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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 little less conversation Aug 15. 2020

Your best is not good enough!

La Belle Époque, 2019

[5일 차] 


냉장고를 뒤지다가 작년 오키나와 여행 때 샀던 지마미 도-후(ジーマーミー豆腐)를 발견했다. 

땅콩가루에 감자전분을 더해 만든 것으로 오키나와의 특산품이다. 

이름은 두부지만 콩은 들어가지 않고 대신 땅콩이 들어간 덕분에 일반 두부보다 고소하다. 

예전에 일본에 살았을 때 즐겨먹었던 기억이 나서 두어 개 사들고 왔었는데 이걸 이제 와서 이렇게 유용하게 써먹게 될 줄이야. 

추억이 밀려오는 맛이다. 오키나와 요릿집에 처음 나를 데리고 갔던 모리형 생각도 나고... 

가만히 생각해보니 볶은 콩가루나 다른 견과류로도 비슷하게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냉장고 다른 한편에서는 올해 초에 병일이 사주었던 비건 치즈가 발굴되었다. 

어느 봄날엔가 비건 슈퍼마켓에 들렀었다며 비건 제품들을 한 아름 에코백에 넣어 선물해주었는데, 

그는 이 시기를 예견했던 걸까. 

당시에도 특별한 선물이었지만 이제야 진가를 발휘하는 선물이 되었다. 

암튼 어느 비건 메뉴 개발 때에나 쓰겠지 하고 밀어놓았던 그 치즈를 꺼내어 

어제 식당에서 남겨온 음식에 있던 찐 알감자에 발라서 먹었다. 


미리 슬픈 맛의 상상을 하고 먹었던 탓인지 맛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앙팡이나 아인슈타인 같은 어린이용 가공치즈의 맛이었다.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이 상태 그대로 더 발효시키면 더 꼬릿 해지지는 않을지 궁금해졌다.




일주일 만에 본가에 갔다. 

본가에 가는 날은 나에겐 힐링의 날이다. 


일주일에 한 번, 밥 먹는 시간 포함해서 고작 두어 시간 별 말없이 앉아있다 오는 게 전부지만 오랜만에 먹는 집밥도, 부모님을 뵙는 시간도 기다려진다. 

무엇보다 내 집보다 더 튼튼하고 안전한 느낌이 드는 곳이라 심신의 안정되는 것을 느낀다.  


며칠 전에 어머니께 전화를 드려 채식만 하면서 한 달만 살아보겠다고 말씀드렸다. 

예상대로의 반응이었다. 

그럼 뭘 먹고 사느냐부터, 힘써야 하는데 풀떼기만 먹고 어쩌냐, 

집에 와서는 무슨 반찬을 먹을 거냐.. 등등 

딱 한 달만 해보는 것이니 양해해달라는 말과 함께 평소에 드시는 것만 꺼내놓으셔도 충분히 먹을 게 많다고 안심시켜드렸다. 

그럼에도 수화기 너머에는 걱정이 한가득인 듯했다. 



나물반찬에 오이지, 호박잎, 텃밭에서 직접 따오신 고추, 열무김치... 

굳이 비건을 위한 차림이 아니더라도 과분한 밥상이었다. 

나름 고심해서 준비하셨다며 여전히 걱정이 가득하신 어머니는 아들놈이 이 짓을 왜 하는지가 

너무나 궁금하신 듯했다. 하지만 깊게 물어보지는 않으셨다. 

가족과 함께 살면서 비건으로 지내는 일은 아마도 더욱 힘들었을 것 같다. 

여러모로 번거롭게 되는 것도, 다른 가족 구성원들을 신경 쓰이게 하는 것도 그렇지만 이해시킬 수 없는 상황도 있을 테니. 


밥상에 달걀말이와 호박전이 있었는데 내가 손을 대고 있지 않는 것을 보고 

어머니께서는 맛이 없냐고 물으셨다. 

(우리 어머니는 뭔가를 먹고 있는 중에도 왜 안 먹냐고 하시던지, 맛이 없냐고 물으신다. 난 이 나이가 되도록 그 이유를 알 수가 없다;;) 


'달걀이잖아요.'라고 하니 잠시 멍한 표정으로 계시다가

'아..... 달걀도 못 먹는 건가?' 하신다. 

생각지도 못했다는 말을 여러 번 되풀이하시면서. 


정성껏 만들어주신 나물들과 고추, 찐 양배추를 싸들고 본가를 나섰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그림이었지만 유달리 양손과 마음이 든든했다.  



