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 little less conversation Jul 18. 2021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3/3)

Baseri, Nepal, 2006


딱히 시계도 필요 없이 날이 밝아오면 바사리 마을의 하루도 다시 시작되었다.

어제 갑자기 나타난 이방인에 대한 소문이 돌았던 모양인지

아침부터 담장 밖으로 나를 보러 온 아이들 한 무리가 보였다.

아이들은 울타리 너머에서 참새들처럼 재잘대다가 내가 쳐다보면 까르르 소리와 함께 여기저기로 흩어졌다.

이유 없이 나를 좋아해 주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하는 사람들 속에서 지낸다는 건 나쁘지 않은 일이다.

체류했던 며칠 동안 나는 그 작은 마을의 연예인이었다. 



사람들은 -아시아에서 축구를 제일 잘하는-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호의적이었고 반가운 얼굴로 악수를 청하거나 함께 사진을 찍자고 했다. 

사람들의 그런 악의 없는 순박한 관심이 어색하면서도 어딘지 정겨웠다. 


드루바 어머니께서 만들어 주시는 식사는 단출했지만 늘 맛있었다.

드루바의 부모님은 영어를 한마디도 못하셨고 내가 할 줄 아는 네팔 말은 대여섯 개 밖에 안 돼서 그분들과 뭔가를 이야기하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했지만 두 분은 나에게 무엇이든 보여주고 설명해주려고 애쓰셨다.

말이 통하지 않아도 전달되는 두 분의 마음이 감사했다.



밥을 먹고 얼마 안 되는 식기와 냄비를 설거지하고 나면 따뜻한 오후의 햇살 아래 앉아 선잠을 잤다. 

꾸벅꾸벅 졸다가 깨어보면 동네 강아지나 새끼 염소 같은 녀석들이 곁에 와서 함께 볕을 쬐고 있었다.

이웃집 아주머니 손에 이끌려 끌려들어 간 부엌에서는 동네 할머니들과 함께 도넛 비슷한 간식을 먹었다.

마치 100년 전쯤 전에 살았던 사람들과 한자리에 있는 것 같았다.


며칠 째 충전도 하지 못한 터라 수중에 카메라 이외에 작동하는 전자기기가 없었지만 그래도 심심치 않게 소소한 일거리들이 생겼다. 

아침에 안면을 터서 조금은 친숙해진 아이들 몇 명이 집으로 다시 놀러 왔다. 

이 아이들은 그래도 'Where are you from?' 정도의 영어는 하는 수준이라 가벼운 의사소통은 되었다. 

마당에 한가득 핀 메리골드 꽃송이 몇 개를 엮어 그걸로 아이들과 제기차기를 하고 놀았다. 

그리고 아이들의 요청에 의해 간단한 한국말도 가르쳐주었다. 

다른 아이들과는 숲으로 나무를 하러 갔다. 처음 보는 열매도 따먹고 나무 사이를 날아다니는 희한한 동물들도 보았다. 아이들은 나의 모든 반응들을 신기해했다. 

늘상 있던 것들의 빈자리는 때로 생각지 못한 낭만과 여유로 채워지기도 한다.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은 사진 찍히는 걸 좋아했다.

애건 어른이건 할 것 없이 액정에 보이는 자신의 모습을 신기해하며 들여다보았다. 

그 당시의 나는 사진에 크게 관심도 없었고, 장기 체류를 하느라 더 이상 관광객의 감성도 없었기 때문에

그때의 사진이 거의 없지만 바사리 마을 사람들 덕분에 감사하게도 딱 그 며칠 간은 그곳을 기억할 수 있는 사진이 많이 남았다.


나는 부유한 여행자도 아니었고 이미 집을 떠나온 지 7개월이 넘어가고 있었을 때라 여러모로 깔끔한 상태도 아니었지만 그들과 확연히 다른 복장을 하고 있었고 그들에게는 없는 것들 -디지털카메라, 작고 효율 좋은 랜턴, mp3 플레이어, 휴대폰 등- 을 가지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나의 이런 다른 점들에 관심을 가졌지만 그런 피상적인 것들로 인해 혹여나 열등감을 갖거나 위화감을 느끼게 될까 하는 노파심에 그들의 관심이 한편으로 계속 신경 쓰였다.


