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INECAT Sep 28. 2018

영화 읽기 : 셔터 아일랜드

옛날 메모들 끌어올리기 - 2010년


카프카의 <심판>과 마틴 스콜세지의 <셔터아일랜드>, '인식'의 서사


카프카의 소설<심판>에서 주인공 요제프K는 30살의 생일에 갑자기 재판소로부터 체포당한다. 하지만 체포 이후 그를 구속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단지 '체포' 되었을 뿐이지만, 그는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하여 무던히 애를쓴다. 하지만 모두가 '체포' 되어있는 카프카적 인식의 세계에서 요제프K의 무죄의 증명이란 결국 세계 안에서의 자신의 존재의 상실, 부정으로 이어질 뿐이고, 결국 세계에 체포된 그가 이 굴레를 탈출 하는 유일한 해방구는 '죽음'뿐이다.


마틴 스콜세지의 영화<셔텨 아일랜드>의 세계도 다르지 않다. 영화가 시작함과 동시에 테디는 셔터아일랜드로 들어선다. 영화의 전개는 정신병자의 섬. 즉 미친자의 세계에서 주인공인 테디가 자신이 미친것을 자각하는 일련의 서사로 이루어 진다. 사방이 바다로 가로막힌 셔터아일랜드에 테디가 들어온 순간부터 그는 스스로의 의지로 섬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일종의 '수감' 상태가 된다. 그는 총을 가지고 있지 못한다는 섬안의 내규를 따름으로써 총을 가지고 있는 부소장과 여타 경비원들과 분리되고, 보안관의 상징인 '총'을 반납합으로써 일종의 '수감자, 환자' 로서의 지위를 획득한다. 


테디 다니엘과 요제프K는 유사하다. 영화의 극적 전개가 결국 테디의 '섬에 갇혔다는 인식'으로부터 출발하는데, 요제프K의 '죄' 또한 자신이 '체포되었다는 인식'으로부터 시작한다. 그것이<심판>에서 K의 30살의 생일로 시작하는 것은 태어남과 동시에 세계에 종속된 인간이라는 카프카적 인식에서 발로한다. 


셔터 아일랜드로 대변되는 미친자들의 세계는 곧 우리의 세계다. 범주화 시키자면 '미국'이다. 소설과 영화의 세계는 현실의 세계로 확장되고, 이들의 탈출불가능성은 우리가 세계를 탈출할수 없는 것과 맞물려 굉장한 몰입도를 가져오게 된다. 한가지 카프카와 스콜세지의 차이가 있다면 요제프K는 끊임없이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한 방법을 찾았다면 테디 다니엘은 자신이 미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부정보다 세계의 부조리를 증명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점이 다르다. 하지만 두 인물 모두 그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고 결국 그들이 세계로부터 자유로워 질 수 없다는 '인식'의 순간으로부터 그들의 유일한 능동적 돌파구는 '죽음'으로 귀결된다.


영화 말미에서 자신이 미친자(레이디스)임을 고백한 직후 테디는 척에게 "괴물로 살아갈텐가, 선량한 사람으로 죽을텐가?" 라고 묻는다. 미친자들의 세계인 셔터 아일랜드에서 그의 정신병 증세로 대변되는 뫼비우스의 띠, 즉 아무리 노력해도 제자리로 돌아오는 이 세계의 '탈출불가능성'을 인식한 순간부터 그가 선택 할수 있는 것은 세계에 순응하여 미친 자로써 삶을 영위하는것(괴물로 살아가는것)과 능동적인 죽음을 선택하는것(선량한 사람으로 죽는것) 뿐이다. 영화에서 결국 그가 정원을 쓸고 있는 다른 사람들처럼 세계의 부속품으로 삶을 영위할 것인지 죽음을 선택했는지는 보여지지 않는다. 그는 단지 바닷가의 등대의 모습을 한 쇼트로 보여주면서 영화를 끝낸다. 영화의 전개가 결국 테디 다니엘의 정신병을 증명하기 위한 서사로 이루어 졌다는 면에서 우리는 이 열린 결말에 대하여 두가지의 사고의 기로에 놓인다. 하나는 테디가 레이디스이고, 그는 원래부터 미친 사람이었다는 사고와, 그는 정상이었지만 셔터아일랜드에 갇힘으로 해서 미친자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고다.


등대, 폭력의 공간


영화보는 내내 나는 불편함을 느꼈고, 그것은 서사의 과정이 일반적인 것이 아니라 관객을 향한 치밀한 세뇌의 과정이기 때문이었다. 3장구조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이례적으로 긴 2장을 가진 것이다. 이러한 변형된 3장구조는 M. 나이트 샤말란감독의<식스센스>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식스센스>에서는 주인공(브루스 윌리스)가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3장의 반전에 도달할때까지의 복선과 단서들을 깔아 놓기 위하여 2장을 이례적으로 길게 쓰고 있다. 


<셔터아일랜드>에서도 그가 자신이 미쳤다고 인식하는 3장으로 향하는 플롯포인트까지의 길이는 무려 100분이다. 총 러닝타임이 120분이 조금 넘는 이 영화에서 정말 긴 2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 긴 2장의 과정은 그가 미쳤다고 관객들이 생각하게 만드는 단서들을 뿌리는데 사용되지만,<식스센스>와는 조금 다른 양상을 보인다. 치밀하게 테디가 미쳤음을 증명하는 단서로 뿌려지는 2장의 서사는 단지 그 목적으로만 사용되기에는 너무나 맥거핀들이 많을뿐더러 과잉이다. 2장 내내 삽입되는 아내의 환영과 다카우 수용소에서의 기억들은 감독이 테디가 미쳤다는 사실로 인해 관객이 깜짝 놀래는 것을 의도했다면 너무나도 설명적으로 나열된다. 과연 감독이 의도한 것이 테디가 미쳤었다는 '사실'인 것일까?


