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 성장 중시 이데올로기의 문제
일전에 직장인 인사이트, 팁 뭐 그런 류의 글을 읽다가 이런 내용을 만난 적이 있다. '직원에게 성장의 기회를 제공하지 않는 회사에 오래 있을 이유가 없다.' '계속해서 성장할 수 있는 직장이 좋은 직장이다.' 고개를 갸웃했다. 마치 삶 또는 일에서 '성장' 자체를 추구해야 할 목적으로 여긴다는 인상을 받았고 그게 당연한 상식이자 공리인 것처럼 말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정말이지, 살면서 그런 식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한번 의식하기 시작하니 주변에서 이런 사고방식이 굉장히 흔하게 눈에 띄었다. 기업에서 더 승진하거나 성장할 가망이 없게 되면 더 재직할 이유가 없다는 이야기라든지, 계속 자신의 전문성과 역량을 개발하고 커리어를 쌓아서 어떤 식으로든 자기 가치를 높여야 한다는 자기계발론이라든지. 단순하게는 자신은 더 배우고 성장하고 싶으며 성장해야만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까지. 자신의 능력이든, 경험이든, 경력이든, 소득이나 사회적 지위이든 계속해서 향상시키고 성장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들.
이와 같은 개인 성장 중시 풍조에서 사회운동도 예외가 아니다. 활동가가 단체에서 자기가 성장하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아서 그만두게 되었다는 얘기가 간혹 보인다. 또 적지 않은 활동가들이 자기가 더 성장하지 못한다고 초조함을 느끼는 모습, 단체(또는 '선배')가 자기를 성장시켜주기를 바라는 모습을 발견하곤 한다. 약간 더 안 좋은 예로는 단체에서 실무총괄 직위나 대표자를 맡은 뒤에는 이 운동에서 더 성장할 수 없다면서 제도권 정치나 그럴듯한 자리로 이동하는 케이스를 들 수도 있겠다.
그런데 나는 개인(활동가)의 성장이 중요하고 또 그 자체가 추구해야 할 목적이자 가치라는 사고방식이 이데올로기라고, 정확히는 자본주의-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라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개인 성장 중시론'에는 나름대로의 맥락과 장점도 있겠지만 단점과 해악도 명백하다.
끊임없이 성장을 추구하는 것의 문제점은 일단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는 경제 성장을 지상 목표로 삼는 것을 비판하는 '탈성장' 담론에서 오래전부터 지적하고 있다. 생물에게 사용되던 성장·발달의 개념은 본래는 품고 있는 잠재력이 발휘되는 것, 자연스레 성숙한 상태가 되는 것을 의미했다. 요컨대 유체(幼體)에서 성체(成體)가 되는 것이 성장이었던 것이다. 이 개념이 비유적으로 쓰이면서 어느새 확장된 성장의 개념에는 종착지가 사라진 듯 보인다. '성장'이 계속해서 끝없이 더 나아지는 것, 발전하고 커지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이다.
성장이라는 말이 경제에 쓰이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는다. 이전에 성장이란 말은 생명체의 성장과 생장을 구체적으로 지시하는 것이지 '경제 성장'과 같은 추상적 개념으로 쓰이지는 않았다. (중략) 성장, 발전, 생산 모두 자연으로부터 가져와 경제와 사회를 설명하는 용어로 쓰이고 있지만, 변형된 개념들은 자연의 성장 법칙을 무시하고 위반한다. 시장 법칙과 달리 자연에는 '무한히 성장하는' 존재가 없다.
- 채효정, 〈워커스 사전 : 성장〉, 《워커스》 85호(2021년 12월)
무한한 성장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한 인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사람이 직무에서 발휘할 수 있는 역량에는 한계가 있고 성장에도 당연히 한계가 있다.(심지어 현재 많은 사람에게 성장을 상상하는 모델이 되는 게임의 경우도 '레벨 업'이나 능력치, 스킬 성장의 상한선이 정해져 있는 예가 대다수다.) 따라서 성장 그 자체가 삶/일의 목적이 되어 버리면 우리는 어느 순간 성장이 불가능해지는, 삶/일의 목적 달성이 불가능해지는 상황을 마주할 수밖에 없다.
