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처음으로 전문의 진료를 보고 왔다. 의사 선생님이 파키스탄 출신 이민자셔서 그런지 전문용어를 못 알아들을 때마다 쉬운 단어로 풀어서 설명해 주고, 매우 친절했다. 감사했다. 다행히 학교 고용보험이 커버가 많이 되어 큰돈 들이지 않고 전문의를 볼 수 있었다.
다만 불만이었던 것은 미국은 진단 체계가 다른지, 치료 시작 전까지 검사를 다채롭게도 한다는 것이었다. 갑상선 질환을 인식한 지 두 달이 되어가는데 아직 치료를 시작하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다른 Rule-out을 위한 피검사를 해보고 한 달 뒤에 다시 진료를 보기로 했다. 피검사만 세 번째다. 한국인의 인내심에 다소 맞지 않는 체계다. 모쪼록 여름 내 헬스와 러닝으로 살면서 가장 체력이 좋은 시기라고 믿고 있었는데 시무룩하다.
내국이든 외국이든 건강이 최고다.
학기 중 스트레스 가득일 때는 요가에 다녀왔다. 오랜만에 파워 빈야사 요가로 몸과 마음을 들여다보고 왔다. 다소 배고픈 채로 가서 점심으로 먹을 닭고기 커리만 알아차려진 것은 비밀이다. 하지만 마음 챙김 전문인 우리 슈퍼바이저 선생님 가라사대, 요가와 명상 중에 어떤 생각도 떠오를 수 있고, 옳고 그른 것은 없다고 하셨다.
정답이 없는 모든 것들을 사랑한다.
가을의 끝자락과 겨울의 초입이 아름다워서 랜덤하게 동네 사진을 몇 장 올려보았다. 스카이라인의 방해 없이 하늘이 어디서나 잘 보이는 것은 이 작은 시골 타운의 장점 중 하나다. 해가 빨리 지기 시작했다. 아침저녁으로 날씨가 꽤 많이 차갑다. 그래서인지 아직 조금은 따사로운 오후 시간이 더 사랑스럽다.
겨울을 준비해 본다.
캠퍼스 한복판에서 차가 갑자기 푸-슈-슈-하더니 시동이 꺼져버렸다. 시동을 껐다 다시 켜니 힘없게나마 움직이긴 해서 멘붕이 온 정신을 겨우 잡고 길을 가로막지 않게 아무 골목으로나 일단 들어갔다. 다행히 조금 차를 쉬어주고 나니 소리는 이상할지언정 가긴 가서, 남편이 급하게 와서 차를 정비소로 슬슬 몰고 가서 입원시켰다. 엔진에 기름을 뿌리는 뭐가 고장 났다나. 덕분에 돈도 엄청 깨졌다. 사실 오-래된 중고차라 언제 어디가 아파도 이상할 게 없다.
돈 다운 돈 벌기 시작하면 신차를 갖고 싶다는 사치스러운 유학생 부부의 바람이다.
차를 정비소에 맡긴 덕분에 버스를 타고 다녔다. 차에만 의지하고 다녔는데 오랜만에 버스를 타니 나름 그것도 낭만이 있다. 때마침 사진에 볕이 대각선으로 들어 더 감성 있게 나왔다. 서울에서도 그랬는데, 희한하게 버스만 타면 꼭 이 자리에 앉는다. 버스 안 풍경도 한눈에 잘 들어오고, 바깥도 잘 보이고, 뒷문 앞이라 환기도 잘 되는 편이라 어딘가 안정감을 느낀다.
금주의 도시락이다. 위의 첫 번째 사진은, 보양 겸 오랜만에 단백질 위주로 해 본 저녁 집밥이다. 잡곡밥에 삼겹살 구이와 순두부찌개, 명란 계란말이, 쌈무와 고추무침, 깻잎무침이다. 그리고 남은 반찬들은 다음날 도시락이 된다. 오른쪽 사진은 불고기덮밥에 케일 샐러드 채소를 추가해서 갔다. 사이드로 틈틈이 먹을 군고구마, 과일 간식(포도 혹은 사과), 스콘, 감자칩, 견과류 등을 바리바리 싸간다.
스스로 열심히 해먹이는 중이다.
심리 상담 사이에 당 충전한 군고구마다. 고구마는 부드럽고 잘 넘어가서 후다닥 먹기 좋다. 이번 주는 Thanksgiving 휴일 직전 주라 내담자를 미리 댕겨서 만나느라 한 주가 많이 빡빡했다. 아침 8시부터 5시까지 모든 타임 슬랏이 다 차있어서 진짜 힘들었다. 내담자를 채울 타임슬랏이 부족해서 Clinical Team Meeting도 양해를 구해서 빠지고, 심리 상담 시간으로 채워야 했다. 그러고 남아서 차트를 쓰기 시작하는데 진이 빠져서 혼났다.
중간중간 알차게 싸간 간식과 밥심으로 잘 버텼다.
