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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장탕트 Aug 16. 2019

지금은 사랑이 필요한 시간

철학과 문학의 눈으로 바라본 '사랑'

사랑이란 감정을 생각할 때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시가 있다. 바로 장승리의 '말'이다. 그는 '말'에서 "정확하게 사랑받고 싶어요"라는 말을 사용했다. 도대체 정확하게 사랑받는다는 것이 무엇일까. 이 시를 볼 때마다 고민했던 구절인데 최근 정확한 사랑이란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자신의 가치와 이상에 비추어 타인을 변화시키지 않고 그 사람 그대로 사랑하는 것, 그리고 동시에 가장 불가능한 사랑이란 감정에 부합한 행동을 향해 끝없이 수행적 행위를 행하는 것.


반대로 사랑이란 혁명이며, 위험이라는 호르바트의 급진적 정의를 톺아본다. 사랑이란 나를 변혁시키는 것으로부터 자신을 노출시키는 위험이다. 호르바트는 그의 책 '사랑의 급진성'에서 사랑을 사회주의 혁명가와 아랍의 혁명에 연관 지어 정의했다. 내 입맛대로 요약하자면 사랑이란 관성에 저항하는 것과 같단  말이다. 평소 당연하게 생각하고 익숙해진 모든 방식으로부터 탈피하는 것, 마치 지구에 살고 있다면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관성의 법칙으로부터 저항하는 무모한 행동, 이것이 바로 사랑이다.


다이어트를 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안다. 내 기존의 식습관을 이겨내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말이다. 그런데 사랑은 식습관을 넘어 자신의 모든 존재의 관성으로부터 저항하는 행위이다. 그러니 사랑이 혁명이 아니라면 무엇을 혁명이라 부를 수 있겠는가.



또한 사랑은 성과 속의 공존이라고도 부를 수 있다. 사랑하는 이들이 섹스를 할 때는 평소 불순물로 여겨지던 침과 땀마저도 아름다운 것들로 변화된다. 이것이야 말로 '성과 속의 공존'이 아니겠는가. 강경한 신도들까지도 속의 세게로 이끄는 신비스러움이 바로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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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은유는 "사랑을 얼마나 해보았느냐"는 질문을 달리 말하면 "당신은 다른 존재가 되어 보았느냐"는 질문으로 바꿔 말할 수 있다고 했다. 사랑을 위해 시인의 삶을 버리고 식민군과 무기상의 삶까지 유랑했던 랭보처럼 말이다. 그러니 피상적인 변화만을 지향하는 우리네 삶에서 존재의 변화를 꿈꾼다면 사랑을 하자. 이것이 바로 사랑이 필요한 이유이자, 시간이다.


 "당신은 다른 존재가 되어 보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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