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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dweller Dec 22. 2021

1년이라는 시간은 순전히 인간 위주의 구분이다.

한 해가 얼마 남지 않은 즈음에 아직 이룬 게 없다고 느껴지는 이들에게

전 12월 31일에도, 1월 1일에도 아무런 의미 부여를 하지 않아요.


친구의 남편이 우리 집 식탁에서 무심히 말을 던진다. 친구 결혼식 이후로 오늘 처음 말을 텄으니까, 친구 남편은 사실 오늘 처음 만난 사이나 마찬가지다. 눈이 펑펑 내리는 토요일 오후, 12월의 토요일이 얼마 남지 않은 오후 집들이 중이다. 


그냥 한해의 마지막 날도, 다음 해의 첫날도, 그냥 어제와 이어지는 오늘일 뿐, 사실 1년이라는 시간 단위는 인간이 지어낸 거잖아요? 신의 관점에서는 한해를 마감하고 새해를 시작하는 게 우스울 수 있어요. 그래서 전 아무런 기념도 하지 않고 그냥 평소처럼 지내요. 하얀 얼굴과 초연한 입꼬리를 한 그가 말한다. 




성장이라는 단어는 긍정을 내포한다. 작년보다 올해 더 많은 인풋과 아웃풋이 있었다면 성장했다고 여긴다. 그렇지 않았다면 성장하지 못했다고 여긴다. 옆 자리의 동료는 올해 토익점수를 갱신하고, 이직서를 여러 군데 제출하고, 유튜브 채널을 성장시키고, 인스타 부캐도 성공적으로 만들고, 운전면허도 땄다. 자기 효능감은 좋은 거니까요. 회사에서 얻지 못하는 자기 효능감을 어디서라도 얻어야 숨 쉴 것 같아요. 그의 컴퓨터에는 '토익 만점 받는 법'이 적힌 ppt가 떠있다. 


언제부턴가 추수감사절 기간이 지나면 의식적으로 캐럴을 틀어왔다. 한 해가 다 가는 게 못내 아쉬워서 허한 마음을 캐럴로 채운 거였을까. 그리고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지면 해리포터와 반지의 제왕을 정주행 했다. 올해의 ㅇㅇ는?에 답해보며 한 해를 정리하기도 했다. 뭔가는 이뤄냈어야 하는데, 심지어 이뤄냈다고 해도, 세밑은 종일 허전했다. 이게 다 끝이라니. 새해 첫날에는 비장했다. 뭐든 해볼 수 있을 것만 같고, 뭐라도 해야 할 것만 같아. 




초연한 입꼬리의 친구 남편은 내게 일종의 메신저다. 이제 그만 어제와 오늘을 비교하지 말라는. 작년과 올해의 무게를 저울질하지 않아도 된다는. 그래, 1년이라는 단위는 인간이 만들어낸 발명품이다. 내가 와 있는 현재는 영원의 시간 속에서 어느 빗금 즈음인가를 알고자 하는 호기심 많은 인간의 발명품이다. 나는 나의 탄생에서 얼만큼 멀어졌고, 죽음에 얼마나 가까워졌나를 가늠하려는 거대한 '자'다. 죽음을 향해가고 있는 나의 내밀한 두려움을 숨기기에도 떳떳하고 적법한 제도다.(ft. 잘해봐야 시체가 되겠지만_놀라지 말라, 책 이름이다.) 그러나 이탈리아 출신인 어느 시간의 연금술사는 "세월의 흐름과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현실을 두려워하고 태양을 두려워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다그친 바 있다. 


오늘은 어제가 되어 내일의 나와 겨루는 경쟁 상대가 아니다. 내일도 오늘이 되어 과거와 저울질될 게 못 된다. 몇억 분의 일초의 시간들이 양자역학의 원리로 이 공간 안에서 수없이 생겨났다 스러질 때마다 그저 나는 그냥 나인 거다. 영원 안에서 매 순간 나로서 안식(安息)하는 나인 거다. 그냥 그렇게, 서둘러 도망가는 어제를 겸허히 보내주고, 언제나 늦지 않게 오는 내일을 기꺼이 환영해준다면, 내가 무얼 이루든 이루지 못하든 해체되지 않는 연속적인 자아로 그저 살아간다면, 언젠가는 시간의 구분선이 우스워지는 날이 오지 않을까. 다른 이의 시간과 나의 시간을 비교하며 조마조마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곧 세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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