 2022

#10 - 여행 중에도 멍청비용의 지출은 계속된다

룩소르 동안 투어의 끝과, 왕가의 계곡이 있는 서안 투어의 시작

맥도날드에서 식사를 마치고 얼음이 들어간 콜라를 마시고 나니 다시 힘이 났다. 이제 룩소르 신전을 볼 차례다. 요기까지만 딱 보고 숙소로 들어가기로 마음먹었다. 카르낙 신전에서 오늘치 감동을 다 받아 버린 나는 기대감이 크게 들지는 않았다. 룩소르에 왔으니 룩소르 신전에는 가봐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갔던 거 같다. 입구에서 룩소르 패스를 제시하고 벤치에 앉아서 잠시 쉬면서 룩소르 신전에 대해 찾아봤다. 룩소르 신전은 18 왕조의 아멘호테프 3세가 짓고, 19 왕조의 람세스 2세가 증축한 거라고 했다. 이집트를 여행하면서 아마도 가장 많이 접하게 될 왕의 이름이 아멘호테프와 람세스, 그리고 제일 유명한 투탕카멘 정도가 아닐까 싶다. 여기에 늘 어디에나 있는 아케나톤을 추가하면 되려나? 사실 이집트 하면 떠오르는 유적인 피라미드로 유명한 쿠푸왕 시대는 너무 오래돼서 그런지 기자의 대피라미드에서 말고는 연관된 무언가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하지만 저 아멘호테프와 람세스와 관련된 유물이나 유적은 어딜 가나 있다. 저 두 사람은 고대 이집트 최고 전성기를 이끌던 왕이라고 보면 된다. 우리로 따지면 아멘호테프는 광개토대왕 정도고, 람세스는 세종대왕이라 해도 될 거 같다. 그러니 많을 수밖에 없다. 이 부분에 대한 반박이 있다면 댓글로 달아주시면 감사드린다. 아마도 님의 말이 맞을 거다. 그 외에도 하트셉수트 여왕 등 이집트가 룩소르를 기반으로 패권을 휘두르던 시기에 즉위했던 주요 왕들에 대한 내용이 룩소르 신전 입구 쪽에 주욱 설명되어 있었다. 이집트 답지 않게 꽤나 친절하고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어서 열심히 읽었다.

이 왕들이 룩소르 신전과 관련된 이들이다.


룩소르 신전은 딱 카르낙 신전을 축소시켜놓은 곳 같았다. 왕들의 모습을 새긴 것으로 추정되는 거대 석상이 벽을 따라 늘어선 정문을 지나가면 역시나 기둥들이 늘어선 공간이 나온다. 그런데 카르낙 신전만큼 크지는 않다. 물론 그래도 크다. 카르낙 신전만큼은 크지 않다는 말이다. 벽 쪽에는 상형문자와 그림이 잔뜩 새겨져 있다. 그중에 유난히 자주 보이는 글자들이 몇 개가 있었다. 역시나 룩소르 신전을 만들고 키운 '아멘호테프'와 '람세스'의 이름이다. 이제 두 사람의 이름을 하도 자주 보다 보니 상형문자로 쓰여 있어도 알아볼 지경이 되었다. 뿐만 아니었다. 이집트 특유의 기법으로 조각된 부조나 벽화를 계속 보다 보니 신들이 누가 누군지도 이제 대충은 알 거 같았다. 머리에 쓰고 있는 관의 모양과 손에 들고 있는 물건으로 구분을 하면 되는 거 같았다. 이래서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말이 나왔구나. 이집트 유적의 벽화나 부조들은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그러다 보니 이집트의 유적은 정말로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들어맞는 곳이다. 벽화의 내용을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었다. 가이드를 섭외해서 올걸 그랬다. 내일 룩소르 서쪽에 있는 왕가의 계곡은 꼭 가이드와 함께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좌 : 룩소르 사원 입구, 중 : 상형문자로 쓴 '람세스', 우 : 신들의 모습

기둥이 늘어선 공간을 지나 방을 몇 개 지나면 로마에 정복당한 후 로마의 신 주피터를 모시는 사원으로 사용되기 위해 리모델링되었다는 방이 있었다. 고대 이집트 스타일로 새겨진 부조위에 회반죽으로 덮어서 로마풍의 프레스코화를 그려놓았다. 엄밀히 말하자면 로마인들이 이집트의 문화재를 파괴한 거다. 그런데 지금은 이마저도 문화재가 되어 있었다.  기분이 참 묘했다. 로마인들이 한 짓을 아멘호테프 3세나 람세스 2세가 알았다면 왕가의 계곡에 묻힌 미라가 벌떡 일어났을 거다. 그런데 2000년이라는 시간은 로마인들의 파괴행위를 룩소르 신전이 가진 기나긴 서사 중 하나로 바꾸어 놓았다. 문득 이스탄불의 아야 소피아 성당이 생각났다. 처음 아야 소피아는 동로마 시대 비잔틴 교회의 총본산 역할을 하는 성당이었다. 이후 오스만 제국 시대에 모스크로 개조된다. 안에 그려져 있던 기독교 성화를 지워버린 것은 덤이다. 이 역시 동로마제국 사람들이 알게 된다면 울화통이 터질 일이었겠지만 지금은 그 누구도 아야 소피아 성당을 모스크로 개조한 행위에 대해 도덕적 잣대를 들이밀지는 않는다. 만약 내가 저쪽 구석에 BTS 멤버들의 이름을 한글로 적어놓으면 어떨까? 2000년쯤 지나면 그 역시 룩소르 신전이 가진 이야기의 일부가 되려나? 2000년 후의 고고학자들이 내 이름을 발견하고는, 이것이 21세기에 존재했으나 인구 소멸과 기후위기로 인한 지구 해수면 상승으로 사라진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문화콘텐츠가 이집트에서도 소비되었다는 증거다!’라는 가설이 학계에 발표되고 누군가는 그 내용으로 박사논문을 쓸 수도 있겠지. 진짜로 낙서를 하는 정신 나간 짓을 하겠다는 게 아니라 그냥 그런 상상을 해 보았다는 거다.

