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위한 시간’은 자전거를 탄 소년의 감독 다르덴 형제와 마리옹 꼬띠아르 주연의 영화이다. 기교 없이도 사회적 의미를 끌어낼 수 있는 다르덴 형제와 관객들이 마치 꼬디아르 옆에서 영화를 본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큼의 몰입도 높은 연기력이 영화의 묘미 중 하나이다. 때문에 영화는 어떤 극적인 장면도 없이 평화롭게 전개되는 과정 속에서도, 지극히도 잔인한 실상을 보여준다.
영화의 시작은 주인공 산드라가 우울증을 극복하고 다시 직장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장면으로부터 시작한다. 하지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그 내용은 지난 금요일 산드라의 복직과 보너스를 놓고 투표를 했는데, 보너스를 택한 직원이 더 많았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일을 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산드라의 반응이 의미심장하다. “그들은 나를 없는 취급해. 난 존재하지 않는 거야. 난 아무것도 아냐”
“투표이기 때문에 정당하다“ 이 말은 극 중 산드라가 사장을 찾아갔을 때 들었던 말이다. 이는 마치 투표라는 형태의 과정이 이루어진다면, 모든 것이 정당하고 평등하다는 현대 민주주의의 모순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 투표라는 것이 무엇인가. 결국 투표권을 갖고 있는 사람만이 참여할 수 있는 하나의 ‘기득권의 장’이 아닐까. 민주주의 안에 난민, 청소년, 이주노동자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일까? 그래서인지 영화 내내 산드라의 목소리는 공허하다.
산드라와 사장의 대화장면
이처럼 민주주의는 필연적으로 누군가을 배제한다. 난민, 성소수자 등 모든 소수자들의 의견들이 묵살된다. 아감벤은 ‘호모 사케르’에서 1789년의 인권 선언문에의 ‘자연생명’이 근대에 이르러 ‘시민’으로 대체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국민으로부터 배제된 모든 자연상태의 인간은 민주주의 속에서 생존할 수 없다. 영화 속에서 산드라는 마치 이러한 시민이 되지 못한 존재를 대변한다. 회사의 구성원으로 승인 받지 못한, 투표권이 없는 존재로 말이다.
푸코의 생명정치의 사유를 이어 받아 정치사상에 접목시킨 아감벤의 주저이다. 현대인이 넘어야 할 세명의 철학자 중 한명으로 지젝과 바디우와 함께 이름을 올렸다
흥미로운 점은 산드라의 생존을 위협하는 보너스의 금액이다. 1000유로, 우리 돈으로 130만원. 물론 상대적이지만, 일을 하는 사람에게 생계까지는 위협하지 않는 돈, 그렇지만 포기하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액수이다. 마치 우리 사회가 민주주의 안에 포함되지 못하는 자들을 받아들일 때 요구되는 기회비용과 같이 말이다.
데리다는 모든 것을 해체했음에도 불구하고, 환대와 정의, 그리고 민주주의만은 해체할 수 없는 대상으로 규정했다. 그러면서 민주주의는 언제나 도래하는 형태로 존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데리다는 왜 민주주의가 도래하는 상태로 머물러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그것은 도래하는 순간 특정하고, 명확한 의미로 정의되어, 그 정의 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들을 생산하지 않기 위해서다. 곧, 민주주의는 언제나 정의되지 않은 상태, 곧 끊임없이 울타리 안에 들어와 있지 않은 사람들을 포함해야 한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다. 그것만이 민주주의가 자신의 존재의 이유를 찾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누군가를 배제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대의정치, 그저 우리의 책임을 양도한 편리한 정치체제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닐 것이다.
데리다는 프랑스에서 가장 유명한 철학자이자, 후기구조주의의 대표 철학자이다. 해체주의라는 독창적인 패러다임을 제시한 것으로 유명하기도 하다.
영화는 지루할 만큼 기교가 없는 형태로 산드라가 동료를 설득하러 다니는 발자취를 쫓는다. 그렇지만 영화가 보여주는 민주주의가 갖고 있는 잔인한 모순, 그리고 민주주의라는 그럴듯한 간판을 내걸고 모든 것을 돈으로 환원시키려는 신자유주의 맞서 “함께 살자”라는 산드라의 지난한 싸움은 현대 사회에서 가장 결여된 윤리적 가치가 무엇인지를 잘 드러낸다.
‘내일을 위한 시간’이라는 제목이 사실은 ‘내 일(work)을 위한 시간’이라는 중의적인 의미를 의도했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말 그대로, ‘내일을 위한 시간’이라는 제목이 더 좋아 보인다. 내일이란 미래를 통해 언제나 우리가 희망을 갖을 수 있기에 말이다. 이상적이지만, 내일은 “함께 살자”라는 말이 허용되는 세상을 꿈꿔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