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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ogie Woogie Jan 27. 2021

인간을 혐오하는 휴머니스트,
로맹 가리를 기억한다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 로맹 가리

카롤린 봉그랑의 <밑줄 긋는 남자> 속 주인공은 로맹 가리에게 완전히 매료되어, 앞으로 그의 저작을 한 해에 한 권씩만 읽겠노라 다짐한다. 그의 31권의 저작 중 6권을 읽어버린 터라, 그렇게 해야만, 스물다섯 살인 자신이 쉰 살까지 로맹 가리와의 사랑을 이어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녀의 행동이 과장되긴 했지만, 로맹 가리라는 한 인간의 글과 삶에 대해 아는 사람이라면 이해가 될 법하다.


로맹 가리를 작가가 아니라 한 인간이라 표현한 것은, 비록 그가 중복 수상이 금지된 공쿠르 상을 두 번 받은 유일한 작가로 기억되더라도, 작가라는 한 단어로는 축약할 수 없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당시 러시아 제국령이었던 현재의 리투아니아, 빌뉴스에서 로만 카체프로 태어난 그는, 유태인 박해를 피해, 자신의 어머니와 함께 프랑스로 이주했다. 파리 법과대학에서 공부하던 그는 세계 2차대전이 발발하자, 자유 프랑스 군에 비행사로 참전하여, 레지옹 되뇌르 훈장을 받을 정도로 혁혁한 공을 세웠다. 전후에는 프랑스의 외교를 맡아, UN에 파견되거나, 로스 앤젤레스의 프랑스 총영사를 맡는 등 로맹 가리는 군인으로도, 외교관으로도 대단한 삶을 살았지만, 여기서 인간, 로맹 가리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 아직 작가로서의 삶을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쟁 전에 문단에 등단했던 로맹 가리는 1956년에는 <하늘의 뿌리>로 공쿠르 상을 수상한다. 단편 <새들은 페루로 가서 죽다>가 주목을 받긴 했지만, 공쿠르 수상 이후의 작품들은 평단으로부터 이전과 같은 호평을 받지 못했다.


로맹 가리와 진 세버그, 로맹 가리는 영화감독의 삶을 살기도 했다.


자신의 이름이 그 힘을 잃었다 생각한 것인지, 로맹 가리는 포스코 시나발디, 샤탕 보가트 그리고 르네 드빌이라는 가명을 사용하며 문학 활동을 계속한다. 그의 수많은 페르소나 중 가장 큰 성공을 가져다준 것은 바로 에밀 아자르로, <내 앞의 생>으로 두 번째 공쿠르 상을 수상하게 된다. 자신을 한 물간 작가 취급하던 평단을 실컷 비웃어 준 로맹 가리는 아자르의 이름으로 계속 작품을 발표했다. 가리와 아자르의 수상한 접점을 의심하던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의 이중 (혹은, 다중) 삶이 폭로된 것은 가리의 사후에, 그의 회고록에 의해서였다. 로맹 가리는 1980년 12월 2일, 권총으로 자신의 삶을 마감한다. 전부인 진 세버그의 자살 1년 후인지라,(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 등으로 유명한 배우로 좌파 배우였던 그녀에 대한 FBI의 미디어 공작이 자살 원인이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죽음과 연관을 짓지만, 그는 자신의 유서의 첫 줄로 세버그와의 접점을 부인한다. "진 세버그와는 아무 관련 없다."라고 단호하게 말이다. 그의 유서 마지막 문장은 더욱 단호한데, 그는 "나는 마침내 나를 완전히 표현했다"라고 말한다.

로맹 가리의 유서, <결전의 날>

영화보다도 영화 같은 로맹 가리의 약력을 읽고도 그에게 빠지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나도 <밑줄 긋는 남자>의 주인공처럼, 내 앞의 생에 로맹 가리가 몇 권 남지 않은 것 같아 두렵다. 작년에 <내 앞의 생>을 통해 그를 알게 된 후, 작년에만 그의 저작 3 권을 읽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점에서 로맹 가리의 단편집,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를 본 순간 책을 꺼내 들어야만 했다. 이제 4권을 읽었으니, 앞으로 로맹 가리는 27권만큼 남았다. 스물세 살인 나이니까, 나도 쉰 살까지 로맹 가리를 매년 보려면, 그를 아껴두어야 한다.




