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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장탕트 Aug 16. 2019

슬픔이란 무엇인가

철학과 문학, 그리고 슬픔

가라타니 고진은 원인과 책임의 영역을 분리한다. 부모와 자식 관계에 있어 원인을 부모에게 찾을 수 있다고 해도, 책임이란 결국 개인의 몫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단순히 공적인 윤리성에서만 적용되지 않는다. 원인은 슬픔에, 그것이 발현되는 현상에 있어 슬픔과 구분되어여만 한다. 신형철의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은 이러한 이론과 슬픔의 아득한 거리, 구별되는 공간을 규명한다. 이것은 원인과 인식만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슬픔의 심연이 갖고 있는 접근-불가능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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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인과 슬픔은 차이가 아니라 비동성일성의 관계이다. 차이는 종합(들뢰즈)될 수 있지만, 동일하지 않음은 서로를 배려하고 거리를 유지해야만 한다. 흔히 말하는 것처럼 차이는 다른 것이지 틀린 것이 아니기에 공존할 수 있다. 하지만 비동일성은 같은 영역 내에 공존할 수 없다. 이것이 이론이 슬픔 앞에서 침묵해야 하는 이유이다. 원인과 슬픔은 비동성일성의 관계이다. 이론이 유일하게 건드리지 말아야 할 대상이 바로 슬픔이다. 그러니 말쟁이들이여 슬픔 앞에서 그 원인을 규명하려고 하지 말자. 슬픔은 이론이 접근할 수 없는 심연에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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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론, 곧 인식은 슬픔 앞에서 무의미한가. 그렇지 않다. 이론이 슬픔 앞에서 무능하다는 것을 인정할 때, 타인의 슬픔을 인식할 수 없다는 불가능성에 직면할 때 이론은 슬픔 앞에서 불가능한 공존을 시작한다. 그리고 이 시작은 인식과 이론이 아니라 ‘이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부터 기인한다. 그리고 이 이해란 타인의 고통의 동일시를 의미하지 않는다. 여기서 이해란 타자의 슬픔을 알 수 없다는 이해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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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슬픔이 사회 내에서 이해되지 못하는 과정으로 자리 잡는다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 한강의 ‘소년이 온다’는 정상적인 슬픔의 과정을 경험하지 못한 유가족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작품이다. 한강은 희생당한 사람들과 남겨진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을 의도적으로 그려냄으로써 남겨진 사람들의 슬픔을 더욱 부각한다. 더욱이 소설 한 장면인 공연 중 등장하는 “당신이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라는 대사는 정상적인 애도의 시간을 갖지 못한 사람들의 슬픔을 문학적으로 잘 그려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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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적으로도 슬픔은 불가침의 영역이다. 각 종교들은 저마다 고유의 장례 문화를 갖고 망자와 산자를 위한 애도 의식을 치른다. 그중 율법의 종교로 알려진 유대교의 장례 의식은 독특하다. 유대교는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 공동체의 의무를 감당하지 못하는 것을 대비해 3단계의 애도의 시간을 허락한다. 극도의 슬픔을 감내해야 하는 7일의 ‘시바(Shiva)’, 이 보다 억제된 30일간의 ‘슐로심(Shloshim)’ 단계, 12개월 동안 주어지는 ‘슈네임 아사르 코데시(Shneim asar chodesh)가 그것이다. 슬픔을 당한 유가족들이 애도의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종교적 의무를 면제해 주는 것이다. 이처럼 유대인들이 그들의 인종적 정체성을 부여해주는 율법까지도 면제해주는 까닭은 그만큼 슬픔을 감내하는 시간이 인간에게 중요한 가치라는 것을 보여준다. 종교, 이론, 국가 그 무엇도 슬픔의 시간을 방해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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