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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히 Jun 29. 2020

13 이별하셨나요? 덴마크로 오세요


뮤직비디오나 드라마 속 이별 장면을 생각하면 빠지지 않고 떠오르는 게 있다. 바로 비와 눈물인데, 처량함을 극대화하는 장치로 손색없다. 꼭 이별하지 않았어도 내가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질 때, 이 처량함을 마음껏 표출하고 싶을 때, 눈물로는 부족할 때 나는 빗 속에서 울며 걷는 내 모습을 상상하곤 한다.


이곳에 온 뒤 급격한 우울감이 찾아올 때면 뛰었다. 숨이 가빠 헉헉 댈 때마다 깊은 곳에 처박혀있던 우울감이 툭하고 입 밖으로 나오는 느낌이었다. 거기에 온 몸으로 뿜어져 나오는 땀과 목 끝까지 차오르는 성취감, 이 역설적인 상호 작용이 안 좋은 감정을 떨쳐내는 데 꽤 도움이 됐다.


오늘은 조금 달랐라. 얼마나 깊은 곳까지 침투했는지 팔다리는 달릴 의지가 전혀 없어 보였다. 그래서 그냥 걸었다. 최대한 사람을 피해 무작정. 최근 내 눈물 버튼 리스트에 추가된 이적의 '당연한 것들'을 무한 반복하면서.


아무 생각 없이 무작정 걸었던 길


이곳에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우박이 떨어지나 우산을 쓰지 않는다. 우산 쓴 사람을 본 게 손에 꼽는다. 그래서 비 맞으며 걷는 게 전혀 이상해 보이지 않는다. 즉, 한껏 처량해지고 싶을 때 남의 시선 따위 구애받지 않고 마음껏 처량해질 수 있다는 얘기. 


눈물이 나오다 말랐다를 반복하며 걷다 보니 어느덧 하늘이 먹구름으로 뒤덮였다. 비가 잠깐 그친 틈을 타 나가 놓고는 비나 시원하게 쏟아졌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우울감에 정복당한 영혼을 세차게 내리는 비에 싹 씻어 내고 싶었다. 그리고 다시 해가 떴을 땐 새것처럼 뽀송뽀송하게 말라있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언젠가 찍어놓았던 먹구름 낀 하늘


하늘이 응답한 걸까. 나무가 우거진 숲길을 벗어나자 빗줄기가 목과 어깨를 투둑 투둑 쳐댔고 이내 세찬 비가 쏟아졌다. 어김없이 모자도 쓰지 않고 걸음도 재촉하지 않은 채 유유히 걸어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비를 맞는 게 생각보다 치유력이 강했는지 비를 맞는 동안 눈물이 흐르진 않았다.


하루에 몇 번씩 변덕을 부리는 그지 같은 날씨가 처음으로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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