물질문명이 특정한 지역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광범위하고 때론 파괴적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이 사람들의 마음에 끼치는 영향이다. 

관광객을 많이 접하는 지역의 사람들도 여전히 친절하고 좋은 미소를 가졌지만 이런 외진 곳에 사는 사람들의 순박함과는 다르다. 때론 선한 얼굴 뒤에 숨은 영악함과 얄팍한 속임수에 여행지에서 현지 사람들에게 마음을 다치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되면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것들이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이런 곳에서 일수록 '로우 임팩트(Low impact)', 가능한 한 흔적을 최소화하는 여행법이 필요하다.



마지막 날 늦은 오후에 드루바는 나를 마을의 학교에 데리고 갔다.

나무와 흙벽돌로 지은 조악한 2층 건물은 마을에서 가장 큰 건물 중 하나였는데 우리로 치면 유치원과 초등학생에 해당되는 나이 때의 아이들이 이곳에서 함께 수업을 받고 있다고 했다. 

선생님 한 분이 큰 마을에서 일주일에 두세 번 오셔서 아이들에게 전과목을 가르친다고 하는데 내가 방문한 날에는 선생님은 보이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외국인의 등장에 아이들은 잠시 긴장했다가 금세 시끌벅적해졌다. 교실 안 아이들의 대부분은 아침에 집 앞으로 찾아왔던 친구들이었다.  

아이들과 수업 놀이, 공놀이를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원체 애들을 좋아하지 않지만 오랜만에 듣는 아이들의 밝은 웃음소리 때문에 나도 기분이 좋아졌다. 



학교를 나와 황혼을 등지고 걸으며 드루바와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나에게 부탁이 있다고 했다. 

마을에 하나밖에 없는 이 학교에서 얼마 전 공석이 된 선생님 자리를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네팔어도 못하고 누구를 가르칠 영어 실력도 없는 나에게는 말도 안 되는 제안이었지만 나는 잠시 잠깐 고민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나이가 들어 이 마을에 완전히 동화된 채 살아가는 내 모습을 상상했다. 

한국에 있는 가족들 생각도 났다. 아마도 그 순간 '박연'이라는 이름을 부여받고 영원히 조선 땅에 눌러앉았던 네덜란드 사람 벨테브레도 떠올랐다.

나는 드루바에게 애초의 이 여행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설명해주었다. 그리고 내가 있던 캘커타로, 나의 환자들에게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그는 전 세계에서 온 봉사자들이 줄을 서는 그곳보다 바로 여기가 도움이 필요한 곳이라고 말했다. 

그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지만 결국 그 제안을 정중하게 거절해야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교실의 아이들이 계속해서 눈에 밟혔다. 



바사리 마을에서의 마지막 밤. 

드루바의 아버지께서 다시 먼 길 떠나는 아들과 친구를 위해 닭을 잡아주셨다.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처럼 드루바의 식구들도 독실한 힌두교도들이라 고기를 아예 먹지 않았던 것을 생각해보면 그건 정말 극진한 대접이었다.

희미한 호롱불 아래에서 무슨 요리인지 어떤 색깔인지도 잘 보이지 않았지만 어머님의 닭요리는 따뜻하고 맛있었다. 드루바는 다른 날보다 식구들과 조금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에게도 일 년에 두어 번 볼 수 있는 고향 식구들이었다. 


다음날 먼동이 틀 무렵 우리는 다시 배낭을 짊어맸다. 

드루바의 어머니는 우리의 이마에 빨간 염료로 '티카'를 찍고 하얀 무명천을 걸어주며 축복해주셨다.

눈을 감고 나직하게 읊조리는 어머니의 기도를 들으니 한국에 계신 어머니 생각이 났다. 

다시 만나자는 약속은 지킬 자신이 없어서 건강하게 잘 계시라는 말씀과 함께 악수를 건넸다.


'죽기 전에 다시 여기에 올 수 있을까?'

크게 심호흡을 한번 했다. 싱그러운 풀내음이 섞인 축축한 흙냄새가 났다.

