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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 little less conversation Jul 05. 2021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2/3)

Baseri, Nepal, 2006


난생처음 듣는 새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깨어났다.

폭신한 침낭을 들썩이자 옆구리로 한기가 느껴졌지만 춥지는 않았다.

꽤나 이른 시간인 것 같았다.


잠이 덜 깨어 멍한 상태로 방을 나와 평상에 앉았다.

아직 뽀얀 안개가 걷히지 않아 사위는 불분명했고 공기는 상쾌했다. 

집 옆으로 난 오솔길로 한 무리의 여인들이 물동이를 이고 내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모두 맨발로 길을 걷고 있어서 움직이는 데에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알고 보니 드루바의 집은 이 동네 이장님 댁이었다. 

그리고 이 마을은 모두가 드루바와 같은 'Neupane' 성을 가진 집성촌이다. 

말하자면 마을 사람 모두가 친척인 셈이라 만나는 사람마다 오랜만에 고향집에 돌아온 드루바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물론 그가 데리고 온 낯선 외모의 손님 -나- 도 모두의 관심거리였다.

드루바는 이 마을에서 도시에 나가 성공한 청년이자 가문의 자랑이었다. 

일어나서 몇 시간 만에 수십 명을 만나보고 나니 나는 그가 입고 있는 가죽옷과 청바지가 이곳에서는 매우 튀는 복장임을 알 수 있었다. 마을 사람들 대부분은 네팔 전통 의상을 입고 있었다. 

이장님 댁은 마을에서 유일하게 라디오와 전화가 있는 곳이었다. 

지붕에는 큰 확성기도 하나 달려 있었다.

그곳은 드루바 가족의 집이자 마을 회관 또는 사랑방이었다.

사람들은 삼삼오오 툇마루에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있었고 멤버가 바뀌어도 그 중심에는 늘 이장님이 있었다. 




드루바와 함께 마을을 둘러보았다.

낡기는 했지만 깨끗한 교복은 입고 등교하는 아이들이 보였다.

머리를 깔끔하게 빗어 넘긴 꼬마들의 표정이 상기되어 있었다.

드루바는 어렸을 때 자신과 동생이 가장 가까운 학교까지 왕복 4시간을 통학해야 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몇 년 전에 이 마을에도 학교가 생겨서 무척이나 기뻤다는 말을 더했다.

가파른 언덕을 따라 층층이 들어서 있는 집들을 돌아다니면서 인사도 하고 어떤 곳에서는 미약한 노동력도 보탰다. 물소 젖을 짜거나 다른 사람들과 조를 이루어 가래 질을 하기도 하고 맷돌에 옥수수를 가는 드루바 어머니를 돕기도 했다. 처음 보는 손님에게 이런저런 일을 시키는 게 희한하게 느껴졌지만 그 덕분에 마을 사람들과 쉽게 가까워질 수 있었다. 



마을에서 행해지는 모든 농사는 전통적 농사법을 따른다.

마을에 전기가 들어와 있지 않아서 농기계는 물론이거니와 작은 전동기구 하나 없었고

경작을 위한 동력은 오직 인간과 물소에 의지하고 있었다.

수작업으로 만들었음직 한 농구들은 대를 이어온 듯 견고하고 튼튼해 보였고 반질반질하게 닳아있거나 기워 쓴 흔적들이 보였다. 분명 이곳 사람들은 그 남루한 도구들을 소중하게 다루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수확이 끝난 겨울철이었지만 농부들은 벌써 봄을 준비하고 있었다.

밭에서는 전동 농기구의 소음 대신 사람과 소의 거친 숨소리, 소의 굴레에서 울리는 방울소리,  단단한 흙을 파고 들어가는 쟁기 소리 같은 목가적인 소리들이 들렸다. 

도대체 몇 명의 고모님이 계신 지 모르겠지만 드루바의 (어떤) 고모님 댁에서는 곡식을 터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키'라는 농기구를 실제로 쓰는 것을 얼마 만에 보는 건지 모르겠다.  기억도 까마득한 옛날에 이불에 오줌을 싼 죄로 키를 뒤집어썼던 사건이 아마도 그 물건에 대한 마지막 기억인 것 같았다. 

안정감 있고 편안한 리듬으로 곡식을 공중으로 날아 올리면 겨와 쭉정이는 바람결에 날아가고 낟알은 땅에 떨어진다. 키질이라는 그 단순한 작업이 왠지 모르게 우아해 보였다. 

발견하기를 바라지 않는 마음으로 나는 밭에서 문명의 흔적들을 열심히 찾았다. 하지만 농약은 물론 비닐 조각하나 볼 수 없었다. 

누군가가 한쪽에서 노래를 흥얼거리면 다른 밭에 있는 사람도 같이 노래를 불렀다. 

작업마다 그에 맞는 노래가 있는 듯했다.  



바세리 (Baseri) 마을은 여러모로 헬레나 호르베리 호지의 책 '오래된 미래'의 라다크를 연상시켰다. 