오늘도 역시나 이 구역의 마지막 퇴근러다. 위 사진은 심리 상담 센터 직원 주차장이다. 집 가려고 보면 항상 이렇게 텅텅 비어 있다. 이제는 영어로 차트 쓰는 게 느린 것에 속상해하기보다는 그저 마음을 편하게 먹기로 했다. '시간을 쓰고 싶은 대로 쓰자' 생각하고, 남아서 쓰고 싶은 거 다 쓰고 온다. 어차피 한국어처럼 하루아침에 영어 작문이 수월해지지도, 편안해지지도 않을 테니까 말이다.
차트가 오래 걸리는 게 외국인이기 때문만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다른 미국인 수련생들도 시간도 많이 들고 스트레스가 크다고 한다. 기관의 케이스가 워낙 많고, 요구되는 차트 기준이 엄격한 편이다. 한 번은 다른 수련생 친구가 다들 차트를 어떻게 쓰고 있냐고 물었다. 나는 그냥 빨리 쓰기를 포기하고 세월아 네월아 쓰고 있다고 말했더니 웃음을 참지 못하더라. 본인은 어떻게든 근무 시간 내에 다 처리하고 싶은데 그러다 보니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고 한다. 그러겠다고 하면서, 포기하면 편하다 말해주었다.
K-직장인, K-대학원생 출신에게 야근이 문제가 되는가에 대하여...
요즘 센터는 수련생뿐만 아니라 선임 스태프 선생님들도 되게 바쁘고, 위기 사례가 많아져서 센터 전반적으로 소진이 심하다고 들었다. 그래서인지 미국 특유의 유머로 한 선임 스태프 선생님이 밈파티 - "왓 아유 밈?"을 연다고 위의 사진처럼 메일이 왔다. 한참을 웃었다. 미국 직장은 참 신기하다. 가끔 이런 것을 볼 때면 tv 시리즈 '오피스'가 눈앞에서 라이브로 펼쳐지는 것만 같다. 늘 새롭고 짜릿하다.
좋은 소식 하나 - 드디어 개인 오피스가 생겼다! 원래 오피스를 다른 파트타임 스태프와 요일을 나눠서 쓰고 있었다. 하여, 오피스를 꾸미는데 사전 협의를 해야 하고 조심스러운 부분과 제약이 많았다. 근무 요일에 가서 책들과 서류, 물건들을 늘어놓고 쓰다가, 퇴근 무렵 다 철수해야 해서 번거로움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이제는 온전히 혼자 쓰게 되었다. 제일 먼저 히팅 패드와 노트북 거치대를 세팅했다. 다가오는 크리스마스 느낌도 내보려 한다.
내 세상이다, 야호!
또 다른 날이다. 차트까지 다 쓰고 제일 늦게 퇴근하면서 아무도 없는 센터를 애정을 담아 한 장 남겨보았다. 처음에는 온통 연차 높은 백인 선생님들 밖에 없어서 긴장도 많이 되고 어색하고 그랬는데, 요즘은 정이 많이 들었다. 선임 스태프들이 되게 따스하고 지지적으로 나의 적응을 천천히 기다려줬던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 미운 정 잔뜩 든 나의 성장형 슈퍼바이저 선생님과 꽤 애틋해졌다.
처음에는 내담자 차트에 쓰는 영어가 네이티브가 아니라고 핀잔을 주어 마음이 상했다. 그래서 자꾸 그러면 주눅 들고 스트레스받는다고, 나도 노력 중인데 뭐가 네이티브고 뭐가 아닌 줄 잘 몰라서 힘들다고 어필하니 놀라면서 아차 싶어 하더니만 은 요즘에는 우둥부둥 모드로 전환했다. 문장에 대해 피드백을 줄 때도 톤을 되는 한 부드럽게 하고, 문법 수정하라고 지적을 하나 줄 때면 빠르게 늘고 있다며 격려하는 말을 두세 문장 꼭 붙인다.
일 처리 속도도 잘 안 맞아서, 나는 완전 한국 스타일인 반면에 선생님은 느그읏-한 편이셔서 답답했다. 처음에는 이메일로 리마인드 드리고, 사내 메신저로도 해달라고 다시 말하고 기다렸는데 나이가 많으셔서 그런지 확인 자체를 늦게 하는 편이고, 보시고 까먹을 때도 많았다. 하여, 답답할 때마다 선생님 오피스로 계속 가서 이거 하셨냐, 이거 주신다 하지 않았냐, 지금 주실 수 있냐 그 자리에서 받아내고 해결하고 오고 그런 식으로 맞추어 가게 되었다. 선생님이 심리 상담 중이라 오피스에 못 찾아가면 문 앞에 메신저 봐주시라고 포스팃을 붙여두었다. 다른 스태프 선생님들이 오며 가며 보고는 '너네 슈퍼바이지가 질문이 있는 것 같던데 커뮤니케이션하셨냐' 이런 식으로 같이 챙겨주셨다. 덕분에 슈퍼바이저 선생님 오피스 VIP 회원이 되었다.
