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메장탕트 Aug 19. 2019

철학자의 시선(1): 악이란 무엇인가

아도르노와 아우슈비츠

‘알쓸신잡 프라이브루크 편’에서 히틀러에 관한 논의를 할 때,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논한 ‘악의 보편성’, 곧 누구나 악을 행할 수 있다는 당시 논란이 되었던 담론을 끌고 왔다. 하지만 내가 방송을 보며 가장 먼저 떠오른 사상가는 아렌트가 아니었다. 내겐 아도르노였다. 아우슈비츠의 원인이란 야만이 아니라 계몽의 방식 자체에 있다는 뼈 아픈 비판을 가한 그 아도르노 말이다.



하이데거는 당시 가장 저명한 계몽의 산 증인이었다. 데리다와 아감벤도 하이데거의 사유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듯이 그의 영향력은 막강했다. 만일 ‘계몽’이 인간 의식의 진보를 뜻하는 것이라면 하이데거보다  계몽적인 인물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계몽의 산증이었던 그는, 나치의 증인이기를 자처했고, 그들의 행위에 동조했다.

3125894라는 당원 번호까지 받았던 하이데거.


히틀러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인간을 조종할 수 있는 프로파간다, 인식의 토대를 사로잡을 수 있는 연설과 자기확신을 갖고 있던 인물이었다. 한마디로 계몽의 극한에 놓여 있던 인간이었다. 그런데 결과는 무엇이었는가. 방송에서 평가했던 것처럼 그는 악의 화신이었다. 학살의 주범이었다. 히틀러는 계몽의 실패의 다른 이름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아도르노에게는 이처럼 나치는 야만이 아니라 계몽의 산물이었다.



도사관을 살펴보다가 ‘아우슈비츠를 비껴간  지식인 운명: 아도르노 한나 아렌트’라는 책을 발견했다. 동의할 수 없는 제목이다. 당대 그 어떤 철학자가 아우슈비츠를 비껴갈 수 있겠는가. 오히려 여기서는 한나 아렌트의 담론이 생산해 내었던 공동의 책임이라는 논의가 더 설득력 있어 보인다. 그리고 현대에서 이 책임이란 아감벤의 말처럼 말해지는 것조차 불가능한 예외적인 아우슈비츠의 역설을 인식해 내는 것, 그리고 그것을 넘어 오늘날 우리 일상에 만연한 예외상태를 인식해 내는 것이 아닐까. 이것이야 말로 인간의 조건이며, 다시금 비극을 만들어 내지 않는 방법, 진정한 계몽의 토대를 형성하는 것이 아닐까.

작가의 이전글 자본주의 속에서 사랑한다는 것(더 랍스터 비평)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