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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만복 Aug 10. 2022

국어 잡아먹는 영어

복거일,『국제어 시대의 민족어』

익숙한 것의 가치


'대한민국'이라는 바닷속에는 다양한 언어들이 살고 있었다. 1443년, 글을 읽지 못하는 백성들을 위해 세종대왕께서 만드신 '한글(한국어)'을 기본으로, 영어, 일본어, 중국어 등 다른 바다에서 넘어온 외래어들이 조화롭게 살고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일까. 대한민국 속에 살고 있는 한국어의 수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어느 날부터 외래어들이 한국어를 잡아먹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그중에서 가장 먹성 좋기로 소문난 '영어'가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한국어를 보이는 대로 먹어치웠다. 많은 어부들이 영어를 누구나 배워야 하는, 배울 수밖에 없는, 배워야 할 것 같은 언어라고 몸집을 키워주었기 때문이다.


몇 년 전에는 한국사 교과서를 한국어가 아닌 영어로 만들 계획이라는 풍문이 나돌았다. 대한민국의 학생들이 우리나라의 역사를 영어로 배우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을 통해 우리나라의 역사를 외국에 잘 알릴 수 있을 것이라고 입을 모아 말했다. 나는 이 풍문을 듣고 매우 당황스러웠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알기 위해 교과서까지 살펴보는 외국인들이 세계에 얼마나 있을까. 영어를 못하는 학생들은 역사를 어떻게 배워야 할까. 그때 당시에는 한국사 교과서를 영어로 만들자는 풍문 외에도 '영어 공용화'에 대한 담론이 끊임없이 펼쳐지고 있었다.


당시 일부 사람들은 국가경쟁력을 위해 국어보다 영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어는 배울 때 비용과 시간이 많이 들며, 국어보다 영어가 기회비용이 훨씬 적다고 주장했다. 당시 나는 우리나라의 GDP 수준으로 볼 때, 다른 나라에 비해 우리나라의 경쟁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또한 국가경쟁력을 높이는데 언어의 역할도 반드시 중요하지만, 수준 높은 기술력의 근간은 우리의 것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했다. 물론, 영어는 반드시 배워야 한다. 지금은 세계화 시대고, 과거에 비해 외국인과의 접촉이 늘고 있다. 따라서 적절한 영어와 국어 사용의 조화가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가치관과 정신이 담겨있는 한국어를 굳이 폄하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왜 영어가 세계 공용어가 되었을까? 일부 사람들은 영어권 국가가 국제적으로 우위를 점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주변 국가들이 국가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영어권 국가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라고 덧붙인다. 그렇다면 반대로, 대한민국이 국제 사회에서 힘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오히려 반대로 주변 국가들이 한국어를 배우려고 노력했을까? 어렸을 때 어른들은 중국어, 일본어 등 아시아 강국의 언어를 배워야 한다고 강요했다. 그런데 지금은 영어를 배우라고 한다. 그리고 신문 사설에서는 현재 급부상하고 있는 인도를 따라 인도어를 배워야 한다고 한다. 우리가 우리의 언어로, 독자적으로 국가경쟁력을 키우는 방법은 결코 없는 걸까.


<국제어 시대의 민족어>에서는 민족주의자들을 비판하고 영어 공용화에 대해 찬성한다. 민족주의자들 때문에 나라가 진보하지 못했고, 그들이 사라져야 국가경쟁력의 향상과 국제 시장에서 권리를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나는 이것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이다. 현재 우리나라는 세계 각지에 다양한 상품들을 수출하고 있고, 아직은 부족하지만 나름대로 국제사회에 목소리를 내고 있다. 또 거리에만 나가더라도 수십 개의 건물과 아파트들이 줄을 지어 세워지고 있다. 우리가 어렸을 때 왜 의무교육을 통해 태극기를 그리고, 애국가를 부르며, 역사를 배울까. 어떻게 우리의 것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국가경쟁력을 높일 수 있을까.


ⓒ Photo By 국가문화유산포털


예로부터 양반들은 한자를 배워 관리직에 나가고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반대로 평민들은 밤낮으로 노동에 시달리면서 단 1,000자의 한자도 외우지 못할 만큼 노동과 착취에 고통받아야 했다. 배우기 싫은 게으름이 아니라, 밤낮으로 그렇게 일하지 않으면 그들의 착취를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를 어엿비 여긴 세종대왕은 신하들의 온갖 반대에도 무릅쓰고 백성들을 위한 글자를 만들었다. 그 글자가 바로 오늘날의 한글이다. 물론 돈을 벌어다 주고 경쟁력을 높여주는 글자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만든 글자, 한 나라를 대표하는 언어는 과연 세계에서 몇 개나 될까.


최근에는 세계 각지에서 한국을 주목하고 있다. K팝의 부흥과 한국 문화에 대해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문화판에서는 한국 시장을 잡기 위해 별도의 홍보전략을 짤만큼 한국 문화 위상이 높아졌다. 이것이 우리나라가 영어를 잘하기 때문에 이뤄진 것일까. 아니다. 세계 각지에 우리나라를 알리기 위해 노력하는 그들의 피와 땀 없이 지금의 K트렌드 시대를 열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타임스퀘어에서, UN연설장에서 한국어로 세계인을 주목시키고 있다. 왜 외국에서는 한글과 한국의 것을 배우려고 하는데, 왜 아직도 우리는 우리의 것을 버리고 다른 것으로 바꾸려고 할까. 도대체 언제쯤 익숙한 것의 가치가 얼마나 소중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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