어슴푸레한 푸른빛의 먼 산들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우리가 걸어내려가야 할 계곡 사이에는 빽빽하게 운무가 차올라있었다.

세상은 아직 완전히 깨어나기 전이었지만 오솔길의 양쪽은 풀벌레 소리들로 요란했다.   

십수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새벽의 정경은 기억 속에 짙게 남아있다. 



카트만두를 거쳐 캘커타의 일터로 돌아와서도, 한국에 돌아온 이후에도 나는 여유 있을 때마다 여행을 떠났다. 많은 곳을 여행했고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바사리 마을은 그다지 인상에 남을 만한 것이라고는 없는 그저 작은 네팔의 시골 마을이다. 

그럼에도 내 수많은 여행들 중에 그 작은 마을에서 보낸 며칠은 얼마 전 일처럼 기억에 또렷하다.  


다른 동물들처럼 자연의 일부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떤 환경에 사는 가에 따라 성향도 다르게 나타난다. 

사람은 자연에서 경이로움을 접할 때 정신을 고양하는 숭고함을 경험하게 된다. 

숭고한 자연의 장소들은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는 풍경을 보여주며 우리를 부드럽게 다독여 이기심과 욕심을 억제하고 스스로의 한계를 인정하게 한다. 

지금껏 살아오며 삶의 아름다움과 진실한 겸손을 경험하는 순간들은 늘 위대한 자연의 앞에서였다.


아마도 내가 유독 티베트와 네팔 사람들에게서만 느꼈던 선량함도 그들이 발붙이고 살아가는 드넓은 자연의 덕이라 믿는다.  

그곳 사람들의 내면에는 살아가기에 녹록지 않은 거친 환경과 대비되는 따뜻한 포용과 자연법칙에 순응하는 삶의 태도가 깃들어 있었고, 표정과 말과 행동으로 드러났다. 그래서 후진적 시설이나 여건으로 인한 일상의 불편함은 언제나 사람들의 여유 있는 미소와 친절로 상쇄되곤 했다. 

조금 부족하고 조금 불편한 것이 반드시 불행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도 그들을 보며 깨달았다

어찌 보면 이미 오래전에 내면적 발전을 이루었을 그 사람들의 인성을 본받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아마도 그런 인간 본성에 대한 채워지지 않는 그리움이 늘 마음속에 남아있어서 그들을 종종 떠올리게 되는 것 같다. 



몇 해 전 카트만두 근처에서 대규모 지진이 있었다. 

그전까지 종종 이메일로 소식을 주고받던 드루바는 그 이후 연락이 두절되었다. 

전화번호도 SNS 주소도 없으니 달리 연락을 취할 방법이 없었다. 그저 무탈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지진이 있은 후로도 한참이 지나 바사리 마을의 사진을 꺼내보았다. 

10시 방향에서 포근하게 내려오던 아침햇살, 밤하늘을 수놓았던 별들과 풀벌레 소리, 이름 모를 꽃향기가 섞인 숲의 냄새, 물소들의 순한 눈망울, 나를 둘러싼 아이들의 천진한 웃음소리... 사진을 보면 그때의 감정들이 생생하다. 사실 그곳에서의 기억들은 애써 기억해 내지 않더라도 이따금씩 머릿속을 맴돈다.


그때, 사진 찍기를 좋아했던 그들 덕분에 마을과 마을 사람들에 대한 기억은 사진에 박힌 웃는 얼굴 그대로 내 마음에도 새겨져 있다. 

늘 내 사진 속에 살고 있는 그들의 현재 모습이 궁금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그 시절의 나는 흐르는 시간과 함께 서서히 희석되어서 지금은 다른 내가 자리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나이가 들고, 어쩌면 세상에 없을지도 모르는 그들의 모습을 상상하는 대신 계속 사진 속의 그들만을 추억하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잠시나마 그 아름다운 풍경의 일부가 되어 살아보았다는 사실에 감사한다.

그저 바람결에 안부를 전한다. 이 바람이 돌고 돌아 언젠가 그들의 귓가를 스치게 되길 희망하며.




매거진의 이전글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2/3)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