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생각의 이분법을 벗어나서
생각하는 대로 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곧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
Il faut vivre comme on pense, sinon tôt ou tard on finit par penser comme on a vécu.
프랑스 소설가 폴 부르제가 쓴 이 문구는, 주로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와 같은 더 간명한 번역문으로, 일종의 '깨어 있는 삶'에 대한 요청으로서 자주 등장한다. 요컨대 의식적으로 자기 생각을 갖고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좀 더 좌파적 설명을 달면, 사상/신념대로 살지 않으면 보수화될 수 있다는 경고로 많이 통하는 듯하다.(폴 부르제가 본래 《한낮의 악마》에서 저 문구를 어떤 의미로 썼는지는 이미 별 상관없는 일이 되었다.)
나도 이 말을 처음 접했을 때는 꽤 감명 깊게 받아들였던 기억이 난다. 그래, 맞아, 세상에 휘둘리지 말고 주체적으로 신념에 따라 살아야지. 그러나 활동가로서 이력이 나고 저 말을 곱씹을수록 잘 삼켜지지 않는 부분들이 느껴졌다. '잠깐, 저 말은 그러면 삶보다 먼저 생각이 있어야 한다는 얘기인가? 너무 개인의 의지나 의식에 큰 비중을 두는 것 아닌가? 그리고 계급의식이라는 건 어떻게 보면 자기 삶의 기반 위에서 ― 사는 대로 생각하란 소리 아닌가? ……'
물론 저 문장에서 '사는 대로'라는 말은 여러 가지로 해석이 가능하다. 체제 내에서의 삶이란 것이 상당 부분 보수적이기 마련이니, 학습이나 의식적 변화의 필요성을 이야기하는 것은 어떻게든 의미 있게 해석할 수는 있다.
그럼에도 내가 저 문구에 고개를 끄덕일 수 없게 된 것은, 삶과 생각이 별개로 존재하고 그중에서 생각이 우선해야 한다는 사고방식 자체가 그리 자연스럽지 않다는 반감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저 문구는 지식인이거나 중산층 이상 계급의 사람들(또는 그렇게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부유하게 살더라도 '진보적'인 입장을 견지해야 한다는 투로 곧잘 쓰였던 것 같다. 말하자면 자기 생각과 유리된 삶을 사는 사람이 되뇔 법한 문구인 것이다.
이런 문제의식을 가진 것이 나만은 아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검색을 해보다가, 정희진 씨가 쓴 비슷한 비판을 담은 글을 접하게 되었다.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그러므로 생각을 게을리 말고 목표를 정하고 열심히 살자? 언뜻 “개념 있게 살자”는 뜻으로 들리지만, 생각이 곧 개념은 아니다. 생각보다 존재가 먼저라는 점에서 이 문장은 논리적으로 모순이다. 실천적으로 불가능하다. 가장 문제는 매우 위험한 가치관이라는 점이다. 니어링 부부는 이와 정반대로 살았다. 그들의 삶에서는 나올 수 없는 말이다. (……) 니어링 부부는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았다. 사는 대로 생각했다. 살아가는 그대로가 저항이 되는 삶을 추구했다.
- 정희진, 〈니어링은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았다〉, 《한겨레》, 2021년 3월 16일
앞서 소개한 바와 같은 맥락에서 나오는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에 담긴 사고방식은 위험하다. 일단 생각과 삶을 별개로 나눈다는 점에서 위험하고, 그중 '생각'에 진보성/도덕성/운동성을, '삶'에 보수성/욕망/현실성 등을 짝짓는다는 점에서 한층 더 위험하다. 이는 짐짓 아닌 척하지만 보수성에 우위를 내주는 세계관이며, 운동을 개인의 도덕이나 소신의 문제로 축소시키는 논법이다. 운동이 사람들의 삶의 문제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생각/신념/사상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는 인식은, 은연중에 운동을 이상적인 소리라 폄훼하는 것과도 비슷한 관점을 공유한다. 또한 운동을 생각에 의해서 삶을 관리하고 이끌려는 형태라고 이해하기 때문에, 운동이 교조적인 무언가라거나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는 일이라고 오해하는 현상(또는 운동이 교조화되거나 전체주의화되는 잘못된 현상)과도 그리 멀지 않다.
