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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 little less conversation Aug 27. 2021

세도시 이야기 prologue.

길의 시작


스스로 헤쳐온 시간이건만 나의 과거가 마치 가보지 않고 들어보기만 한 외국의 이야기처럼 희미하게, 

때론 아예 없었던 기억처럼 머릿속에서 아득해지는 경험을 한다. 

사람의 기억이 존재의 일관성을 보증해준다고 하지만 역시나 시간 앞에서 바래지 않는 것은 없나보다. 


운명의 상대를 만나는 것처럼 사람은 살면서 자신의 역사에 길이 남을 장소나 도시를 만나게 되기도 한다. 

나에게는 캘커타, 도쿄, 두바이가 그렇다. 

인생을 항해에 비유한다면 이 세 도시에서 보낸 시간들은 몇 번의 거대한 물결이었다. 

영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의 도시들이 주인공에게 욕망과 영성, 사랑을 찾게되는 장소이었던 것처럼 시간순으로 연결되는 세 도시들은 그 파동의 방향대로 내 인생을 이끌며 때마다 다른 경험과 지혜, 배움을 선사했다. 


 하지만 이런 거창한 의미가 무색하게도 아직 20년도 채 되지 않은 기억들이 사라져가고 제 멋대로 윤색되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세월 앞에서 인간의 모든 것은 무력해진다는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그래서 그때의 일들이 어느 날 다른 이의 것처럼 낯설어지기 전에 기억의 창고를 뒤져서 차근차근 순서대로 쌓아보기로 했다.

고작 몇 년에 불과하지만 지금 나라는 사람이 축조한 세계관과 전반적인 정신세계는 이 세 도시에게 많은 빚을 지고있다. 나의 내면 구조는 이 시기에 형상화되었다고 말해도 전혀 과하지 않다. 

그 짧은 시간 동안의 일들이 이제껏 인생여정에 미친 영향력을 고려하면 지금이건 이후 언제건 나라는 사람의 통사를 기술하는 데에 이 시기의 기록들은 반드시 필요할 것 같았다. 



'세도시 이야기' 는 인도의 캘커타(Calcutta)에서 시작한다. 

나는 캘커타에서 8개월 가량의 시간을 보냈다. 나이로는 스물 일곱에서 여덟로 넘어가는 때였다. 

내가 그 도시로 가게 된 이유를 설명하려면 그 직전까지의 내 상태에 대한 안내가 필요하다. 


20대의 나는 - 주변의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주체적인 삶을 살지 못했던 10대 시기에 대한 일종의 보상심리를 가지고 있었다. 

대부분 그것은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술을 퍼마시거나, 부러워보이는 타인의 삶을 부분부분 흉내내어보거나, 쓰잘데기 없는 일들에 마음과 시간을 쏟는 형태로 분출되었는데, 어디서 무엇을 하든 내 머릿속에는 줄곧 

'나는 과연 어떤 사람인가' 라는 존재론적 물음이 떠다니고 있었다. 그것은 더 어렸을 때부터 내 인생의 거대담론으로 자리해있던 '잘 사는 것이란 어떤 삶인가?' 라는 문제를 풀이하는 데에 선행하어야 할 숙제이기도 했다.     

세상에 궁금한 것이 무척 많았던 시기였지만 나에게 제일 궁금한 것은 나 자신이었다.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이럴 땐 어떻고 저럴 땐 어떤지, 좋은 사람인지 그렇지 않은지, 어디까지 착하고 어디까지 악한지 등등 궁금함의 내용도 꽤나 구체적이었다. 

그렇게 20대 초반에는 대학와 군대에서, 그 이후에는 여행자가 되어 끊임없는 자기 탐색의 시간을 보냈다. 




제대 후에 우연한 계기로 떠나게 된 첫 배낭여행이 나에게 남긴 재산은 생각보다 컸다. 

목적지는 티벳이었다. 두 달 남짓한 여행 기간 동안 나는 조금씩 다른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몸은 단단해지고 가슴은 넓어졌으며 머리는 더 묵직해진 것 같았다.  

그 후로 나는 중독된 사람처럼 틈만 나면 여행을 떠났다. 학기 중에는 아르바이트로 돈을 모으고 방학의 시작 -더 정확하게는 기말고사가 끝남 -과 동시에 짐을 꾸려서 길을 나섰다.  

석 달 모은 돈으로 두 달 가까이를 쏘다닐 수 있는 곳들은 주위 사람들이 대부분 '오지'라고 부르는 곳들이었다. 그렇게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구석진 곳들을 여행하면서 나는 그동안 모르고 살았던 세상만사에 열성적으로 파고들었다. 

나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도 충분히 가졌다. 하지만 어떤 물음들은 시간이 지나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여전히 나는 나에 대해 모르는 것이 많았다.   


2004년. 두 달을 꽉 채운 두번째 인도 여행에서 마지막으로 들렀던 곳은 캘커타였다. 

