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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햇 Dec 17. 2023

나태지옥에 떨어진다고 해도, 포기하지 않을

박사 과정생의 겨울방학의 시작을 알립니다

나태 지옥에 떨어진다고 해도 나태함을 포기하고 싶지 않은 겨울방학이 도래했다. 과제 To-Do list가 텅 비어있는 것을 처음 본다. 학기 내 쳐내고 쳐내도 또 다른 과제가 무한리필 되어 볼 때마다 숨 막히는 리스트였는데 말이다.


하단 가장 왼쪽은 한 과목에서 완료한 과제다. 과목마다 폴더를 생성했는데 한 학기가 지나니 저만큼의 과제가 쌓여있다. 한 과목에서만 이 정도였으니, 다섯 과목을 들었던 학기가 얼마나 카오스였을지는 상상에 맡기도록 한다. 두 번째와 세 번째는 각각 구글 태스크와 캔바스 (학교 시스템)의 텅 빈 리스트다. 한 학기 정말 고생했다!






   가장 먼저 하게 되는 것은 일단 뒹굴뒹굴이다. 고구마, 귤과 호떡, 이렇게 좋아하는 간식 왕창 사들고 집에서 신나게 먹고 놀았다. 여유가 나자마자 집에 크리스마스 데코레이션을 했다. 만족감이 밀려온다. 여유가 있을 때 집을 꾸미니 즐겁다. 시도 때도 없이 반짝이 전구를 켜고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며 간식을 느리게 먹는다.

   겨울철 고구마는 사랑이다. 블루밍턴 마트에서 산 고구마는 한국 겨울 고구마만큼 당도가 아찔하게 높지는 않다. 그래도 여전히 좋아할 수밖에 없는 맛과 식감이다. 한 아름 사다가 찜기에 쪄서도 먹고, 오븐에 구워도 먹고, 슬라이스해서 칩으로도 먹었다. 칩은 굽다가 다 태운 게 함정이지만, 탄 부분이 제일 바삭거려 맛있다. 으아, 행복하다......



   아시안 마켓에서 사본 호떡이다. 두근거리며 구워 먹어봤는데, 맛있긴 하나 계피가 안 들어서 아쉬운 맛이다. 계핏가루를 사다가 처먹어야겠다. 비속어가 아니라 양념을 쳐서 먹는다는 순 표준어다. 오해 없기를 바란다. 모쪼록 겨울 간식을 한국에서도 먹을 수 있어 감사한 부분이다. 또 전구를 켜고 창밖을 바라보며 세월아 네월아 먹는다.



원래도 먹는 것이 꽤나 느린 편인데, 시간이 많을 때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먹어도 될 때 마음이 편하고 행복하다. 학기 중에는 아침이든 점심이든 간에 하여튼 쫓겨가며 먹어서 속이 너무 부대낀다. 하단의 사진은 빨리 먹기 세계 챔피언 남편과, 느리게 먹기 올림피언 아내의 먹는 속도 차이다. 참고로 동시에 시작했다.

남편 음식이 남은 양 = 내가 먹어치운 양







  학기가 끝나고 여유가 생기니 먹고 떠느는 시간이 더 달콤하다. 집으로 초대를 받아서 귀한 한국 음식 한상차림을 얻어먹었다. 배 터지게 먹고 행복했던 저녁이었다. 웃고 떠드니 시간이 훅 가버렸다. 팔자 주름이 생겨도 좋다고 생각했다. 살아가는 이야기 듣는 것보다 즐거운 일이 또 있을까.




  다음 날 아침, 숙취로 헤롱거리는 남편을 위해 생과일 토마토 주스를 만들었다. 토마토는 알코올 분해에 그만이라고 예전에 어디서 들었던 기억이 있다. 전날 밤에 해주면 좋았겠지만, 너무 피곤했기에...... TMI - 꽈추형 유튜브에서 토마토가 남자에게 좋다는 정보를 접한 뒤 생토마토는 웬만하면 항상 냉장고에 구비 중이다. 이탈리아 남자들이 전립선 질환이 매우 낮은데, 이는 토마토 섭취와 큰 상관이 있다는 연구결과가 있다고 한다. 아는 것이 힘이다!