무한한, 끊임없는 성장까지는 아니더라도, 성장 자체는 좋은 일이지 않을까? 개인 성장 중시론이 공감을 얻는 배경 중 하나는 현대 사회의 많은 조직이 개인에 대한 존중이나 지원을 소홀히 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개인을 소모품처럼 취급하거나 헌신을 요구하는 기업/조직 문화에 대한 대응으로서 개인의 성장을 중요시하고 지원하라는 주장은 유의미한 대안처럼 들린다. 어쨌건 개인에게 초점을 맞춘다는 면에서 일종의 '인간중심적' 관점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또 다른 측면을 간과해선 안 된다. 개인 성장 중시론이 개인주의 및 자기책임론과 쉽게 연결될 수 있다는 점이다. 개인 성장 중시론은 사회가 개인에게 더 '노오오오력'하고 더욱 능력을 개발하여 성과를 쥐어짜내라고 요구하는 것과 사실은 그리 다르지 않은 전제와 논리를 갖고 있다. '개인의 성장'이란 보통 '업무에 에너지를 더 많이 효율적으로 투여하고, 더 좋은 결과를 내는 것'과 동일시되며 이는 조직에도 득이 된다. 그래서 효율적인 조직은 구성원에게 성장을 요구하기 마련이며, 성장을 바라는 것은 어쩌면 개인보다는 조직일 수도 있다.
게다가 개인의 성장에 방점을 찍을수록 상대적으로 시스템 및 문화, 관계의 문제에는 관심을 덜 기울이게 되며, 조직에 문제가 생겼을 때도 개인의 능력 부족을 원인으로 짚게 되기 십상이다. 즉, 개인에게 초점을 맞춘다는 것이 좋게는 개인을 중요시하고 지원하는 것이지만, 나쁘게는 문제의 원인도 해법도 모두 개인에게서만 찾고 개인-자기 책임으로 돌리는 게 되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나는 성장해야만 한다'라는 인식은 자기 소외와 결부되어 있다. 성장이 목적이라는 것은 뒤집어서 말하면 지금의 자신은 언제나 미성숙하고 부족하다는 인식을 깔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 완성을 위해 살아간다"라는 게 왜 문제인지를 짚은 다음의 구절은 "자기 성장을 위해 살아간다"라는 데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자기 완성을 위해 살아간다고 말하는 순간 그 자는 자기 부정에 빠지게 됩니다. 무엇인가를 완성하려면, 그것은 아직 완성되지 못한 것이어야 하니까요. 자기 완성을 위해 살아간다고 말하는 순간 그 자의 인생은 완성되지 못한 것, 부족한 것, 불결한 것, 경멸할 만한 것으로 전락됩니다. 이 멋지고 신성한 생이 원칙적으로 죄를 가진 것이라는 판결을 받게 되는 거지요.
- 이영도(2003), 《눈물을 마시는 새 4》, 황금가지, 397쪽
성장을 지나치게 강조하거나 성장 자체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자기 부정에 기반한다. 만일 지금의 자기 자신을 긍정하고 만족한다면 꼭 성장해야 한다고 느끼지 않을 것이며, 삶/일의 목적이 성장이라는 관점에도 잘 공감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 다수 사람들이 겪고 있는 문제들, 그러니까 자기애를 갖기 어려운 불안정한 관계, 생존 경쟁의 압력 등은 개인 성장 중시론 이데올로기가 뿌리내리는 토양이다.