그 도시에서 내가 가장 가보고싶었던 곳은 '마더 테레사의 집' 이었다. 종교를 초월한 유명 관광지이기도 했지만 테레사 수녀님의 행적을 생각했을 때 그곳에 가면 내가 어떤 것을 보고 느끼게 될 지 궁금했고 어렴풋이나마 내가 품은 질문들의 답을 얻을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있었다. 

센터를 찾아가 자원봉사를 할 수 있는 몇 곳의 투어를 하고나니 이상하게도 마음이 불편했다. 

환자들과 같은 눈높이가 되어 이야기를 나누는 봉사자들의 눈빛과 수녀님들의 표정, 나이도 증세도 다른 여러 환자들의 낯선 모습들은 예상치 못한 긴 여운을 남겼고, 이런 일을 '체험' 삼아 하루 이틀 해보고 가는 것은 왠지 불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체험'하게 되더라도 이들에게 조금의 도움이라도 될 만큼의 기간은 되어야했다. 

기약없는 약속을 뒤로하고 나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마지막 학기인 4학년 2학기를 보내는 동안 내 학교 생활은 줄곧 여유있었다. 

제대 이후 내 진로는 요리의 길로 정했고 그에 필요한 자격증도, 졸업 후에 떠나게 될 일본 유학의 준비도 마무리되어 있었다. 그래서 나의 마지막 학기는 대한제국과 독립운동사, 르네상스 미술사와 같은 1학점 전공과목들과 사교댄스, 사회복지, 라틴어, 인류학개론 같은 호기심 가득한 수업들로만 채워져 역대 최고의 학점을 기록하며 뒤늦게 꽃을 피우고 있었다. 

졸업이 다가올 수록 마음은 더 심란해져갔다. 

준비되어 있지 않은 자의 불안과 요리하는 삶에 대한 불확신이 얽혀있었다. 

졸업과 동시에 유학을 갈 테고, 2년의 공부가 끝나면 취직을 할 것이고, 그렇게 몇 년을 일하다가 누군가를 만나 결혼을 할테고 자식을 낳게 되겠지... 강물에 띄운 종이배처럼 그렇게 내 삶은 흘러갈텐데 나는 아직도 내가 누군지 잘 모르고 있었고, 좋다고 고른 일에 대한 확신도 없는 상태에서 새로운 인생의 막을 열려고 하고 있었다. 

이대로 그 문을 열었다가는 주체적으로 살지 못했던 10대의 삶을 되풀이 하는 실수를 반복할까 두려웠다.

기우는 더욱 확장되어 시간과 돈의 노예가 되어 줏대 없이 끌려다니고 있는 근미래의 내 모습을 상상하는 데에 이르렀다. 그때의 나는 '잘 살고 있나' 하는 의심과 '과연 이게 사는 걸까' 하는 회의를 곱씹으며 오늘을 후회하고 있을 것만 같았다.  

무서운 속도로 계단이 펼쳐지는 에스컬레이터 앞에서 한 발을 들고 있는 어린 아이처럼 나는 우물쭈물대고 있었다.


타임 아웃이 필요했다. 

어떻게든 마음의 상태를 진정시킬 답을 얻어야했지만 방법이 묘연했다. 

불현듯 캘커타에서의 기약없는 약속이 떠올랐다. 확신은 없지만 그곳에 가면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설명하기 어려운 끌림이었지만 그 힘은 강했다. 

그래서 나는 다시 길을 떠나기로 했다. 

나의 결심을 밝힌 날,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셨다. 다른 아들, 딸들처럼 평범하게 걸어가려 하지 않고 유난을 떠는 자식이 속상하고 원망스러웠을 것이다. 어릴 적부터 어머니는 나에게 '별나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돌아올 날도 정하지 않았다. 

답을 얻기 전까지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생각했지만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인천에서 배를 타고 칭다오로 들어간 나는 둔황, 투루판, 우루무치와 같은 실크로드의 천년고도들을 지나 계속해서 서진했다. 중국의 서쪽 끝 신장지역의 이국적 분위기는 내가 얼마나 생경한 곳에 와 있는 지를 실감하게 했고, 카라코람 산맥을 넘어가는 낡은 버스 안에서는 고산병 증세에 시달리면서도 태초의 시공간에 와 있는 듯한 경이로운 풍경에 넋을 잃었다. 



그렇게 파키스탄, 이란을 지나 아나톨리아 반도를 가로질러 아시아의 끝인 이스탄불까지 육로로 이동한 뒤, 

동유럽과 영국을 거쳐 드디어 인도대륙에 발을 디뎠다. 이제 장정은 최종 목적지인 캘커타만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집을 떠난 지 7개월이 넘어가고 있었다.  

캘커타 행 열차를 기다리는 델리역에서 나는 초심으로 돌아가 있었다. 

불교에서 말하는 구도의 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왜' 라는 물음이다. 이 물음이 지극할 때 구도자는 정도(正道)를 찾게 될 것이라고했다. 

플랫폼으로 들어서는 열차를 응시하면서 나는 자신에게 '왜' 이 길을 떠나왔는 지 새삼스러운 물음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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