밤 10시쯤 되니 출출함이 느껴졌다. 

그냥 참고 있다가 자면 되는데 그럴 때가 별로 없다. 

초콜릿과 캐슈 두유를 먹었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비건살이를 시작한 이후 야식이 더 잦아든 것 같다. 

계속 지켜봐야 할 일이다. 







[6일 차] 



몸무게가 소폭 감소했다. 

엘리베이터 없는 4층 집으로 이사와 몇 일간을 정리니 뭐니 하며 바쁘게 움직인 탓인지도 모르겠다. 

식사 양이 줄지도 않았고, 음주와 야식의 빈도도 줄지 않았으니 일시적인 현상일 거라 생각했다. 

사실 일시적이어서는 안 되는 상황이다. 


얼마 전 출근을 했더니 동료들이 거래처에서 보내줬다는 사은품을 건네주었다. 

홍삼분말이 들어간 단수수 시리얼이란다. 

비건으로 사는 한 달 동안 아마도 살면서 처음 보는 것들을 먹을 일이 많을 것 같다.  

제목에 충실한 무설탕, 무첨가제 제품다운 맛이었다. 

이런 맛을 접할 때마다 이따금씩 자동반사 반응처럼 비뚤어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돈을 받고 파는 식품이라면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여 '맛있게' 만드는 데에 집중해야 한다. 

그래도 이 업체는 이런 맛을 '건강한 맛'이라고 표현하지는 않고 있었다. 

건강한 재료를 사용하는 것과 건강한 맛이 난다는 건 전혀 다른 명제이다. 

최소한 과대과장과 허위 사실을 유포하지 않는 양심적인 기업이다. 



앉은뱅이 통밀과 흑미, 보리와 찰수수를 넣어 밥을 지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고 마침 백미가 떨어져서였다.


국물 거리가 없던 차에 2주 전쯤 샀던 채소라면을 꺼냈다. 

봉지 뒷면을 어느 때보다도 유심히 살펴보았다. 

확실히 일반라면의 구성물과는 달랐다. 특히 수프에 들어가는 것들에서는 거의 다 알고 있는 재료로 구성되어 있어 안심이 됐다. 

맛은, 뭐랄까. 

라면 광고에서 흔히 보게 되는 주인공의 격렬한 반응 같은 건 기대할 수 없는 맛이지만 욕먹지는 않을 것 같은 그 정도의 맛이었다. 

한마디로 밋밋했다. 

여기에 연두를 몇 방울 떨어뜨리면 완전체가 된다고들 하던데 나에게도 연두에게 감사하게 되는 순간이 올 지 두고 봐야겠다. 




저녁은 간단하게 본가에서 받아온 나물에 두부를 버무려 먹는 것으로 했다. 

두부와 함께 무친 나물은 어렸을 때부터 좋아했던 음식이었다. 


쓰레기를 버리려다가 낮에 먹었던 채황 봉투에서 얼핏 '말레이시아산'이라는 단어를 발견했다. 

다시 보니 팜유로 튀긴 면이었다. 아 이런... 불쌍한 오랑우탄..ㅠ 

패배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그래. 구겨진 봉지도 다시 한번. 




오늘의 영화는 '카페 벨 에포크'. 

며칠 사이에 프랑스 영화를 두 편이나 보게 되다니. 이 역시 드문 일이다. 

나이를 먹으면서 과거를 회상하거나 시간여행을 하는 영화들에 관심이 간다. 

딱히 다시 돌아가고 싶은 때가 있는 건 아니지만 이런 영화를 보면 생각이 많아진다. 


올리브 안주를 곁들인 내추럴 와인 한 잔. 

'비건스러운 세팅이군' 이라며 혼자 흐뭇해했다. 

추가 안주로 (역시 올초에 병일이 사다 준) 베지 스틱이라는 비건 과자를 개봉했다. 

수입하여 판매되는 비건 제품들은 대체적으로 만족스러운 맛이다. 

점심에 먹었던 채황보다 완성도 높은 맛이었건만 더 맛있게 만들 수는 없는 건지, 동물성 재료를 사용하지 않은 최선의 맛이 이 정도인지 궁금했다. 

사람 욕심이 이렇다. 

그런 욕심으로 비롯된 적극적인 탐구가 지금 세상에 나와 있는 온갖 맛있는 것들의 원천이 되었겠지. 

시대의 요구가 커지면 발전도 혁신도 이루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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