 블루밍턴에서 맞이하는 두 번째 생일이다. 동기들과 점심에 집에서 생일파티를 했다. 한국 교육과정에서는 항상 생일이 기말고사 기간이었는데, 미국에서는 종강 후라 좋다. 동기들이 무척 어린데, 스물두 살부터 스물일곱 사이다. 자꾸 나이 가지고 놀렸다가, 아직 젊다고 위로를 해줘서 더 약이 오른다. 동양에서 온 영어도 잘 못하는 늙은 언니 잘 챙겨줘서 고맙다. 꽃다발에 촛불까지 알뜰히 축하해 주고 떠났다. 작년에는 무척 외롭고 힘겨운 한 해를 보냈는데, 올해는 살가운 동기들도 만나고 소속도 생기고 복작복작하니 감사함이 넘치는 생일이다.  



  저녁에는 남편과 오랜만에 데이트를 했다. 가성비 좋은 레스토랑에서 오랜만에 맛있는 음식을 먹었다. 전에 동기들과 회식하러 왔다가 음식이 너무 맛있어서 남편을 꼭 데리고 와야겠다고 벼르던 레스토랑이었다. 분위기가 좋아서 생일에 오기 안성맞춤이다. 가성비도 좋고 돈이 아깝지 않은 블루밍턴에서 보기 드문 레스토랑이다.

  조금 웃긴 일화는, 음식이 정-말 맛있는데 토종 한식 파인 필자에게는 중후반 즈음에는 다소 느끼하게 다가왔다. 종업원에게 혹시 피클이 있냐고 물었는데 없단다. 양식 파인 남편은 맛있다며 정신없이 먹었는데 말이다. 정말 입맛이라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장벽이다. 집에 와서 혼자 깍두기와 배추김치를 정신없이 먹었다는 후문이다. 오해는 없길 바란다. 음식은 정말 맛있다.






방학이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넷플릭스다. 넷플릭스 시리즈 보는 것을 좋아하는데, 보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연달아 보고 있다. 게으른 기분을 한껏 느낄 수 있어 좋다. 마음에 드는 문구는 소장해두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오늘의 문장 - '네가 타인의 얘기를 한다면 그건 네 얘기가 아니야'. 개인적으로 와닿은 문장이다. 블로그와 브런치에 글을 쓰는 것도 다 '내 얘기'를 하고자 함이다. 다른 사람들의 글 중에서도 각자의 이야기를 담은 글들은 마음에 콕 와서 닿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다.



방학과 연휴의 상징 - 밀리의 서재다. 학기 중에는 교과서나 논문 리딩 자료 쳐내고 나면 책은 쳐다보기도 싫어진다. 하여, 여유로움의 상징이 되어버린 밀리의 서재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신작을 읽고 있는데 너무나 공감되는 한 페이지를 만났다.


존재의 세 가지 이유: 배우기 위해, 경험하기 위해, 실수를 바로잡기 위해.







     마지막은 가장 좋아하는 아침 멍 시간이다. 아침을 간단히 먹고 커피를 마시면서 창문 밖을 멍하니 보는 것이다. 동기들이 이 심심하고 지겨운 시골마을에서 다들 평소 무엇을 하며 보내냐고 한다. 필자는 심심한 게 제일 재밌다고 답했다. 학기 중에 워낙 바쁘니까 심심함이 간절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안 하고 커피를 마시거나 간식을 먹으며 창문 밖을 바라보고 멍 때리는 시간이 제일 재밌다. 하루 중에 이러고 있는 시간이 제일 힐링 된다. 며칠 뒤 동기도 심심함을 즐겨보기 연습을 하고 있다며 생각보다 괜찮다고 했다. 귀여운 것. 뭐든 빨리빨리 배우고 열린 마음으로 흡수하는 미국 아이들이 신기하다.


 사실 연구며 다음 학기 티칭이며 방학 내 해야 할 것은 많지만, 아직 시작하기에는 조금만 더 게으르고 싶은 기분이랄까? 조금만 더 나태하다가 할 것을 해야겠다 다짐해 본다. 충전을 잘 해야 다음 학기를 버틸 힘이 생긴다. 생산성과 나태함의 균형을 잘 잡는 겨울방학이 되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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