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인권이자 보편적 교육권으로서의 대학교육
'대학입시거부로 삶을 바꾸는 투명가방끈'(투명가방끈)에 가장 많이 취재 요청을 해 오는 언론사 유형은 대학 교지, 학보사 등의 대학 내 언론들이다. 대학거부자들에게 관심을 가장 많이 가지는 집단 중 하나가 대학생들이라니, 이상한 일이다. 대학생 기자들은 대학거부의 문제의식을 묻기도 했지만, 거의 예외 없이 '대학이 어떻게 바뀌어야 할지' 혹은 '대학이 어떤 곳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도 묻곤 했다.
병역거부자 출신 활동가나 평화운동가가 군 인권 문제를 다루고 국방 정책을 비판하는 예도 있으니(시민단체 '군인권센터'의 초대 소장은 병역거부자다) 어쩌면 자연스러운 이치일지도 모르겠다. 대학을 당연히 가야 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대학에 온 다수의 대학생보다 대학거부자들이 대학에 대해 더 많은 고민을 하고 무언가 통찰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 기대받는 것 말이다.
하지만 미안하게도 저런 질문을 받으면 나는 "그건 대학생들이 더 잘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요?" 하고 반문하고 싶어진다. 대학거부자들은 사실 거부선언 이후에는 제도 교육이나 대학 등에 대해 큰 관심을 두지 못한다. 대학의 현재나 현실에 대해 더 잘 아는 것은 대학생들, 지금 대학에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당위적인 이야기겠지만, 현재 대학에 다니고 있는 사람들이 대학의 현황이나 문제점에 대해 가장 잘 알 수 있고, 또 가장 고민이 많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비록 나는 저런 질문이 좀 '내 영역 밖의' 문제처럼 느껴지지만 대학입시거부선언을 한 이 중엔 대학에 대한 열변을 토하는 예도 있다. 투명가방끈은 아니지만 2010년 대학거부를 선언했던 김예슬은 대학이 "자본과 대기업에 '인간 제품'을 조달하는 가장 효율적인 하청 업체"이고 "큰 배움도 큰 물음도 없"다고 비판하는 등 대학교육의 현실에 대해 힘주어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대학거부자들 각각의 대학에 대한 고민이나 상세한 의견은 꽤 넓은 스펙트럼에 분포해 있다.
그럼에도 그중에서도 투명가방끈의 활동에서 공통분모로 삼고 있는 대학에 대한 문제의식은, '대학이 어떠해야 하는가?'보다는 '우리 사회에서 대학이 어떤 위치에 있어야 하는가?'에 대한 것이라 보는 게 정확할 듯 싶다. 그것은 바로 대학이 지금과 같은 반강제 내지 의무가 아니라 자유로운 선택의 대상, 즉 가지 않아도 되는 곳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학교의 목표가 상급 학교(대학) 입시나 취업이 되어선 안 된다는 것, 초·중·고는 대학 입시나 취업 준비를 목표로 운영되지 말아야 하고 대학 역시 취업을 잘 하게 하는 것이 목표가 되어선 안 된다는 것이다.
대학이 왜 의무냐는 반문이 돌아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대학은 '기본 자격 조건'인 것처럼 여겨지고 있다. 대학에 당연히 가야 하고, 대졸 학력을 갖춰야만 하자 없는 사회 성원으로 대우받을 수 있다. 서울연구원 김승연 연구위원의 말은 길이 하나뿐인 한국 사회의 모습을 단적으로 요약해 준다.
경로가 하나인 거예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가서 좋은 직장에 가고. 그 경로를 이탈하는 순간, 실패자가 되는 사회인 거예요. (……) (이경로를 벗어난) 삶을 선택을 하는 순간 기본적인 생계 보장이 안 되는 거예요. 그다음에 사회적인 처우가 다 달라지는 거죠.”
- 〈용돈 없는 청소년 6편 - 가난하면 애 낳는 게 죄인가요?〉, 《씨리얼》, 2021년 9월 19일
이처럼 대학을 마치 기본처럼 요구하고 대학이라는 하나의 경로만이 공인되는 사회 현실이, 입시 경쟁을 치러야 하는 청소년들은 물론 대학에 다녀야 하는 청년들, 대졸 학력을 갖추지 못했단 이유로 또는 대학 서열화 속에 사람들을 부당하게 고통받게 만든다. 지금까지 수십여 명이 함께한 대학입시거부선언들의 문제의식을 다시 들여다보면 차별과 경쟁으로 굴러가는 교육 체제에 대한 선명한 비판에서부터, 대학이 과도한 비용을 요구하는 반면 실제로는 별 효용(사회생활에 이득이 된단 의미이든, 자아실현에 도움이 된다는 의미이든)이 없다는 회의감이라거나, 입시 경쟁에서 승리하고 대학 등록금을 내는 것이 너무나 부담스러워서 할 수 없다는 포기 선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색깔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졸 학력이 생존을 보장해 주던 시대도 이미 끝나 가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2016년, 시민단체 '학벌없는사회'는 해산 선언문에서 "학벌이 권력을 보장하기는커녕 가끔은 학벌조차 실패하고 있다. 학벌과 권력의 연결이 느슨해졌기에 학벌을 가졌다 할지라도 삶의 안정을 유지하기 힘들다."라고 썼다. 아주 틀린 말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2021년까지도 대학 진학률은 70%를 넘은 채 떨어질 줄을 모른다. 대학 졸업장은 (소위 명문대의 것도) 권력을 보장하지는 못할지 몰라도 차별받거나 낙오되지 않기 위한 기본적 신분증 정도의 위상은 충분히 갖고 있다.