인간을 혐오하는 휴머니스트

로맹 가리를 흔히들 휴머니스트라고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는 인간에 대한 본능적인 혐오감을 가진 사람이기도 하다. 그가 동족에 의해 받은 수많은 상처들을 생각해보면, 어쩔 수 없지 않을까. 유태인 혐오는 그를 고향땅에서 영원히 추방시켰으며, 쫓겨온 프랑스에서도 다시 쫓아 내지기도 했다. 평단은 그를 시대에 뒤떨어진 진부한 사람 취급하며, 그를 자신의 이름으로부터 도망치게끔 했다. 한때 그의 아내였던 진 세버그의 정치 활동에 불만을 품은 FBI는 세버그에 대한 치밀한 공작으로 그녀를 스크린에서 쫓아내고, 후에는 자살로까지 몰아붙였다. 매번 자신을 세상의 끝으로 몰아내기만 했던 세상으로부터 로맹 가리를 살아가게끔 한 것은 희망이었다. 이번 만은 저번과는 다를 것이라는 희망 말이다. 그리고 그 희망은 타인으로부터 나오는 법이다.

로맹 가리는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를 영화화할 때, 자신의 부인, 진 세버그를 여주인공으로 캐스팅했다.

단편집의 표제작인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의 주인공은 삶에 치이고 치여, 세상의 끝, 페루의 해변으로까지 밀려와 카페를 운영한다. 호락호락하지 않았던 인생은 그를 절망시키기만 해, 끝끝내 그를 냉소적으로 만들었다. 새들이 죽으러 오는 해변에 몸을 던지려 한 여성을 구하고, 그녀를 품으며, 희망 역시 잠시나마 품게 되지만, 이번에도 삶은 그를 실망시킬 뿐이었다.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는 다분히 자전적인 소설이다. 주인공이 한때 프랑스 레지스탕스 대원이았다는 점과 여성 편력을 가진 중년의 나이대라는 설정은 로맹 가리 그 자신을 연상케 한다. 무엇보다도, 로맹 가리는 자신이 감독을 맡으면서까지 이 소설을 영화화하면서 여주인공에 당시 자신의 부인이었던 진 세버그를 캐스팅했다. 때문에, 이 작품은 '인간을 혐오하는 휴머니스트'라는 로맹 가리의 모습을 특유의 필치로 가장 잘 담아내고 있다.


페루, 터키, 크로아티아, 독일, 소련 등의 전 세계를 넘나드는 로맹 가리의 단편선들은 모두 로맹 가리의 전 인류에 대한 양가적 감정을 가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어떤 휴머니스트>와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이야기>는 광기의 나치즘이 어떻게 이성의 동물인 인간에 의해 발현되었고, 지탱되었는지 로맹 가리의 인간관을 통해 잘 드러내주고 있다. 그는 <고상함과 위대함>과 <역사의 한 페이지>에서 나치주의자들을 호탕한 웃음으로 한껏 비웃어 주기도 한다. 그러나 어디 혐오스러운 인간 군상들이 나치뿐이었는가? <비둘기 시민>, <영웅적 행동에 대해 말하자면>, 그리고 <도대체 순수는 어디에>를 통해서는 서구 시민들의 자기반성이 결여된 세계관 역시 능숙한 반전을 통해 풍자한다.


더불어 모파상이나 체호프의 작품들과 같이 반전에 중점을 둔 <가짜>, <본능의 기쁨>, <도대체 순수는 어디에> 등도 모두 인간에 대한 실망감을 넘어선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작품들이다. 특히 <벽-짤막한 크리스마스 이야기>는 오 헨리의 <크리스마스 선물>의 완벽한 대척점에 있다. 그러나 로맹 가리를 구제불능의 인간 혐오증 환자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그는 인간에 대한 희망을 끝까지 놓치지 않았다. 그는 가장 혐오스러운 역사의 단면들을 몸소 체험했으면서도, 인간이란 본디 악한 존재라는 섣부른 귀납적 판단보다는 그들의 행동을 자신의 글을 통해 규명하려 애썼다. 오히려 그는 시대의 풍파를 인류애로 줄곧 버텨오며, 희망적 예외만을 기대한 낙천주의자였던 것이다. 그의 단편, <어떤 휴머니스트>의 칼 뢰뵈와 마찬가지로 말이다. 칼 뢰비가 인본주의와 낙관주의를 믿으며 끝끝내 책을 놓지 않았듯, 로맹 가리가 펜을 놓지 않은 것은 한번 올까 말까 한 메시아적 희망을 위해서가 아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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