개인의 성장을 중시하는 것은 소위 'MZ세대', 비교적 젊은 세대에게서 더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모습으로 알려져있다. 일자리에 관해서 그 연원은 비교적 알기 쉬워 보인다. 해고와 불안정 단기간 노동이 흔해지고, 한 직장에서의 근속 기간이 짧아진 상황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각각의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더 나은 능력을 갖추는 것밖에 없다. 노동이 유연화되고 해고가 일상화된 만큼, 개인이 커리어와 능력을 키워 더 나은 일자리로 이직하는 것도 신자유주의 노동 시장에서는 자연스럽고 현명한 선택처럼 받아들여진다.
그런데 보다 깊게 들어가보면, 이는 자신의 삶이 언제까지나 안정되지 못하고, 세계를 더 낫게 꾸리는 데 참여할 수 없는 현실에 대한 반응일 수 있다. 미국 노동계급 청년 세대를 연구한 《커밍 업 쇼트 – 불확실한 시대 성인이 되지 못하는 청년들》(제니퍼 M. 실바 저, 문현아·박준규 역(2020), 리시올)에서는 경제적·사회적 불안정성과 불확실성이 커진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청년들은 감정과 자아를 변형시키는 방식으로 자기가 성인이 되었다고 느낀다고 분석한다. 안정적 일자리나 결혼 등 전통적 방식으로 사회적 '성인'이 될 수 없는 상황에서 심리 치료 모델에 의지해 '과거를 극복하고 자아를 형성하는' 심리적·감정적 성장에 더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이런 분석을 더 확대하여,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소외되고, 생활과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효능감을 못 갖게 되었기에, 더욱 '나 자신의 성장' 같은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하게 되었다고 설명해보면 어떨까. 개인 성장 중시론은 무력감을 느끼게 하고 불안정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한 대응인 동시에, 개인을 자기계발과 적응의 길로 몰아가는 이데올로기인 것이다.
이러한 개인 성장 중시론은 자기 부정을 부추기고, 더 발전하라고 요구하며, 정체된 삶은 무가치하다고 느끼게 한다. 자신을 계속 나아지게 해야 한다는 태도, 끊임없는 성장을 추구하는 삶의 방식은 번아웃의 위험성이 높다. 자기계발서의 지침에 따라 여가 시간까지 죄다 학습이나 노동에 사용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번아웃은 단지 과로나 일중독이 아니라, "자아로부터의, 욕구로부터의 소외"(앤 헬렌 피터슨 저, 박다솜 역(2021), 《요즘 애들》, RHK, 316쪽)이다. 현재의 자신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지 않고 성장을 추구하다 보면, '성장하는 나'에게서 느끼는 만족감을 피로감과 소진감이 능가하는 때가 거의 반드시 찾아온다. 성장 자체를 목적으로 삼으면 스스로에게도 더 많은 능력을 요구하고 더 높은 기준을 들이대게 되니까.
오해는 말길. 나는 개인의 성장이 곧 악이라거나 성장은 필요 없다고 주장할 생각이 없다. 인간으로서의 성장이나 성숙은 물론, 나는 활동가들이 활동가로서의 역량을 성장시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항상 생각하고, 활동가의 성장을 돕는 것은 운동에서 중요하게 수행해야 할 과업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때 활동가의 성장은 '운동을 더 잘되게 하기 위해서', '운동/활동가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필요한 과정이자 수단일 뿐이다. 특정한 목적을 위해 그에 걸맞는 수단으로서 운동 주체의 역량을 갖춰야 할 경우가 있는 것이지, 성장 그 자체는 활동가의 목적도 운동의 목적도 될 수 없다. 마치 단체가 존속하고 활동을 하려면 후원금 모금이 필요하다고 해서 후원금 모금이 운동의 목적이 되어선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개인의 성장은 수단이기 때문에, 현재 우리 운동이나 단체의 상황에 맞추어 필요한 역량이 무엇인지 가늠하고 활동가가 그만큼의 역량을 갖출 수 있도록 지원할 수도 있고, 또는 개개인에게 성장을 요구하지 않고 그걸 보완할 다른 수단을 모색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이건 운동만이 아니라 다른 영역에서도 같다. 개인의 성장은 무언가를 달성하기 위한 과정이고 수단이며 특정한 목적과 상황에 따른 특정한 성장이 요구되는 것이다.