그러므로 나는 이제 나의 삶, 활동가의 삶에 관해서 이렇게 말하고 싶다. "사는 대로 생각하고, 생각하는 대로 살아야 한다." 운동은 내/우리가 겪은 삶의 문제로부터 출발해야 하고, 그 문제의식으로 자신의 삶을 꾸려가야 하며, 그 삶에서 다시 자연스레 운동에 대한 고민과 실천이 이어져야 한다.
여기에 "사는 대로 생각하지 않으면, 생각당하는 대로 살게 된다."라는 또 하나의 변주를 덧붙여본다. 이 말을 처음 떠올린 것은, 청소년운동의 활동가로서 주로 접하게 되는 뉴스나 SNS 소식 등에는 청소년인권 문제에 관한 이야기가 별로 없는데 거기 관심을 주다 보면 정작 청소년인권 문제에 대해서는 덜 생각하게 된다는 경각심을 담아서였다. 어느 순간 청소년인권 현안에 대해 생각하기보다는 사회 전반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논쟁거리나 정치인들의 말, 언론에 보도된 큰 투쟁 같은 것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고 말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던 것이다.
소수자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대개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수많은 이슈가 언론을 통해서든, 온라인으로 연결된 사람들의 말을 통해서든 부상하고 흘러간다. 하지만 그중 우리가 다루는 소수자인권의 이야기는 정말 비중이 작다.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더라도 반인권적이거나 이상한 프레임으로 다루어지는 게 태반이다. 우리가 하는 운동을 위한 이슈, 관련된 콘텐츠는 우리 스스로 만들어낸 것들이 전부인 순간도 많다.(오타쿠 용어로 말하면 '마이너 중의 마이너 장르를 파는 연성러'와 같은 처지랄까.)
이는 운동 사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활동가들의 네트워크 안에서도 더 많이 공유되고 더 많이 회자되고 더 많이 지지받는 것들은 시급한 투쟁의 현장들, 다수의 관심을 받는 사건들이며, 그 이슈 범위는 꽤나 한정되어 있다. 그 중요성이나 시급성을 부인할 마음은 없다. 그런 일들에 1명의 인간-시민-사회구성원으로서 관심 갖고 연대하는 것은 긍정적인 일이다. 그래도 활동가로서는 그만큼의 관심도 받지 못하는 자기 운동의 이슈가 눈에 더 밟히기 마련이지 않겠는가. 소수자운동의 의제들은 아예 이슈화조차 되지도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보고 듣고 접하는 정보들에 의해 '생각당하지' 않고, 자기가 살고 있고 활동하고 있는 자리에서 자기가 책임지고 있는 의제와 운동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소수자운동의 활동가에겐 꼭 필요한 자세라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이때의 전제는, 충분히 자기 운동에 밀착된, 운동과 함께하는 활동가로서의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겠지만.
어쩌면 이를 좀 더 확장하여 노동자계급이나 소수자들의 자기의식에 관한 문장으로 쓸 수도 있을 것이다. "자기 삶의 현실에 따라 생각하지 않으면, 지배 이데올로기에 의해 생각당하는 대로 살게 된다." 이런 문장은 꽤 고전적으로 '좌파적'인 경구처럼 보이긴 한다.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라는 문구가 지식인-중산층의 경구라면 그에 대한 대립항으로 한번쯤 적어볼 만하다. 하지만 이런 문장을 너무 진지하게 일반화하려 들면 또다시 앞서 비판했던 바와 같은 '삶과 생각의 이분법'에 빠지게 될 터이다. 삶과 별개의 의식도 있을 수 없겠지만, 삶 또한 구성되는 것이고 있는 그대로 저항적인 삶 같은 것도 있을 수 없다.
일반론으로서든 활동가로서든 생각과 삶이 되도록 일치하게 노력하는 것이 곧 좋은 삶의 자세라고 생각한다. 만일 "살아가는 그대로가 저항이 되는 삶"을 추구할 수 있다면 더 바람직한 일일 것이다. 나는 사는 대로 생각하며 살아가는 삶, 청소년운동의 활동가로서 관성적인 삶을 사랑하고, 그렇게 살 수만 있다면 나로서 충분하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