도시화, 현대화가 진행됨에 따라 이제는 라다크에서도 볼 수 없다는 전통 농경사회의 생활양식을 이곳에서 볼 수 있었다. 타임 슬립을 한 것처럼 이 마을은 불과 하루 전까지 내가 머무르다 온 곳과 다른 차원에 놓인 세상 같았다.


마을에는 마른 사람도 뚱뚱한 사람도 없었다.

젊은 사람들은 대부분 아담하지만 다부진 체격을 가지고 있었고 나이와 관계없이 혈색 좋고 건강해 보였다.

노인들은 더 이상 노동이 불가능해질 때까지 일을 하는 것 같았다. 

한 노인은 나무늘보가 밭에서 일하는 것처럼 동작이 굼떠서 불안해 보이기까지 했지만 표정에는 활기가 가득했다. 오히려 멍하게 쳐다보는 내게 방긋 미소를 지어서 나를 머쓱하게 했다.  

그러고 보니 급하게 걷는 사람도 바쁘게 일하는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섣부른 판단일 지도 모르지만 느리게 일을 한다고 해서 이들에게 문제가 될 것은 없어 보였다.



오후에는 마을 전체회의에 참석했다. 

우리네 서낭당처럼 마을에서 제일 큰 나무가 있는 공터에 사오십 명쯤 되는 사람들이 모였다.

집성촌이라고 들어서인지는 몰라도 모인 사람들이 왠지 비슷비슷하게 생긴 것 같았다. 

몇몇 사람들은 구석에서 카메라를 들고 있는 이방인 행색의 나를 곁눈질했다. 

시선이 느껴지는 곳을 쳐다보면 사람들은 조용히 눈을 피하거나 옅은 미소를 보내주었다. 

회의는 사뭇 진지한 분위기였다. 회의의 주제는 '올해 수확물의 갈무리를 위한 인력 구성 계획'. 

여러 사람이 의견을 제시하면 한 번씩 나이 든 어르신들이 정리를 해주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나이가 많다는 것은 오랜 삶에서 얻은 경험과 지혜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지만 오랫동안 그런 가치들의 의미 있는 쓰임새를 보지 못하고 살았다. 여기서는 그들의 연륜이 아랫 세대에게 잘 전달되고 있는 것 같아서 보기가 좋았다. 

 

첩첩산중에 자리한 마을은 오후 5시만 되면 어둑해지기 시작해서 6시 반쯤 되면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겼다. 

마을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서 보이는 빛이라고는 달빛과 별빛뿐이었는데 머리 위를 올려다보면 말문이 막힐 정도로 많은 별을 볼 수 있었다. 별이 쏟아질 것 같다는 표현은 그럴 때 하는 것 같았다. 

사람이 내는 소리들이 있던 자리는 풀벌레와 산짐승들의 소리로 채워지고 있었다. 

드루바의 열 살 먹은 막내동생은 호롱불을 켜고 숙제를 했다. 난 그 옆에 앉아 흔들리는 몇십 년 만에 보는 호롱불을 바라보며 멍하니 앉아있었다. 

믿을 수 없이 이른 시간인 9시쯤이면 집안의 모든 가족이 잠자리에 들었다. 

이들에게는 온전한 휴식을 방해하는 TV도 휴대폰도 없었다. 그렇게 이른 시간에 자는 것이 군대 시절 이후로 처음이라 무척이나 어색했지만 사방이 고요해서인지 편안해진 몸은 알아서 쉴 준비를 하고 있었다. 



문명과 멀어지면서 발생하는 사소한 불편함들에는 이미 적응이 되고 있었다.

휴대폰이 터지지 않는 것은 사실 나를 찾는 사람들을 신경 쓰이게 할 뿐 나에게는 오히려 마음 편한 상황이다. 전기도 마찬가지다. 모두에게 공평한 부재는 불만과 비교의 대상이 없으므로 그것을 받아들이는 순간 불안과 걱정에서 한걸음 멀어질 수 있다. 

대게 우리는 익숙하게 존재하는 것들의 당위성을 의심할 기회조차 갖지 못한다. 

사소하지만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들의 부재는 처음에는 당황스럽고 불편하지만 다시 그것이 주어졌을 때의 감사함과 안도감 같은 충만한 감정은 우리의 일상에서 좀처럼 생기지 않는다. 

그래서 나에게 여행에서의 이런 경험은 언제나 불편하기보다 특별하고 소중했다. 


가만히 누워서 하루의 일들을 더듬어보았다. 시공간을 초월한 여행을 온 것 같은 얼떨떨한 기분과 약간의 긴장 속에서, 잊고 지냈던 여러 기억들을 되새길 수 있었던 하루였다. 

친구의 즉흥적인 권유에서 시작된 뜻밖의 여정은 나에게 의외의 선물들을 하나씩 풀어서 보여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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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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