앞머리에서 나는 삶/일에서 성장을 당연히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실제로 내가 청소년인권운동을 시작하고 나서 지금까지 별로 성장했다고 느끼지도 않고, 내가 성장해야 한다는 조바심을 느낀 적도 별로 없다. 내가 운동의 경험 속에 얻게 된 통찰, 지식, 언어, 기술 등은 나라는 존재의 성장이라기보다는 운동을 하는 데 필요한 장비, 도구 등을 더 많이 확보해왔다는 느낌에 더 가깝다. 아마도 나는 나 자신에게 대체로 만족하고 긍정하는 편이고, 역량의 성장은 운동에 필요한 수단 정도로 여겨서 그렇지 않을까 짐작한다.
게다가 우리는 운동의, 단체의 일원으로서 세상을, 사회를 바꾸기 위해 개입하고 행동하는 운동을 하고 있다. 거대한 세상 앞에서 개개인의 능력을 아무리 성장시켜봤자 큰 효과가 없을뿐더러, 도전하고 변화시킬 대상을 이미 충분히 마주하고 있으니, 나 자신의 성장 같은 것에 너무 연연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활동가와 개인 성장 중시 논리가 특히나 잘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끼는 이유다.
탈성장 말고도 우리가 삶에서 성장을 추구하고 목표로 삼는 것에 대해 비판적으로 바라볼 언어를 제공해주는 이야기로 청소년인권운동에서 발굴하고 만들어온 나이주의 비판이 있다. 그중 생물학적 의미의 성장 개념마저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주장을 하나 소개하며 마치려 한다. 심리학자 오자와 마키코는 야마시타 츠네오의 《반(反)발달론》을 인용하며, 발달이나 성장이란 개념 자체가 '어른'에 가까워지는 것을 더 바람직하다고 전제한 가치 판단이 들어간 것이며, 정해진 방향성과 단계를 강요하며 억압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사람의 일생이 끊임없는 변화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 변화는 발달개념이 우선순위로 두고 있는 증대, 증진, 진보라는 일방향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생명체는 생명이 시작되고 나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태양이 시시각각 움직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천천히 변화를 거듭한다. 그것은 동물이나 식물에게도 똑같으며 살아 있는 생명체가 움직이는 법칙이기도 하다. (중략) 우리는 이러한 생명 덩어리를 전체로 보면서 그 움직임을 발달이 아니라 생의 변화로 새롭게 보고, 어느 시기에도 생명을 둘도 없는 것으로 정의하는 가치의 반전을 이루지 않으면 안 된다.
- 오자와 마키코 저, 박동섭 역, 《심리학은 아이들 편인가》, 서현사, 42쪽
사람들은 자신이 끊임없이 성장해야 한다고 믿지만, 사실 인간의 변화가 성장인지 퇴보인지를 평가하고 결정하는 절대적인 기준은 없다. 그리고 보통 성장을 판단하는 기준은 조직과 사회의 잣대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성장을 삶/일의 목적으로 삼는 것이 보다 심층적인 차원에서는 이러한 주어진 기준을 내면화하는 것은 아닌가 성찰해봐야 한다.
꼭 성장하지 않아도 된다는 자세를 갖고 지금의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긍정한다는 것은 정체나 퇴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변화를 성장이라고 이름할 것인지, 어떤 변화를 지향해야 하는지를 스스로 결정한다는 것이고, 변화하는 자신도 긍정하며, 또 변화하지 않아도 되고 필요하다면 변화할 수도 있다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활동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성장으로부터 해방된다는 건 그런 의미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