과감히 아니라고 대답할 수 있는 것은 2장에서 끊임없이 제시되는 단서들이 다만 그가 미쳤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뿌려지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단서들은 항상 중의적인 의미를 가지고, 한편으로는 셔터아일랜드라는 세계의 폭력성을 상징하지만 한편으로는 테디의 정신병을 뒷받침하는 단서로 사용된다. 그중 위에서 언급했듯 영화의 마지막에 감독이 제시한 '등대 쇼트'에서 볼수 있듯 등대는 영화내에서 가장 중의적인 의미로, 의미심장한 장소로 비추어진다. 


등대가 오물처리장이라고 말하는 부소장의 복선과 등대의 실질적인 쓰임을 직접적으로 제시해주는 레이첼 박사의 말을 통하여 등대는 셔터아일랜드 안에서 가장 폭력을 상징하는 공간으로 제시된다. 그들이 행하는 뇌절개 수술이라는 것은 결국 '인식'의 제거다. 갇혔다는 인식- 즉 외부 세계와의 단절의 인식이 아닌 이 셔터아일랜드라는 공간 자체를 스스로의 세계로 인식하게 하는 과정(이것은 주변인들을 자신이 살던 세계의 우편배달부처럼 인식하는 가짜 레이첼 솔란도에서 확실히 보여진다.)이고, 세계의 내면화다. 이 극단적인 폭력의 공간을 상징하는 것이 '등대' 이다. 세계에 적응하지 못하는 쓰레기를 처리하는 '오물처리장'일 뿐만아니라, 테디 다니엘이 '미쳤음'을 세뇌와 논리를 통하여 증명해주는 곳이다. 영화에서 '등대'가 뇌절개 수술을 행하는 장소가 아니라는 것은 테디의 정신병을 증명하는 단서로 사용되지만 결국 마지막 쇼트로 다른의미로 제시된다. 쇼트와 쇼트간의 연결이 다른 의미를 창조해내는 '몽타주' 개념을 빌리자면 확실하게 이 등대라는 공간은 전 쇼트와의 연결을 통해 테디가 뫼비우스의 띠를 끊고자 '죽음'을 각오하고 향하는 장소로 제시된다. 결국 등대의 본질은 '폭력'이고, 테디는 등대라는 공간 내에서 강제적으로 셔터아일랜드라는 세계에 편입된다. 


'미쳤다는 것'의 개념화와 범주화 - 셔터아일랜드와 미국, 세계


미쳤다는것은 기본적으로 정상(Normal)과의 이질성을 전제로 한다. 정상과 미쳤다는 것의 구별은 또한 정상이라는 것의 개념화와 범주화에 따라서 달라진다. 무엇이 정상이고, 어디까지가 정상인가? 영화는 이 물음을 통해서 셔터아일랜드라는 공간을 우리가 사는 세계로 오묘하게 확장해 낸다.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전작들을 보면 그가 가지고 있는 '미국'이라는 세계에 대한 개념이 대단히 비판적임을 알 수 있다. 베트남 전쟁 직후의 미국사회를 그린<택시 드라이버>에서 '영웅'이란 명분앞에서 살인이 합리화되는 미국사회의 일면을 날카롭게 보여주었을 뿐만아니라, 미국 이민사를 그린<갱스 오브 뉴욕>에서는 뉴욕이 이룩한 현재의 영화로움이 결국 폭력과 착취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인식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미국 비판적 시각은<셔터 아일랜드>에서도 여전한데, 레이첼 박사와 테디의 대화에서 그 골자를 찾을 수 있다. 


레이첼 : 내가 미쳐보이나?


테디 : 아니요


레이첼 : 미치지 않았다고 뭐가 달라지지? 카프카적인 작전이군. 사람들이 미쳤다고 할때, 아니라고 하면 오히려 더 미쳐보이지. 


테디 : 무슨 뜻이죠?


레이첼 : 사람들이 미쳤다고 할때, 아니라고 하면 오히려 더 미쳐보이지. 정신병자로 결정나면 당신이 뭘해도 미친거야. 합리적인 반항은...(중략)


결국 마틴스콜세지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세계의 폭력성'이라는 진실이다. 정상과 미친 것에 대한 구별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앞서 말했지만 무죄임을 증명하려고 했던 요제프K의 노력이 무의미한 것처럼 테디 다니엘이 자신이 미치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하려고 하는 노력또한, 그리고 우리가 누가 미친것임을 구분하려는 시도 또한 무의미하다. '모난 돌이 정을 맞는' 것처럼 세계에 이질적인 존재가 세계의 폭력에 의해서 세계에 편입되는 과정이 이 영화의 서사가 의미하는 전부다.


우리는 태어남과 동시에 세계에 종속되고 어느순간 그것을 인식해낸다. 요제프K의 30살 생일일 수도 있고, 테디처럼 셔터 아일랜드에 들어가는 순간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인식의 순간은 개개인별로 다르지만 세계를 인식함으로써 우리는 세계와 이질화 되고 분리된다. 태어나는 것 자체가 지극히 수동적이고 일종의 '폭력'인 현실에서 우리가 세계를 향해 폭력을 휘두를 수 있는 방법은 결국 존재의 순수성을 지킨 상태에서의 능동적인 '죽음' 뿐인 것일까? 그렇다면 다시한번 되묻고 싶다. 우리는 세계에 의해 변질되어진 괴물, 돌연변이로 살아야 할 것인가? 아니면 선량한 사람으로 죽어야 할 것인가?


작가의 이전글 글에 앞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