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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혜 Jun 26. 2024

추구미 잉어킹의 일기

어떤 파닥거림의 기록: 프롤로그

잉어킹을 다시 떠올린 건, 헬스장 유리문을 열고 나온 순간이었다. 운동이 너무 힘들었고, 이 힘든 운동을 지속하기 위해선 스스로에게 제어장치를 걸어야 했다. 그러니까 인스타에 올리는 매일 운동 인증숏 같은 것 말이다. 누군가는 지켜보고 있을 거라는, 지켜보게 해야만 한다는 관념적 족쇄를 걸기로 작심하고서 최대한 웃기고 재밌을만한 아이디어를 떠올리려고 노력했다. 어? 게임 미션을 하는 것처럼 올려보자! 메이플스토리? 포켓몬스터? 오 포켓몬스터.


(!)


그런데

하필 잉어킹이라니.


-


포켓몬스터를 좋아했다. 그중 가장 아꼈던 건 잉어킹이었다. 잉어킹이 파닥거리는 게 좋았다. 대전을 할 때 잉어킹을 고르면 남동생이 웃었다. 누나는 바보야, 잉어킹은 공격을 못하잖아. 방울처럼 까르르 웃었다. 웃는 동생을 보고 있으면 나도 웃겼다. 동생에게 져주고 싶을 때, 같이 오래 놀고 싶을 때 나는 항상 잉어킹을 골랐다.


-


친구들이랑 놀 땐 꼬부기랑 푸린을 좋아한다고 거짓말했다. 포켓몬 go를 할 땐 피카추만 잡았다. 


-


그렇지만 항상 잉어킹을 좋아했다. 연애를 할 때에도 포켓몬스터가 화제에 오르면 꼬부기를 좋아한다고 말했었다. 잉어킹이 왜 좋은지 굳이 설명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

 

그러니까 그냥, 그렇게, 그러다 10년, 20년쯤 흘렀다.


-


엊그제 일이다. 전공 후배들 몇과 오랜만에 술자리를 가졌다. 함께 들른 칵테일바의 피겨들을 구경하다 자기가 좋아하는 캐릭터 이야기를 나눴다. 무심결에 나는 잉어킹이 좋다고 말했고, 누군가 왜요? 왜 하필 잉어킹이에요? 그것 참 희귀하네요. 하고 답했다. 아주 잠시 고민했다. 농담이라고 할까.


-


"사실 잉어킹 좋아한다고 말 잘 안 해. 원래 꼬부기 좋아한다고 이야기해"

"왜요?"

"그게 더 귀엽고 평범해 보이니까. 그렇지만...나는 정말로 잉어킹이 좋아"

"걔 파닥거리는 거밖에 못하잖아요"


-


잉어킹은 잉어의 모습을 하고 있는 포켓몬스터로, 힘도 없고 잘 움직이지 못한다. 몸은 단단한 비늘로 덮여있지만 속은 텅 비어서 어쩐지 허술하다. 그런 잉어킹이 가지고 있는 생존기술은 단 하나, 파닥거리기이다. 가끔 있는 힘껏 뛰어오를 수 있는데 1m도 튀어 오르지 못한다. 레벨이 오르면 <몸통박치기>와 <바둥바둥> 정도는 할 수 있지만... 


-


"그거 알아? 내가 잉어킹을 왜 좋아하는지 생각을 오래 해봤어. 잉어킹은 어디에나 있거든? 그리고 잉어킹이 파닥거리는 동안은 아무도 경계를 안 해. 오히려 하대하고 천대한다? 쟤는 튀어 오르기 밖에 못한다고, 데미지도 못 입히면서 저렇게 바둥거린다고, 우스꽝스럽다고, 흉을 봐. 아니면 안 됐다고 불쌍해하거나 둘 중 하나야. 그런데 그러거나 말거나 잉어킹은 계속 파닥거린다? 그렇게 견디고 견디다 보면 잉어킹이 순간 갸라도스가 돼. 너네 갸라도스 알지? 물타입 파란 용이잖아. 파닥거리기밖에 못하던 녀석이 진화하면 불도 쓰고 전기도 써. 심지어 마을 하나를 날려버릴 정도의 위력을 가진다고."


"오..."


"그게 꼭 나 같더라고, 지금 나는 아무것도 아니고 때때로 볼 품 없지만, 아무것도 아닌 시간을 뭐든 하면서 견디다 보면 언젠가는 어떤 분야든 한 곳에서는 갸라도스가 되어 있을 수 있을 것 같아. 그러니까 너네도 잉어킹의 시간을 견디고 있다고 생각해 줘. 그럼 좀 대학원 생활이든 뭐든 버틸 만 해. 약간 미칠 것 같아도 이건 게임이다. 나는 게임 캐릭터다. 나는 잉어킹이다 이렇게 자기 암시를 거는 거지. 그래서 내가 운동하면서, 논문 쓰면서, 글 쓰면서 자꾸 난 지금 잉어킹 상태라고 주장하는 거야. 언젠간 뭐라도 되겠지 하고... 내 추구미거든ㅋㅋ"  


"그게 그렇게까지 고찰이 된다니..... 이야"

"선생님"


"응?"


"그래도 꼬부기랑 잉어킹이랑 둘 다 물속성인건 같네요."


"ㅋㅋㅋ나 이제 당당하게 잉어킹 좋아한다고 말하고 다닐 수 있겠다. 앞으로 잉어킹 굿즈 발견하면 하나씩 사 와서 나한테 줘 알았지?"



  

 -


허무맹랑한 말을 받아주는 사람이 있다니

물속성이 같다는 말이 이상하게 위안이 되어서 

모니터를 앞에 두고 앉아, 한참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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