게다가 대학 입시를 앞둔 고등학생들의 경험 세계는 또 다르다. 대학 입시에 관해 고민하는 고등학생들을 만나 보면 대학 진학은 여전히 너무나 당연한 과업이고 그 외의 길은 별난 용기가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거나 "실패자가 되는" 길이다. 이는 학교 교육과정과 친권자, 교사 등에 의해 끊임없이 학습하게 되는 대전제이다. 대학 졸업장이 존엄한 삶을 위한 최소한의 보험이자 안 그래도 치열한 경쟁에서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능력치로 작용한다면 이를 쉽사리 거부할 수 없다. 이른 취업을 계획하고 진학한 특성화 고등학교 학생들 역시 일터와 사회에서의 대우 차이를 보며 전문대 진학을 다시 고민하게 된다.
따라서 대학을 '가지 않아도 되는 곳'으로 바꾸는 것은 지금도 중요한 과제이다. 10대 때부터 대학 진학이 당연한 것이 아니며 대학을 가지 않는 것도 충분히 존중받을 선택지라는 분위기 속에서 대학 진학 여부를 고민할 수 있어야 한다. 학력·학벌에 따른 차별이 금지되고, 대학을 나오지 않아도 충분한 생활 수준이 보장되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실업과 불안정 일자리가 일상화되고 생존 경쟁이 치열한 노동과 사회 현실을 바꾸고 생계를 보장하는 사회 안전망과 복지 제도가 마련되어야 한다. 달리 말하면 대학을 '의무'가 아니라 '권리'로, '가야 하는 곳'이 아니라 '갈 수도 있고 가지 않아도 되는 곳'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아가서 나는 투명가방끈이나 청소년인권운동에서 이야기하는 '입시 경쟁 폐지(=반(反)경쟁식 입학 제도)'는 대학을 '누구나 갈 수 있는 곳'으로 만들고자 하는 지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가령 투명가방끈을 비롯해 청소년인권단체들은 대학 무상화·평준화를 주장하는 운동에도 함께하고 있다. 대학이 '가지 않아도 되는 곳'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가 대학 가는 사람 수만 줄이자는 주장은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현행 체제에서 대학 진학률만 낮아진다면, 대학은 과거와 같은 엘리트 교육 기관이 될 위험성이 있다. 이는 대학이 '권리'가 아니라 '특권', 돈과 시간이 있고 특출난 능력이 있는 사람만 갈 수 있는 교육 기관이 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대학은 '가지 않아도 되는 곳'인 동시에 '누구나 갈 수 있는' 보편적인 교육권을 실현하는 제도가 되어야 한다. 사실 이 둘은 모두 대학을 높은 값을 지불해서라도 가야 하는 사회적 교환 가치를 가진 기관의 자리에서 끌어내린다는 공통의 지향을 갖고 있다.
그렇다면 대학을 권리로 보장하자는 말은 누구나 대학에 가는 사회를 만들자는 말과는 무엇이 다른가? 대학 등록금이 공짜가 되고 평준화를 통해 대학 입학의 장벽이 낮춰진다면 안 그래도 학령 인구보다 대학 정원이 많다는 상황에서 대학 진학률은 중·고등학교처럼 거의 100%에 이르지 않을까? 하지만 무언가가 보편적 권리가 된다는 말이 꼭 그것을 모두가 향유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예를 들어 무상 의료가 실현되고 의료가 보편적 권리로 보장된다고 해도 딱히 아프지 않은 사람은 병원을 이용하지 않아도 된다. 출판의 자유가 보장된다고 하여 모든 사람이 책을 내지도 않고, 학문의 자유가 보장되어도 모두가 학자나 연구자가 되지는 않는다.
대학은 비용이나 입학 과정 등 제도적 측면에서는 모두에게 열려 있어야 한다. 해당 대학의 해당 학과에서 교육에 참여하기 위한 최소한의 준비가 되었는지만 확인한 뒤 입학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사회적 유인의 측면에서는 대학에 진학하고 졸업하는 것이 특별히 우대받거나 필요한 일로 요구되어선 안 된다. 고등교육 기관에서 학문을 심화적으로 익히고 전문적 연구를 하고 싶은 사람이 아니라면 굳이 가서 시간을 쓸 필요를 느끼지 말아야 한다. '누구나 갈 수 있는 대학'과 '꼭 가지 않아도 되는 대학'은 상충하는 것이 아니며, 공공성이 있는 보편적 권리로서의 대학의 양 측면이다.