룩소르 신전은 카르낙 신전에 비해 시시하다 생각했는데 벽에 새겨진 부조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상상하며 둘러보다 보니 벌써 여섯 시가 다 돼갔다. 룩소르 신전은 밤에 조명을 켰을 때가 훨씬 멋지다는 말을 들었다. 좀 기다렸다가 ‘나이트 룩소르 템플’을 보고 갈까 잠시 고민했지만 오늘은 이만 숙소에 가기로 했다. 그래 오늘만 날도 아니고. 내일 서안 투어를 마치고 오면 저녁쯤일 테니 숙소로 들어가면서 봐야겠다. 나는 길에서 파는 코샤리를 한 그릇 뚝딱 하고 숙소에 들어갔다.

룩소르 사원에 남은 로마의 흔적


눈부신 햇살과,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에 상쾌하게 잠에서 깼다. 어젯밤에 분명 씻고 잠시 누운 거 까지는 기억나는데 정신 차려보니 아침 7시였다. 많이 피곤했나 보다 거의 11시간을 잤다. 테라스로 들어오는 밝은 햇살이 어쩐지 영화 속의 아름다운 한 장면 같았다. 그런데 이 위화감은 뭐지? 마치 중요한 시험이 있는 아침에 늦잠을 시원~~ 하게 자고 일어났을 때의 느낌과도 비슷했다. 어쩐지 뭔가 잘못된 거 같다는 의심이 들었다. 아 맞다. 서안의 왕가의 계곡 가이드 투어 예약을 안 하고 자버린 것이다. 어제 숙소에 들어오면서 바로 했어야 했다. 어젯밤 예약을 하러 숙소 리셉션에 갔을 때  마침 그곳에 아무도 없어서 좀 있다 내려와서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고는 그냥 자버린 거다. 이제 와서 후회를 해봤자 소용없는 일이다. 오늘 그냥 무위도식하면서 쉬고 내일 서안 가이드 투어를 가던가, 가이드 없이 택시를 빌리든 자전거를 타든 자력으로 왕가의 계곡까지 꾸역꾸역 가서 보고 오는 수밖에 없었다. 하루를 그냥 무위도식하며 보내기도 싫었다. 이제야 고대 이집트인들이 벽에 뭘 그려 놓은 건지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는데. 그렇다고 자력으로 가기에는 편도 최소 10킬로미터로, 대중교통의 지옥인 룩소르에서는 너무 험난한 길로 보였다. 나는 일단 리셉션에 가서 물어보기로 했다.


숙소 사장 : 굿모닝. 무슨 일이야?

나 : 사실은.. 내가 어제 서안 투어 예약하는 걸 깜빡하고 자버렸거든? 오늘은 이제 못 가지?

숙소 사장 : 응 지금은 힘들지. 원한다면 개인 투어로는 알아봐 줄 수 있어. 택시비 포함이야.

나 : 정말? 개인 투어가 지금도 가능해? 얼마야?

숙소 사장 : 500파운드. 하지만 너를 위해 특별히 400파운드로 해 주지.


400 파운드면 3만 원 정도다. 그룹 투어로 가면 100~150파운드 정도지만 300파운드 추가 지출은 멍 청비용으로 감당할 수 있는 정도의 금액이다. 너무 다행이었다. 아직 갈 수 있다니. 게다가 서안 투어를 위한 택시 하루 빌리는데 300파운드라고 들었는데 가이드 포함 400 파운드면 나쁘지 않은 가격으로 보였다. 여담이지만 분명 처음부터 400파운드였을 거다. 생색내려고 500파운드라고 처음에 이야기한 거겠지.


나 : 알았어 그거로 오늘 갈게.

숙소 사장 : 9시쯤으로 예약해 놓을게. 아침 안 먹었지? 올라가서 아침이나 먹어.

나 : 고마워.


이 사장님은 스위트 하게도 아침을 참 잘 챙긴다. 괜히 스위트 호스텔이 아니다. 아침을 먹고 씻고 9시에 숙소 입구에서 기다렸다. 사장님이 오토바이 뒤에 나를 태우고는 나일강을 건너기 위한 보트 선착장으로 데려다주었다. 보트를 타고 강 너머로 가면 기사 겸 가이드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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