어쨌든 그런 부분을 기분 나빠하지 않고 너르게 수용하고 변화로 보여주셨던 부분에서 나도 마음이 많이 간 것 같다. 그래서 나도 더 쫓아다니면서 닦달도 하고 핀잔받기도 하면서 나름 재밌게 일하고 있다. 이렇게 또 미운 정이 쌓일 줄이야. 이번 학기 한 달만 더 같이 일하고 슈퍼바이저를 바꿔야 하는데, 너무 관계 조율에 투자를 많이 해서 남 주기 진짜 아깝다. 이제야 나에게 맞게 세팅이 다 되었는데 말이다. 다음 학기 같은 센터에서 일하는 랩 선배가 이 슈퍼바이저 선생님과 일하게 되었는데, 그를 Warming-up 시켜놔줘서 고맙다고 했다.
약 오른다......
센터에서 Gender Diversity Training을 받았다. 미국에서 상담심리학을 공부하면서 기대할 수 있는 영역 중 하나이기에 유익한 배움이었다. Gender Diversity Affirming한 구체적인 용어들과 접근들을 실용적인 부분에 맞추어 배울 수 있었다. 사실 한국에서는 DEI라고 하는 Diversity, Equity, Inclusion에 강조된 교육을 거의 못 받다시피 했는데, 미국에 오니까 정말 많이 배우고 있다.
사실 나부터도 최대 수혜자라고 생각한다. 미국에서 비시민권자 외국인 + 아시안 + 여성 + 제2 외국어 등등 여러 겹의 소수자 정체성을 가지고 유학 생활을 하면서도 큰 차별이나 부당한 대우 없이 잘 적응할 수 있었다. 물론, 여전히 답답하고 장벽이나 차이가 느껴져 서러울 때가 많지만, 그나마 DEI 지향점이 강한 학과에서 소속되어 일하면서, 안정감과 안전함을 바탕으로 적응을 잘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도 또 다른 소수자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나 내담자들에게 더 다정하고 공감적인 개인 혹은 상담자가 되려고 계속해서 배우고 있다. 한국에 비해 훨씬 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있는 사회에서 공부를 하니 교실뿐만 아니라 일상에서도 배워가는 것이 많다. 많은 것을 희생해서 태평양 건너와서 공부하는 만큼, 이렇듯 미국에서만 배울 수 있는 것들을 알차게 뽑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
블루밍턴에는 벌써 첫눈이 내렸다. 지도 교수님이랑 미팅을 하는데 교수님 너머로 창문에 눈발이 꽤 많이 흩날리는 것을 보느라 교수님 말에 집중을 못 할 뻔했다. 금방 녹아 없어졌을지언정 잠시나마 아름답게 내려 쌓인 눈들을 보니 겨울과 연말이 비로소 실감이 난다. 한 해가 벌써 다 가고 있다니, 참. 바쁘게 살다가 정신을 한 번씩 차려보면 시간이 말도 못 하게 빠르다.
샘플로 뽑아본 랩 티셔츠(교수님 것)가 배송되었다. 생각보다 레터링과 로고가 깔끔해서 마음에 들었다. 색깔은 교수님이 고르신 초록색인데, 다른 랩원 학생들은 흰색, 네이비, 그레이 이런 색을 주로 골랐다. 다 같이 입으면 귀여울 것 같다. 샘플에서 레터링만 살짝 더 키워서 나머지도 모두 주문을 마쳤다. 다음에 다 같이 입고 사진을 찍게 되면 또 업데이트를 자랑해 보겠다.
연휴 일주일 풀로 일 빼주는 지도 교수님 실존한다는 썰이다. 최근 지도 교수님 미팅에서 Thanksgiving 연휴에 뭐 할 거냐고 물어보셔서, 그 동안 아프다 뭐다 밀린 일들 천천히 처리해야 할 것 같다고 말씀드렸다. 그날 밤, 이런 이메일이 왔다. 연휴 동안 논문 쓰지 말고 충전하는 시간을 가지라고 하셨다. 연휴 마치고 다시 주겠다며. 뒤에 이번 학기 열 일 했다로 시작해서 구구절절 다정한 말들도 많이 붙여주셨다. 미국에서 제일 운 좋았던 것 중 하나는 지도 교수님 운이었다고 한다. 정말 다정하고 자상한 분이다.
마음이 따뜻해진다.
지도 교수님이 연구 업무는 덜어주었지만, 수업 데드라인들은 그대로였으니. 세 과목에서 Thanksgiving 직후에 final project 페이퍼와 프레젠테이션 데드라인이 잡혀있다. 다 떠나고 없는 학교 스터디 공간에서 혼자 램프와 미니 전기장판을 켜고 신나게 일했다. 매일 출근해서 하는 일들은 하기 싫고 죽지 못해 할 때도 있었는데, 혼자 마음먹은 시간과 장소에서 하니 기분이 훨씬 나았다. 모든 건 마음에 달렸고, 다른 마음이 생기는 것은 종이 한 장 차이다.
어찌 됐든 지도 교수님이 일도 빼주고 챙겨주신 마음을 감사히 받아서 일만 하지 않고 가까운 시일 내에 짧은 여행도 다녀오려고 한다. 가서 맛있는 것도 먹고, 연휴 기분도 내고 와야겠다. 좋은 리프레시가 되기를 바라보며 평소보다 조금 더 수다스럽고 길었던 포스팅을 마무리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