대학이 누구나 갈 수 있는 곳이 되었을 때 대졸 학력이 정말 '기본'인 것처럼 고착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학력·학벌 차별 금지를 비롯해 많은 선행 조치가 있어야 할 것이다. 이에 더해, 대학 중심의 사회, 학교화된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 역시 필요하다. 어떤 교양 지식을 배우거나 공부를 할 기회가 대학을 비롯해 학교에만 몰려 있지 않고 학교 밖의 사회와 삶 속에서 보장되어야 한다. ‘평생교육’이 〈헌법〉과 〈교육기본법〉 같은 데만 나오는 그럴듯한 선언이 아니라 학교교육보다도 더 가까운 교육 제도가 되어야 한다. 차별 해소에 더해 교육 기회가 다변화된다면 대학의 중요도를 낮출 수 있다.
이런 상상도 해 본다. 대학을 꼭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스무 살 전후에 가야 하는 것일까? 진로를 결정하고 사회 활동을 하다가 공부가 하고 싶어지거나 특정 분야에 대한 지식이 필요해지면 대학생이 되어 교양 지식을 쌓거나 공부를 하는 게 자연스러워지면 어떨까? 대학이 입시 경쟁의 골(goal)로서의 자리, 사회적 대우와 취업을 위한 기본 관문 역할을 하지 않고 정말 고등교육 기관 역할을 한다면, 그리고 사람들이 좀 더 여유 있고 인간적인 생활을 하는 사회라면 충분히 가능한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대학은 분명 학력이 공식 인증되는 교육 기관이지만 공공성을 가져야 한다는 인식은 상대적으로 낮은 모순된 위치에 있다. 그렇기에 대학이 어떤 곳이어야 하는지 논의할 때도 보편적 교육권의 보장이라는 관점은 매우 부차적인 위치로 밀려나곤 했다. 대학에서 '학생의 학습권'이라는 말은 학교·교수 측의 일방적 휴강이나 대형 강의 증가 비판과 같은 미시적 장면에 거론될 뿐, 대학이 어떤 사회적 위상을 가지고 역할을 해야 하는지 논의할 때는 고려 사항이 아니었던 것이다.
권리가 아니라면 대학은 우리 사회에서 무엇으로 여겨지고 있는가? 다름 아닌 '시장의 상품'이자 '경쟁의 보상'이다. 시장 상품으로서의 성격은 대학 등록금과 입시 과정에서 들인 사교육비나 투자한 시간 및 기회 비용 때문에 강조된다. 이렇게 비싼 돈을 내고 이렇게 시간을 써 가며 '구매'한 대학 졸업장, 학력이니 그만큼 효용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는 대학을 개인의 입신양명이나 기대 소득 증가를 위한 투자라 여기고, 대학교육은 학생들이 구매한 서비스 상품이라 보는 태도로 나타난다.
경쟁 보상으로서의 성격은 입시 경쟁과 그에 따른 서열화, 차별의 구조 때문에 강조된다. 대졸 학력, 특히 서열 체제 중 어느 대학과 어느 학과에 입학하는지는 경쟁적 교육 체제 속에서 개인의 노력과 능력, 고생에 대한 보상이며 차등을 두는 것이 정당하다는 인식이다. 이는 대학 평준화나 학력·학벌 차별 금지에 반대하며 능력주의적 이데올로기하에서 교육을 경쟁과 사회 이동(social mobility)의 장으로 보는 태도로 나타난다.
대학교육을 보편적 권리로 만드는 운동은 이렇게 대학을 상품이나 보상으로 보는 인식과 맞서 싸우는 일부터 시작한다. 개인의 구매력이나 경쟁 결과에 따라 가질 수 있거나 없는 선별적 기회나 신분증으로 생각한다는 점에서 공공성이나 보편적 권리와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대학을 사적인 교육 상품(商品)이나 경주의 상품(賞品)으로 보는 이러한 관점이 교육에 대한 우리 사회의 태도를 결정짓고 있고, 대학뿐만 아니라 교육 체제 전반의 공공성을 약화시키고 있다. 투명가방끈이나 청소년인권운동이 초·중·고 과정뿐만 아니라 대학교육이 보편적 교육권으로 보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다. 대학이 보편적 권리로 자리 잡은 교육과 사회가 어떤 모습일지, 어떻게 함께 만들어 갈 수 있을지 이야기하고 이를 쟁취하는 것이 앞으로 대학을 둘러싼 교육운동의 방향성이 되어야 한다.
※ 격월간 《오늘의 교육》 64호(2021년 9·10월)에 실린 글을 조금 수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